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흥행의 신-49화 (49/116)

# 49

이제 나도 제작사 대표(6)

한강이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아파트에서 사는건 은정이 평소 꿈꾸던 삶이었다.

특히 30평이 넘는 넓은 아파트에 언니와 둘이서 산다는건 1년 전만 해도 꿈도 꿀수 없었던 일이었기에 요즘 은정은 얼굴에서 미소가 떠날 줄 몰랐다.

“너도 이리 와서 앉아.”

세연이 손님 왔다고 간단히 먹을걸 만드는 은정에게 말했다.

“난 됐어. 언니 캐스팅 얘기에 내가 왜 끼어?”

“너도 배우잖아. 옆에서 조언해주면 좋지.”

은정의 말에 그녀 맞은편에 앉아 있는 박운규 실장이 거들었다.

“그래요, 은정 씨. 옆에서 듣고 조언 좀 해줘요.”

“별로 도움도 안 될걸?”

“괜찮으니까 빨리 와.”

“알았어. 샌드위치 다 만들었어.”

은정이 간단히 만든 샌드위치와 음료수를 들고 소파 테이블 위에 올려놓자 박운규 실장이 물었다.

“은정 씨는 아직 소속사 결정 안 하셨죠?”

“네. 지금 고민중에 있어요.”

“그럼 언니랑 같은 회사로 오지 그래요? 아무래도 더 잘 봐주지 않겠어요? 언니가 자리 딱 잡고 있는데...”

서른살 조금 넘는 박운규 실장은 이십대 초반부터 로드매니저를 해와서 나이치고는 상당한 경력을 자랑하고 있었는데 세연의 담당실장이 된 이후로 계속해서 은정에게 추파를 던졌다.

원래 연예인 매니저들이 사람을 보면 곧 돈이 생각해서 그런지 밖에서 언니와 같이 있을 때 만나거나 지금처럼 집에서 만날 경우 계속 자기네 회사로 올 것을 권유했다.

만날 때마다 궁금한거 있냐는 둥, 어느 드라마 작가가 지금 차기작 준비한다는데 소개시켜주마 따위의 말들을 수시로 건넸다.

“조금 더 생각해보구요. 그런데 무슨 작품이에요?”

은정이 화제를 돌리자 세연이 몇 개의 용지를 건네주었다.

“이건 드라마, 요것도 드라마... 이건 영화. 그리고 이것도 영화. 드라마 두 개, 영화 두 개야.”

“오올~ 많이 들어왔는데? 다 주연이야?”

세연이 말도 안 된다는 듯 은정의 어깨를 때리며 말했다.

“야, 너 나 놀리는 거지?”

“헤헤... 너무 티났나?”

“에효, 나도 빨리 전부 주연급으로만 들어왔으면 좋겠다.”

세연의 한탄에 박운규 실장이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스타 되는거 금방입니다. 벌써 주연급도 하나 들어왔잖아요. 조금 떨어지는 종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일단 드라마 주연은 주연이니까요.”

“그럼 나머지는 다 조연이겠네?”

“응, 근데 실장님이 말한 것처럼 시청률 극도로 안 나오는 비인기 종편채널이라 사람들이 거의 보질 않아. 너도 AMN에서 하는 드라마 뭐 있는지도 모르잖아?”

“아... 그렇게 생각하니까 또 그렇네.”

“그래서 고민중. 넌 어떻게 생각해?”

“내가 골라줘?”

“골라준다기보단 의견을 내달라는거지.”

“흠... 그럼 한 번 볼까? 음... 이게 그 문제의 종편 드라마야? 제목이 ‘연애와 편견’이네? 벌써부터 재미없다. 작가도 처음 들어보는 분이고... 일단 이건 패쓰.”

은정은 네 개의 시놉시스 중 하나를 내려놓고 다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이건 ‘욕망의 화살’? 제목부터 막장의 스멜이 풀풀 풍기는데?”

“그렇지? 하필 캐릭터도 말괄량이 여동생. 가끔 재수 없는 그런 캐릭터 있잖아.”

“아... 무슨 말인지 알겠다. 그런데 그런거 매력적으로 나오기 힘든데.”

“주말극이야. 주말극에 이런 캐릭터라서 마음이 안 가긴 하는데...”

박운규 실장이 끼어들었다.

“그래도 지상파 주말극이라 시청률은 보장이에요. 한지연 보셨죠? 주말극 조연으로 나왔다가 빵 떠서 지금 케이블 주연으로 쓰이고 있지 않습니까? 보통 젊은 사람들을 대상으로만 인지도를 신경쓰는데 꼭 젊은 사람을 대상으로 하지 않아도 됩니다. 주말극으로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면 다음부터는 이런 조연급 말광량이 캐릭터 하고 싶어도 안 들어와요. 그때는 바로 주연급으로 넘어가는 겁니다.”

은정도 그의 말에 동감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렇긴 하죠. 한지연이 바로 딱 이런 캐릭터였잖아. 캐릭터가 마음에 안 들긴 해도 나쁘진 않네.”

“그건 그렇지.”

세연이 씁쓸한 얼굴로 인정했다.

“그럼 이건... 어? 뭐야? 장동훈 감독님거잖아?”

“응, 장 감독님이 연출하시는 작품인데 거기 형사 역할이야.”

“형사? 언니가 형사를 한다고? 흐음... 전~혀 어울리지 않는데.”

“나도 딱 그 생각이야.”

“이게 언니한테 갔구나...”

은정은 괜히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장동훈 감독이 언제 자신에게 같이 하자는 말이 없었다고는 했지만 그래도 내심 다음 작품에도 자신을 불러주길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아닌 언니에게 시나리오를 보내니 괜히 섭섭하고 서운했다.

“장동훈 감독님 작품 하는거 알고 있었어?”

“어? 어... 전에 우리 회식할 때 잠깐 이야기가 나왔었어. 그러다가 얼마 전에 감독님이 제작사 차린거 다 알게 됐지. 그리고 이 작품 주인공으로 정훈 선배님이 됐다고 알고 있어.”

“같이 출연했던 사람들끼리 친한가 봐? 난 작품하고나서 끝나면 거의 연락 안 하는데.”

“우린 아직도 단톡방 있어. 거기서 계속 연락하고 그래. 며칠 전에도 만나서 술 한 잔 했지. 멤버가 정훈 선배님이랑 현재 오빠랑, 슬기 언니랑...”

“이야... 인맥이 아주 장난 아니네?”

“히힛. 내가 쫌 인싸잖아. 어쨌거나 한 번 볼까? 나도 한다고 말만 들었지 아직 한 번도 시나리오를 본 적은 없거든.”

“그래, 한 번 봐봐. 아, 서브 남주로 주혁이 캐스팅 됐다네. 알고 있었어?”

“응, 당연하지. 그런데 정훈 선배랑 주혁 선배 캐스팅 된 거 밖에는 몰라. 다른 사람 누가 됐는지... 일단 한 번 볼게.”

은정은 찬찬히 시나리오를 살펴보았다.

5분이 흐르고 10분이 흘러도 계속 시나리오에서 눈을 못 떼던 은정은 기다림에 지친 세연의 하품 소리에 시나리오에서 눈을 뗄 수 있었다.

“아, 미안.”

“엄청 집중해서 보네.”

“아니, 보다 보니까 재미있어서.”

“그래? 재밌었어? 난 좀 뻔하던데?”

“응, 뻔하긴 한데 그래도 몰입감이 있네. 원래 클리쉐를 잘 써야 좋은 작가인데 장동훈 감독님이 확실히 클리쉐를 잘 쓰는 것 같아.”

“아이구 신은정 평론가님. 작품 평론은 그만 하시구요. 결론을 좀 내주시죠?”

세연의 비아냥에 은정이 입을 삐죽이며 시나리오를 내려놓았다.

“비중이 조금 적긴 하네. 언니가 하기엔 조금 부족해 보일 수 있겠다.”

“그치? 그리고 분량을 떠나서 난 내용도 솔직히 재미 없더라. 내 스타일이 아니야.”

“그럼 그냥 주말 드라마 해. 그게 제일 낫겠다.”

은정은 나머지 하나 남은 시나리오는 보지도 않고 소파테이블에 올려놓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더 앉아 있지.”

“아니야. 나 준비해서 나가야 해.”

“약속 있어?”

“난 뭐 약속도 없나? 나도 배우야. 왜 이래?”

새침한 표정으로 돌아선 은정은 자신의 방에 들어와 문을 닫았다.

꽉 깨문 입술로 잠시 문을 기대고 서 있던 그녀는 자신의 책상 위에 놓여 있는 핸드폰을 집어 들고 침대에 몸을 던졌다.

그리고 분노가 담긴 장문의 톡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감독님 잘 지내셨어요? 오늘 날씨가 너무 화창하고 좋네요. 전 집에 언니랑 같이 시간을 보내다가 오후에 연기학원을 갈 생각이었는데 마침 오늘 언니네 소속사에서 시나리오를 보여줘서 같이 검토하는 시간을 가졌어요. 언니 앞으로 보내진 시나리오를 보며 이름있는 배우가 되어 간다는 것이 어떤 건지 실감이 나더라구요. 저도 노력해서 언니보다... 아니, 최고의 배우가 되어보자 다시 한번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감독님의 작품이 언니에게 왔더라구요. 감독님 차기작 한다는 소식은 건너건너서 얼핏 듣기는 했는데 이렇게 생각지도 못하게 시나리오를 보게 될 줄은 몰랐어요. ㅠㅠ 다른 분도 아닌 장.동.훈. 감독님의 작품이라 자세히 읽어보았는데 내용도 너무 재미있더라구요. 황정훈 선배를 도와주는 여형사 역할도 깨알같은 재미와 액션도 있는 것 같아서 매력적이었습니다.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감독님. 작품 성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백수 은정이가.]

*

동훈은 장문의 톡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그 모습을 본 유지은 팀장이 툭하니 물었다.

“뭔데 그렇게 집중해서 보세요?”

“아니, 은정이가 톡을 보냈는데 시나리오를 재밌게 봤다는건지 아니면 섭섭하다는건지 잘 모르겠네요.”

“어디 제가 좀 봐도 될까요?”

“네, 그러세요.”

유지은 팀장은 동훈에게서 핸드폰을 건네받고 깨알같이 쓰여진 장문의 톡을 읽었다.

“푸하핫!”

톡을 다 읽은 유 팀장이 웃음을 터뜨리더니 동훈에게 말했다.

“감독님, 아무래도 은정이가 단단히 삐진 것 같은데요?”

“삐졌다구요? 내가 시나리오를 안 줘서 그랬을까? 근데 은정이한테 시나리오 안 줬어요?”

“당연히 안 줬죠. 아직 소속사도 없고 연기 공부중이라면서요? 세연 씨도 특별히 준 거예요. 감독님하고 인연이 있었으니까요. 유명진 감독님이 생각한 몇 명 제의해보고 잘 안 되면 그냥 오디션 할 생각이었어요.”

“그랬구나.”

사실 이번 작품에서 은정을 포함해 조연급 캐스팅은 아예 머릿속에 들어있지 않았다.

조연급 이하 캐스팅은 조감독인 명진이와 유지은 팀장이 담당하는 만큼 손을 대지 않으려 했고 중요한 주연급만 신경쓰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실 거예요? 제가 보낼까요? 아니, 그것보다 은정 씨가 이 캐릭터에 잘 맞을 것 같아요?”

“음...”

은정이처럼 귀여움이 바탕이 된 아름다움을 가진 여자가 여자 경찰을, 그것도 액션장면까지 찍는다고 생각하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 싶었다.

특히 다른건 몰라도 일단 은정의 나이가 너무 어려서 역할을 수행할 수가 없었다.

나이가 들어보이는 인상이라면 모르겠지만 아무리 많이 봐줘도 23 이상으로는 안 보이니 말이다.

“왜요? 별로에요?”

“네. 은정이랑 어울리는 캐릭터는 아니에요. 그리고 솔직히 세연이도 그닥... 맞지 않구요. 세연이가 아주 잠깐 액션장면을 찍기는 했지만 잠깐 나오는 분량이었으니까 상관 없었던거지 분량이 상당한 경찰이었다면 캐스팅하지 않았을거예요. 너무 곱게 자란티가 나서... 세연이나 은정이나 욕하면서 범죄자를 때려잡는 역은 아무래도 아니죠.”

“그건 감독님 말씀이 맞는 것 같아요.”

“미안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래요. 은정 씨가 많이 섭섭해하겠다. 그런데 작품욕심이 상당하네? 하긴 배우가 이래야지.”

“맞아요. 감독이든 배우든 일단 뭐가 보이면 붙들고 늘어져야 합니다. 은정 씨가 그런 면에서 근성이 있어요. 잘 될 거야.”

동훈은 그렇게 마무리하려다가 다시 유 팀장에게 핸드폰을 건네 받고 잠시 생각에 빠졌다.

어쩌면... 이번 악질형사는 아니더라도 다른 작품이라면 가능할 것도 같았다.

은정이 특유의 독기를 발산할 수 있는 그런 영화.

*

“그럼 그냥 주말극으로 할까요?”

“그렇게 해요, 세연 씨. 분명히 이거 찍고 나면 다음번엔 미니 여주 확정입니다. 내가 약속할게요.”

“그럼 나 실장님 믿고 가요?”

“하하하, 잘 하셨어요.”

그렇게 세연이와 박운규 실장이 기쁨의 웃음을 지을 때 은정이 방에서 나왔다.

들어갈때와 똑같의 모습의 은정을 보고 세연이 물었다.

“너 나간다며?”

“응, 나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일이 생겨서.”

어딘가 모르게 자랑하고 싶어 죽겠는 눈빛.

이제는 눈빛만 보고도 동생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기에 세연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일인데?”

“장동훈 감독님이 시나리오를 보내줬지, 뭐야. 그거 보구 캐릭터 분석 해야해서.”

“어? 그럼 이거?”

세연이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악질형사의 시나리오를 집어들자 은정이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그거 말구... 제작비가 90억이 넘는다던가? 하여간 나중에 알려줄게.”

“칫, 그래라.”

세연이 치사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릴 때 은정이 고개를 홱 돌리며 말했다.

“그런데 나 주조연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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