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흥행의 신-48화 (48/116)

# 48

이제 나도 제작사 대표(5)

사흘 뒤, 종로 피맛골 깊숙한 골목 어딘가 조금은 허름하고 조금은 아늑한 분위기의 술집.

양호민 감독은 가게 한 구석에서 몇 명의 무리와 함께 있었다.

“어쨌든 잘 됐으니 축하해.”

“축하해요, 형.”

며칠 전만해도 채권자에게 쫓기는 것처럼 불안해 보였던 그는 지금은 사람좋은 아저씨로 변해 있었다.

“고마워, 다들... 하... 정말 시나리오 들고 사방을 헤맬 땐 진짜 죽고 싶었는데 우여곡절 끝에 결국 계약까지 갔네. 인생 참 모르겠다.”

양호민 감독의 맞은편에 앉은 성창욱 감독은 씁쓸하게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그래, 인생 진짜 모르겠다. 아니, 어떻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장동훈 감독이 만든 회사에서 네 작품을 받아줬을까? 난 솔직히 장동훈이라는 이름 작년에 처음 알았어. 그 6급 공무원인가 하는 그것 때문에... 난 놈은 난 놈인가봐? 어떻게 작품 두 개 찍고 다 성공시킨 다음에 간 크게 제작사를 차릴 생각을 했지?”

그는 양 감독과 충무로에 같이 들어온건 물론이고 같은 대학에 같은 영화동아리까지 나온 아주 절친한 친구였다.

양 감독은 술에 취해 힘없이 머리를 흔들었다.

“그래, 나도 처음엔 안 믿기더라고. 이제 회사를 차려서 첫 작품 크랭크인도 안 했는데 90억짜리 작품을 하겠다니까 처음엔 ‘이 새끼가 선배한테 장난치나?’ 했다니까?”

“근데 진짜 받아들일 거야? 막말로 지가 다 해먹고 싶다는 걸수도 있잖아. 그래놓고 나중에 잘 안되면 너한테 뒤집어 씌울수도 있지 않을까?”

그는 성창욱 감독의 우려를 인정했다.

“사실 나도 그게 걱정스러워. 내가 솔직히 장동훈이 제작사, 그 이름 뭐야... 그래, DH미디어 앞에서 들어갈까 말까 수십 번을 고민했다. 따지고 보면 걔가 내 한참 후배 아니냐.”

“그렇지.”

“그런데 걔한테 찾아가서 시나리오 내밀고 검토 맡으면서 씨발, ‘이것 좀 제발 만들게 해주세요’ 이렇게 말해야 하는데 내가 돌지 안 돌겠어? 그런데 내가 이거 만들어보겠다고 자존심 다 팽개치고 들어가서 앉았는데 지가 내 각본에 손을 대는 게 조건이라는거야. 내가 거기서 머리에 땡 하고 종이 울리더라고.”

“그렇지. 뒤통수를 한 대 후려 맞은 기분이었겠지.”

“그런데 x같은게 내가 거기서 차마 못 하겠다는 말이 차마 입에서 안 떨어지는 거야.”

“키야... 양호민 성격 많이 죽었다. 후배가 네 각본에 손을 대겠다는데 주먹이 안 나간게 신기하다, 신기해.”

“내가 주먹만 안 나갔지, 속으로 욕을 수천 번을 했다.”

“아니 그래서... 정말 받아들일 거냐고. 어?”

양호민 감독은 채근하는 성창욱 감독을 보며 자조의 웃음을 보였다.

“그럼 계약서까지 썼는데 어쩌게?”

“아니, 세상 살면서 법대로만 하고 살아? 새까만 후배 새끼가 이래저래 참견하는데 어떻게 참아? 그리고 막말로 연출봉 딱 쥐고 귀 막으면서 하면 지가 어쩔 거야? 영화 엎을 거야?”

“각본 먼저 만들고 촬영 들어가겠지.”

“각본 두 개 만들면 그만 아니야. 이거 참 답답하네.”

성창욱 감독은 가슴을 탕탕 두드리며 답답해 했다.

그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던 박광효 감독이 나섰다.

“그냥 말로만 그러는거 아닐까요? 설마 대선배님의 각본을 고치려고 들까요?”

“눈치를 보니 각본 손 못대게 하면 아예 캐스팅도, 투자도 시작조차 하지 않을 놈이다. 눈빛이 독해보여. 그런 새끼는 한번 한다고 하면 고집 못 꺽는다.”

양 감독의 대답에 박광효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 친구가 좀 독하긴 하죠. 왜 우리 모임에 유병세 감독 있지 않습니까?”

“페르소나?”

“네.”

“그 모임 대장이 유병세 아냐?”

성창욱 감독의 말이 정곡을 찔렀는지 박광효 감독이 슬쩍 시선을 내리깔았다.

“저희가 나이가 몇 살인데 대장이 어디 있어요. 그냥 모임을 주도하는 것 뿐이지...”

“하여간 그래서?”

“원래 유병제 감독하고 장동훈 감독이 잘 어울려 다녔었어요.”

“둘이 아는 사이였어?”

“네. 그런데 음... 아시잖아요? 유 감독이 원래 사람을 좀 가리는거.”

“유 감독 걔는 평소엔 사람 좋게 굴다가 가끔 사람 뒷목 잡게 하는게 있지. 무서운 애야. 너 걔랑 자꾸 어울리지 마.”

“에이... 그래도 모임에 들어 있으면 많은 정보도 얻고 얼마나 좋은데요?”

“좋아 보이는 거지. 실속이 있어야 하는데 너 그 모임 들어가서 영화 몇 편 찍었냐? 4년간 꼴랑 한 편 아니야?”

“그렇긴 하지만...”

“어쨌든 그래서?”

잠시 시무룩한 모습을 보였던 박광효 감독은 신나게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아 글쎄요, 전 둘이 친한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장동훈 감독이 6급 공무원으로 입봉하면서 둘 사이가 틀어졌나 봐요.”

“아니면 원래부터 유 감독이 싫어했거나. 원래 안 그런 척 하면서 잘 그러잖아.”

“아, 네 뭐... 하여튼 그랬는데 이번에 유 감독이 영화 개봉했을 때 첫 언론시사회에서 반응이 썩 좋지 않았거든요. 기사는 좋게 나가긴 했는데 관계자들 반응이 영 별로였어요.”

“음... 그랬구나. 우리야 관계자가 아니었으니 당시 진짜 반응은 몰랐지. 개봉하고 나서 봤는데 다른 건 몰라도 평소 유 감독 스타일이 아니긴 했어.”

“네. 하여간에 언론시사회 반응 안 좋다고 관계자들 사이에 말이 쫙 돌았을 때 우리 페르소나 사무실로 케이크 하나가 딱 배달이 왔었잖아요.”

“설마...?”

“네. 그 설마가 딱 맞았습니다. 장동훈 감독이 보낸 거였어요. 케이크만 해도 빡치는데 편지까지 있었습니다.”

얘기가 재미있었는지 양호민 감독이 물어본다.

“뭐라고 적혀 있었는데?”

“내용은 간단 했습니다. ‘개봉을 축하합니다. 대박나세요. 파이팅!’ 이렇게요.”

“하하하하!”

“푸하하하!”

두 나이든 감독들은 배를 잡고 웃어댔다.

그렇게 한참을 웃을 때 다시 박광효 감독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것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이후에 ‘왕의 눈물’ 때문에 난리 났었던거 아시죠?”

대답은 맞은편에서 듣고 있던 성창욱 감독이 했다.

“무대인사때 관객이랑 싸웠던 거?”

“유병세 감독이 싸웠다기보단...”

“알아. 이시은 매니저랑 싸운 거. 재수가 없었던 거지.”

“하여튼 그것 때문에 여론 안 좋아지고 초반 스크린 확보했을 때 못 채우는 바람에 욕은 욕대로 먹고 하여튼 장난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케이크도 아니고 빵만 봐도 굉장히 예민하게 굴어서 사무실로 빵도 못 사가지고 갑니다.”

“하하하.”

“유 감독 그건 마음을 좀 곱게 써야해. 어쨌든 방금 이야기는 좀 꼬시다. 내가 그놈 건들거리면서 선배들 무시할 때부터 영 꼴보기가 싫었는데...”

성창욱 감독이 열심히 뒷다마에 열중할 때 양호민 감독이 물어왔다.

“넌 그래서 작품 언제 하냐?”

박광효 감독은 또다시 고개를 숙였다.

“시나리오는 대략 준비해놨는데...”

“또 엎으려고?”

“소재는 좋은데 이게 중반 이후부터 진행이 안되는 겁니다. 플롯의 구조가 너무 허약해서 손을 대긴 대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모르겠고... 죽겠습니다.”

“사무실에서 유 감독이랑 놀지나 말고 얼른 작품이나 하나 만들어. 그래서 나처럼 제작사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늘어지라고. 내가 새까만 후배한테 개쪽까지 먹었지만 결국 계약서에 도장 찍었잖아? 그럼 처자식한테 줄 돈 생기는 거고 여기 이렇게 술값 내도 부담스럽지 않게 됐어. 언제까지 계속 엄청난 작품만 나오기를 기다릴거야?”

“죄송합니다.”

언제나 마지막은 항상 꾸중을 듣는 식으로 끝나는 술자리지만 박광효 감독은 이 자리가 제일 좋았다.

대선배들과 술자리라 불편하기도 하지만 그나마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해주는 이들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꾸중을 한번 들었으니 조만간 억지로라도 시나리오 하나를 완성시켜서 보여드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

“그러니까... 지금 감독님이 연출하는 ‘악질형사’ 외에 한 작품을 더 할 거라는 말씀이시죠?”

“네.”

에스원 투자법인의 황대철 상무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동훈을 바라보았다.

“두 개의 작품을 동시에 진행 가능하겠습니까?”

“엄밀히 말하면 동시에 진행하는게 아니고 순차적으로 진행한다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악질경찰이 끝나자마자 바로... 물론 바로 시작한다고 바로 촬영이 들어가는게 아니라 프리 프로덕션의 시작을 그렇게 잡는다는 겁니다. 아마 촬영은 최소 반년에서 일년 정도는 지나야 가능할 거구요.”

“당연히 캐스팅과 투자가 늦어지지 않는다는 가정에서겠죠?”

동훈은 희미한 미소를 그렸다.

“맞습니다.”

“그런데... 이거 사이즈가 너무 큰데요?”

새로운 세계의 제작비가 백억이었다고는 하지만 그건 제작사인 ‘영화세상’에서 마음먹고 야심차게 준비한 것이고 DH미디어는 아직 사업자등록증에 도장도 안 마른 회사였다.

그런 신생회사가 이런 큰 프로젝트를 한다고 하니 투자자는 마음이 안 놓이는게 당연했다.

“어차피 오늘 상무님께 이걸 투자해달라고 온건 아니니까요. 그냥 앞으로의 계획을 말씀드린겁니다. 오늘은 악질형사의 투자를 하기 위해 만난 자리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상무의 앞에 놓여있던 트리트먼트를 슬쩍 다시 가져왔다.

그 모습에 황대철 상무는 다시 미소를 찾았다.

아무리 동훈이 두 편의 영화를 연속으로 흥행시켰다고는 하나 동훈이 연출하는 것도 아닌 다른 감독의 영화를 투자해야 한다는 건 부담스러운 일이었을테니 말이다.

“말했듯이 우리의 정책은 확실해요. 톱스타 캐스팅이 첫 번째고 두 번째는 스타 감독의 연출인데 일단 장동훈 감독님에 대한 우리 회사의 신뢰는 아직까지는 견고합니다. 두 편의 영화를 연속으로 크게 성공시킨 감독은 많지 않으니까.”

“감사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장동훈 감독님이라고 해도 톱스타 없이 큰 투자는 힘든데 이미 주혁을 캐스팅하고 메인투자까지 받으신 상황에서 리스크 부담을 줄이고 투자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돼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 준비해 놓은 계약서입니다.”

동훈은 미리 준비한 도장을 차례로 찍으며 계약을 마무리 지었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건 두고 갈까요? 아, 부담가지지는 마세요. 어차피 시간은 많이 남았으니까.”

동훈이 ‘돌연변이 형체(가제)’라고 쓰여 있는 트리트먼트를 살짝 흔들자 황 상무가 잠시 망설이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시죠.”

“그럼...”

동훈이 떠나고 난 뒤 황 상무는 동훈이 주고 간 트리트먼트를 들고 컨텐츠 지원팀으로 찾아갔다.

“상무님 오셨습니까.”

팀원 여러명이 황 상무를 보고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가 손을 흔들며 말했다.

“됐어, 일 봐. 정소나 팀장, 혹시 이거 알아?”

황 상무가 묻자 가장 안쪽에서 기립하고 있던 정소나 팀장이 후다닥 달려와 황 상무에게서 트리트먼트를 건네 받았다.

“이거요? 음... 어? 이거 양호민 감독꺼네요?”

“알아?”

“네. 요즘 양호민 감독이 이거 들고 제작사 돌아다니고 있었거든요. 저도 이거 보기도 했었고요.”

“봤다고? 어땠는데?”

“음... 뭐랄까... 재미는 있을 것 같은데 제작비가 너무 많이 들어가서 쉽게 결정할 수 없다고 했었죠. 아마 우리 쪽에 한 번 봐달라고 했던 제작사는 이거 드랍시켰을걸요? 그런데 상무님께서 이거 어떻게 얻으셨어요? 아, 방금 장동훈 감독이랑 계약하실 때...”

“맞아. 장동훈 감독이 주고 갔어.”

놀란 정소나 팀장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설마 이걸 하겠다고 하던가요?”

“어. 아예 놓고 갔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장동훈 감독이 직접 주고간거라 나도 이걸 깔때는 명분이 필요해. 그러니까 네가 이거 잘 분석해서 보고서 올려봐. 제작기획서를 주고 간 건 아니니까 라이트하게 말이야.”

“알겠습니다.”

황 상무가 떠난 자리 정소나 팀장은 그가 주고간 트리트먼트를 원망스럽게 쳐다보았다.

“망했네. 캐스팅도 안 된 거라 캐스팅 핑계를 댈수도 없고. 무슨 핑계를 대야 하나.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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