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
이제 나도 제작사 대표(4)
대뜸 도와달라는 소리에 유지은 팀장이 힐끗 동훈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말했다.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거세요, 감독님?”
“여기 트리트먼트 있으니까 한 번 봐줄래요?”
양호민 감독이 노란 봉투에 담겨있던 트리트먼트를 꺼내 내놓았다.
“저도 봐도 될까요?”
동훈이 묻자 그가 황급히 고개를 끄덕인다.
“아유, 그럼그럼... 읽어 봐.”
“감사합니다.”
“감사는 제작 확정됐을 때 내가 해야지.”
그는 자신은 못 느낄지 모르겠지만, 어딘가 모르게 제법 날카로워 보였다.
왜 그런지는 말 안해도 조금 짐작이 갔다.
수많은 제작사와 미팅을 하며 계속된 거절에 몸과 마음이 지쳤을테고 이제는 어느 정도 거절에 대비해 마음의 준비까지 하고 있을 터였다.
제작을 하기 위해 이런 노력과 아픔을 겪는 건 김영웅 감독이 있던 곳도 똑같았었고 김영웅 감독 역시 그런 아픔을 무수히 겪어 왔었다.
그래서 그가 겪고 있는 고난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다.
어쨌거나 동훈은 그가 가져온 트리트먼트를 집어 들었다.
[돌연변이 형체]
제목은 괜찮아 보였다.
앞장을 넘겨 천천히 내용을 살펴보는데...
“어?”
동훈의 반응에 양호민 감독이 휙 돌아본다.
“왜? 이상해?”
“아뇨, 아무것도... 일단 계속 읽어볼게요.”
동훈은 손사래를 치고 계속 읽어나갔다.
한 화학 회사의 실수 때문에 벌어진 사고, 이후 탄생한 괴생물체가 도심을 습격한다는 내용이다.
가족 중에 막내가 괴물에 납치되는 것도 그렇고 이후 가족이 대피시설에서 도망쳐 가족들만의 힘으로 잃어버린 막내를 찾으러 가는 것도 김영웅 감독이 있던 곳의 봉준명 감독이 연출한 ‘괴물’과 거의 흡사했다.
단지 이게 더 생각없이 볼 수 있는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게 다를 뿐이었다.
봉준명 감독이 연출한 괴물이란 영화는 단지 거대한 괴물이 사람을 습격하는 단순한 내용이 아니었다.
감독은 사건의 원인과 정부의 무능한 일처리를 풍자하면서 그 과정에서 한 가족이 갈등과 화해를 거치며 마지막에 이르는 순간까지의 처절한 과정을 너무 심각하지만은 않게 오락적으로 잘 연출했다.
이후 국가적인 재앙이 닥쳤을 때 정부가 위기에 대처하는걸 보면 괴물에 나왔던 정부의 무능한 일처리와 너무도 흡사했었기에 그의 깊은 안목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절정의 기량을 가진 봉준명 감독이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했는데 어쨌든 영화의 깊이는 다를지 몰라도 줄기가 비슷한 시나리오를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재미있는데요?”
시나리오를 덮으며 하는 말에 양호민 감독이 의혹어린 시선으로 물었다.
“정말 재밌어? 어떤 부분이 재밌었는데?”
그냥 예의상 재밌다고 하는 건지, 정말로 재밌어서 재밌다고 하는건지 확인하고 싶은 것 같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요. 한 회사의 이기심으로 사건이 발생하는건 자주 쓰이는 클리쉐이면서도 관객의 몰입을 유도하는데 좋고 괴물이 아닌 한 가족을 중심으로 하면서도 사건의 흐름이 촘촘히, 박진감 있게 이어지는 것 같아요. 관객들은 2시간 동안 충분히 가족의 일원이 돼서 몰입해 볼 것 같아요.”
양호민 감독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조금 결연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만약 제작한다면 성공할 가능성이 있을까?”
이게 애매했다.
시나리오에서 살이 많이 붙여진 트리트먼트이긴 하지만 이것 그대로 영화가 그대로 나와준다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트리트먼트대로만 영화가 나와주면 투자자들도 상업영화 투자에 고민할 거리도 줄어들 것이고 제작사들도 업무 속도가 빨라질게 틀림없다.
결국 동훈이 궁금한건 양호민의 머릿속에 정확하게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가였다.
단순히 이야기를 어떻게 가져간다는게 아니라 정확히 어떤 장면을 어떤 구도와 대사, 카메라 워크를 생각하고 있는지가 궁금했다.
“가능성 있다고 봅니다.”
“정말?”
“네.”
“그럼 제작 할 거야?”
“그러죠.”
오히려 동훈이 오케이를 하고 나오니 양호민 감독이 더 당황했다.
“정말? 이거 하겠다고?”
“네.”
“총제작비가 90억이 넘는 건데?”
“보니까 그렇네요. 그런데 당장 제 수중에 90억 없다고 해도 만들 수 있는거 아닙니까? 원래 제작이라는게 빚부터 내고 시작하는거 아닌가요?”
“그러다 망하면 어쩌려고?”
이제는 되려 동훈을 걱정한다.
“안 망하게 노력해야죠. 물론 이 작품 제작하는거 그냥 하는거 아닙니다. 조건이 있어요.”
“조건?”
조건이 있다고 했음에도 그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
어쨌든 해달라는 대로만 해주면 제작을 해준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네. 들어주실 건가요?”
“일단 조건부터 들어보자.”
“조건은 딱 하납니다. 감독님께서 연출하시는 방향에 제가 조언을 드릴 수 있게 하는 거예요.”
“조언? 그러니까 간섭을 하겠다는거지?”
“제 입장에서는 조언이지만 감독님 입장에서는 그렇게 들리실 수 있다는거 인정하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셔도 무방합니다.”
양호민 감독이 처음으로 노기를 드러냈다.
“장동훈 감독. 건방진 소리라고 생각하지 않아?”
이렇게 나오는게 당연했다.
위계질서가 생각보다 무거운 영화계에서 동훈보다 연출이 근 10년 가까이 앞선 감독이었다.
그런 대선배 연출을 간섭하겠다니 화를 안 내는게 오히려 이상한 거다.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 순수하게 작품이 잘 되기만을 바랍니다. 선배님이 생각하시는 것 이상으로 전 이 작품이 잘 됐으면 좋겠어요.”
“대박 나면 돈을 많이 버니까 좋겠지.”
“그 이유 뿐만은 아닙니다. 뭐, 어차피 말해도 믿지 않으실테지만 전 좋은 영화가 더 많이 스크린에 걸렸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더 많은 관객들이 영화를 볼 것이고 그럼 더 좋은 영화들이 만들어 질테니까요”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네.”
양호민 감독이 커피숍에서 했던 이야기였다.
자신이 했던 말을 똑같이 자신이 듣게 되니 기분이 이상한지 고개를 갸웃갸웃한다.
“사실 중요한 건 이유가 아닙니다. 전 이 영화 충분히 재밌다고 생각하고 있고 이 영화 성공시킬 자신도 있습니다.”
“어째 니 영화처럼 말한다?”
“제작사 대표니까 저와 계약하게 되면 제 영화나 다름없죠.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
“솔직히 저 아니면 다른 곳에서 이 영화 만들어준다고 하지 않죠?”
“...”
“이 영화 성공하면 감독님의 명성도 크게 올라갈 겁니다. 지금까지 공포영화 감독이라는 인상이 강했잖습니까. 이런 블록버스터 영화 하나 찍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이렇게 중소형 제작사 돌아다니 필요 없으실 거예요.”
양호민 감독은 목이 타는지 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그리고 입을 거칠게 훔치며 물었다.
“투자는 어떻게 받을 건데?”
“생각해놓으신 배우 있어요?”
“있기는 한데...”
말끝을 흐리는 걸 보니 대충 짐작이 갔다.
“잘 안 되신 건가요?”
“슬쩍 찔러만 본 거긴 한데, 가타부타 답이 없어. 제작사를 결정하지 못했으니까 그러는거겠지.”
“그렇겠네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얘기였다.
양호민 감독의 흥행력과 작품성을 믿었다면 제작사를 구하지 못했다고 해도 배우가 캐스팅을 거절하지 않았을 거다.
아니, 오히려 자신이 더 나서서 제작사를 설득하는 경우도 있지만 동훈은 모른척 넘어갔다.
“왜? 캐스팅 힘들겠어?”
“아니요. 미리 생각해놓으신 배우랑 합의를 봤으면 그대로 진행했어야 했을텐데 안 됐다면 저랑 상의하면서 결정하시죠. 투자는 우리 유지은 팀장이 진행해 볼겁니다.”
유 팀장은 앉은 자리에서 제작을 결정해버리는 대표의 황당한 결정에도 일단 표정하나 구기지 않고 웃으며 인사했다.
“다시 한번 인사드릴게요. 제작 프로듀서 맡고 있는 유지은입니다. 앞으로 감독님 영화 진행을 책임지고 해 나갈게요. 잘 부탁드립니다.”
이제 무거운 짐을 내려놓았는지 양호민 감독의 얼굴이 처음으로 웃음기가 돌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제가 더 잘 부탁드립니다.”
꾸벅 인사하고 자리에 앉은 양 감독은 동훈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래, 어떻게 조언을 하고 싶냐? 스탭을 네가 원하는대로 짜야해? 아니면 촬영장에 와서 연출을 하고 싶어? 캐스팅 권한을 다 네가 가질래?”
“캐스팅은 무조건 우리가 원하는대로 하라고 강요하지 않을테니까 적당히 상의하시면 될 것 같고 스탭이나 연출은 제가 손을 대지 않을 생각입니다.”
연출력 자체가 부족한 감독이었다면 애초에 제작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거다.
공포영화는 무릇 씬과 씬 사이의 긴장감과 플롯의 완벽함을 추구하기에 기본이 안 된 감독은 결코 성공하기 힘든 장르가 바로 공포영화다.
양호민 감독은 다른 장르도 아닌 공포영화로 아시아 내에서 손꼽히는 감독이라 연출력 자체를 의심하지는 않았다.
“그럼?”
“각본을 저와 같이 만드시죠.”
“각본을 손대겠다고? 어디에 손을 대려고? 그리고 고작 이거 읽고 바로 칼을 댈 부분이 보였다고?”
황당할거다.
고작 10분 정도의 짧은 시간 동안 살펴본 것만으로 손을 댈 부분이 보였다는건 동훈이 천재이거나 시나리오가 형편없었다는 뜻이니까.
동훈의 입장에서야 너무도 완벽한 작품이 떠올랐기에 그걸 비교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는 자신이 고심고심해서 만든 시나리오를 보고 단박에 부족하다고 선언한 셈이니 황당할 수밖에.
“아직 정확하게 뭘 떠올린 건 아니에요. 그냥 조금더 보완한다면 정말 좋은 작품이 될 것 같아서 그럽니다.”
여기서 부족한 부분을 하나하나 열거하면서 찝어내면 더 이상한 놈으로 볼 것 같아 그냥 얼버무렸다.
“네가 제시한 보완점이 내가 보기에 별로면?”
“아마 마음에 드실 겁니다. 그리고 만약에, 정말 만약이지만 제가 제시한 각본이 별로라고 생각하면 그냥 제 의견을 따라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와... 이거 완전 말 안통하는 제작사 대표가 되시겠다는 거구만?”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건 인정하지만 어쨌든 이게 저희 조건입니다.”
양호민 감독은 머리를 벅벅 긁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해보자. 내가 다른 사람이라면 아무리 영화를 만들어준대도 싫다고 했겠는데 영화를 연속으로 두 개나 흥행시킨 너니까 작품을 망치려고 하지는 않겠지.”
“그럼 내일 다시 방문해주세요. 계약서 만들어서 준비해놓고 있을 테니까요. 아, 그리고 이거 각 소속사에 돌릴거니까 워드파일 메일로 보내주시구요.”
“알겠다.”
양호민 감독은 볼일이 다 끝났다는 듯 사무실을 나가려 휘적휘적 발걸음을 옮겼다.
“어? 감독님, 식사라도 하고 가세요.”
“맞아요, 선배님. 같이 식사라도 하고 가요. 어차피 저희 점심 먹으려고 했어요.”
양 감독은 황급히 손을 저으며 퉁명스레 말했다.
“내일 계약서 도장 찍고 먹자. 지금 먹으면 체하겠다.”
그의 마음이 이해된 동훈은 고개를 숙이며 그를 보내줬다.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들어가십쇼.”
“그래, 내일보자.”
황급히 사무실에서 사라지는 그를 보며 유 팀장이 말했다.
“너무 성급하게 결정한거 아닐까요? 이거 넘어지면 감독님 꿈을 펼치기도 전에 우리 길거리에 나 앉는다구요.”
“걱정마세요. 이거 됩니다. 되는 작품이에요. 오히려 다른 곳에 가지 않고 우리 회사에 와준게 감사할 정돕니다. 아까 각본 손봐준다고 했을 때 때려치고 회사 박차고 나가지 않은것만으로도 전 너무나 감사하고 있어요.”
유지은 팀장은 그저 황송해하는 동훈이 이해가 가지 않는지 고개를 흔들며 자리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