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
이제 나도 제작사 대표(1)
“이거 이번에 WAS 엔터에서 배우 캐스팅하지 않으면 완전 나쁜놈 되는거 같은데요?”
“어머, 뭘 또 그렇게 생각하세요? 솔직히 감독님이 우리 배우 써주시면 감사할 일인데 안 한다고 해도 뭐라 하지는 않을게요. 솔직히 속은 조끔 상하겠지만.”
“그게 해달라는 말 아닙니까?”
그녀는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감독님이 알아서 해석하세요. 그리고 오신 김에 식사라도 하시는게 어때요? 전에 보니까 고기 좋아하시던데 오늘은 제가 살게요. 슬기 고것이 끝끝내 자기가 산다고 해서 난 대접도 못 해드렸네.”
서로 주고 받을 거 다 끝났으니 마다할 필요가 없다.
“좋습니다. 오늘도 많이 얻어먹어야겠네요.”
“많~이 드세요. 안 그래도...”
고 대표가 말을 이어갈 찰나 대표실 문 밖에 쿵! 소리가 나며 유리창이 깨질듯한 뾰족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아! 진짜 이게 뭐야! 대표님! 언니!”
급기야 언니라는 말까지 나오자 고 대표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저년 저거 또 시작이네...”
“저 목소리 임현주 아닙니까?”
“맞아요.”
고 대표가 대답한 순간 밖에서 현주가 쾅! 소리와 함께 문을 열고 들이닥쳤다.
“아, 대표...”
그녀는 들어오며 동훈을 발견한 후 재빨리 숨을 가다듬었다.
“여기가 네 집이니? 엄마 찾는 거야? 아주 지랄 났다, 진짜 손님 앞에서...”
“난 몰랐지. 아니 왜 손님이 있으면 있다고 얘기를 안 해줘요?”
“미친, 네가 말 할 새가 있게 들어왔니?”
임현주는 고 대표의 질책에 대답 없이 동훈의 맞은편에 다소곳이 앉았다.
마치 방금 전의 소동은 자신과 상관없었다는 듯 여전히 아름다운 얼굴로 우아하게 말이다.
“뭔데 그래? 또 석태 들들 볶았지?”
“무슨 말이에요? 내가 왜 석태를 볶아?”
동훈은 자신이 지금까지 알던 현주의 연기실력을 분명 잘못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방금전 그 상황을 다 들켰음에도 어찌 저렇게 뻔뻔하게 표정을 바꿀 수 있단 말인가?
자신도 황당한데 고 대표는 오죽할까 싶었다.
“그래, 그건 됐고 뭔데? 뭔데 그래?”
“나 이제 드라마 안 한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왜 또 드라마 캐스팅 이야기가 나오는 건데? 나 이제 진짜 드라마 안 해. 내가 정말 한 이야기 또 하고, 또 하고, 진짜 미치겠다. 어쨌든 내가 이번에 제작사한테 직접 안한다고 정확히 말했거든요? 기자한테도 말했어요. 이제 더 이상 이거 가지고 나 귀찮게 하면 안 돼요. 이츠 오버. 오케이?”
그래도 동훈 앞이라서 그런지 현주는 최대한 화를 억누르며 차근차근히 말했다.
“네 마음 알지만 그렇다고 그냥 놀거야? 그래서 내가 너 몇 달 해외에서 놀다 오라고 했는데 네가 싫다고 했잖아. 또 무슨 바람이 들어서 놀긴 싫대?”
“그걸 꼭 내 입으로 말해야 해?”
고 대표는 그녀에게 손을 흔들며 이만 나가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알겠어. 일단 손님 왔으니까 나가 있어. 우리 식사하러 가야해.”
“같이 드시죠. 현주 씨도 식사 안 하셨을텐데.”
솔직히 현주와 식사하는게 부담스럽긴 했지만 식사라는 이야기가 나온 만큼 같이 들지 않겠냐고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왜 한국사람은 밥에 민감하지 않은가?
특히 동훈은 더했다.
조감독 시절일 때 감독이 배우들과 맛있는거 먹으러 가는데 끼어주지 않으면 괜히 심통나서 하루 종일 기분이 나쁘곤 했었다.
결국 다시 말하자면 그냥 예의상 물어본 거였다.
“뭐 먹으러 가는데요?”
“대표님이 고기 사신다고 하셔서...”
“어머, 맛있겠다.”
이쯤되면 같이 가는 걸로 확정났다고 봐도 무방하다.
“일단 나가. 그리고 하던 얘기 끝나고 갈거니까 나가 있어.”
“칫, 알겠어요. 전화해요.”
현주가 새침어린 표정으로 쌩하고 나가자 고 대표가 다시금 이마를 짚으며 그간의 고생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전에 지가 하고 싶다고~ 하고 싶다고, 해달라고~ 해달라고 해서 박현영 작가 작품에 캐스팅을 시켜 줬었어요.”
“압니다. 그 드라마...”
당대에 손꼽히는 드라마 작가인 박현영의 작품에 참여했던 건 영화감독인 동훈도 수많은 기사를 접해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 역시도...
“망한거 알죠? 그냥 망하기만 했으면 괜찮았을거예요. 솔직히 박현영 작가 이름값이 있어서 그렇지 5%면 어느 케이블 드라마도 쉽게 장담할 수 없는 시청률이잖아요? 박현영 작가라서 망했다는 말이 나오는거지.”
“그럼요. 쉽지 않죠.”
“문제는 현주 저게 그렇게 고생해서 찍은 작품이 5% 밖에 안 나오니까 너무 상심을 한 거예요. 쟤 성격 지랄맞은거 감독님도 익히 아시죠?”
“하하... 뭐...”
나름 최선을 다해 동의를 표했다.
“그런데 저 성격에 촬영장에서 사고 한 번 안 치고 묵묵히 연기했어요. 지가 좋아하는 작가고 지가 하고 싶어서 회사를 얼마나 들들 볶았는지 아니까. 우리가 지 캐스팅 시킨다고 박현영 작가를 얼마나 설득 시켰는데... 그걸 아니까 묵묵히 참고 연기했던 건데 지 성질을 그렇게 참았으니 얼마나 화가 쌓였겠어요?”
“아유, 많이 힘들었겠네요.”
남 일이니까 이렇게 쉽게 얘기하는거지 만약 현주와 같이 일하는 연출가였으면 그저 그녀가 입 다물고 연기에만 열중하는 것에 감사했을게 분명했다.
“힘들어했죠. 그런데 결과도 나쁘고 또 네티즌들이... 우리 현주가 고생한 걸 너무 몰라. 후... 그것 때문에 드라마가 끝나고 나서도 얘가 너무 스트레스를 받았던 거예요.”
드라마를 한다는 것에 저렇게 경기 일으키듯 달려온게 어느 정도 이해는 갔다.
“그렇구나...”
“에휴, 다 쓸데없는 얘기지, 일어나요. 쟤 밖에서 기다리다가 또 문 부수고 달려올라.”
“하하, 설마요.”
웃으며 고 대표와 문을 나서니 현주가 탐색하듯이 쳐다보며 말했다.
“또 내 욕 신나게 했겠네?”
“안 했겠니? 난 네 욕할때가 제일 신나더라.”
그렇게 서로 아웅다웅 하면서 가게에 도착하니 놀랍게도 입구에서 윤슬기와 슬기 매니저 그리고 은정까지 만날 수 있었다.
“어? 감독님? 어?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선배님.”
“응~ 그래, 안녕. 여기서 보네.”
현주는 후배 앞이라서 그런지 그늘하나 없는 얼굴로 그녀들을 반겼다.
“이런 우연이 있나. 은정이는 여기 왠일이야?”
“저 슬기 언니가 밥사준다고 해서 따라왔어요. 그런데 감독님하고 만날 줄 전혀 몰랐어요. 진짜 반갑다.”
고 대표는 슬쩍 현주의 눈치를 보다가 얼른 그녀들을 잡아끌면서 이끌었다.
“잘 됐네요. 우리 같이 식사합시다. 오늘은 내가 사는 자리니까.”
순식간에 딸려들어간 그녀들과 같이 조용한 방에 자리하니 왠지모르게 굉장히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슬기와 은정이도 오늘따라 아무런 내색 없이 가만히 앉아 있는 현주의 눈치를 보느라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고은숙 대표는 계속 동훈에게 말을 걸며 어색한 분위기를 지워나갔다.
“대한민국 최고 미녀들과 식사하니 황홀하죠?”
“그럼요. 고기 맛도 모르고 먹는거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동훈도 조감독 되고 3, 4년 정도까지는 그랬다.
그런데 그 이후부터는 그들도 똑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에 서서히 관심이 떨어졌고 지금에 와서는 다들 내 여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부담스럽기만 했다.
“호호호, 우리 감독님이 참 농담도 잘 하시네.”
고기가 나오기까지 계속 이렇게 의미없는 농담으로 더 어색해질까봐 아까부터 궁금했던 걸 물었다.
“혹시 아까 하려던 드라마가 어떤 드라마였어요? 그냥 궁금해서요.”
현주의 눈썹이 순간 움찔했지만 고 대표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있는 탓에 그녀는 그저 가만히 젓가락으로 샐러드만 집어먹었다.
고 대표는 그런 현주의 태도는 전혀 신경쓰지 않고 한숨을 토해내며 말했다.
“정소희 작가라고 이번에 입봉작이긴 한데 웹툰 원작이라 다들 기대가 많은 작품이거든요.”
김영웅 감독이 있는 곳도 그랬지만 이곳 역시 웹툰이나 애니메이션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 상당히 많다.
특징이 있다면 웹툰 원작은 주로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지고 애니메이션 원작은 전대물로 주로 만들어진다는 것.
물론 애니메이션 중에서도 성인들을 위한 깊이있고 철학있는 작품들이 많고 그걸 바탕으로 드라마나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하는데 대부분 성적이 그리 좋지 못했다.
해당 애니메이션들의 팬덤이 웹툰보다 더 강력했고 원작과 조금이라도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신랄하게 까거나 아예 시청거부, 관람거부 등의 형태로 반발했기 때문이다.
“웹툰 원작이면 초반 인기몰이는 되겠네요. 거기에 임현주 씨가 주인공이면 뭐...”
마음에 없는 칭찬이 아니라 객관적으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주는 계속해서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정소희 작가가 입봉작이라는데 어디서 많이 들어봤었던 느낌이다.
어디서 들었지 하면서 머리를 쥐어 짜내는데 은정이 환하게 웃으며 끼어들었다.
“어? 그거 저도 들었어요. 웹툰이 그 비서 얘긴데 엄청 유명하다고...”
“그쵸? 은정 씨도 아는구나. 우리 직원들이 그 웹툰 드라마화 한다고 할때부터 이건 딱 우리 현주꺼구나 했다니까.”
“우와, 언니. 완전 기대돼요.”
“저두요.”
현주는 애매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러니? 그 웹툰 재밌나보네? 그런데 난 안 하기로 했어.”
“왜요?”
“으음... 그냥 쉴까 생각중이었거든.”
“아쉽다.”
“우리 그런 얘기 하지 말고 다른 얘기 해보자, 슬기 넌 남자친구 없어?”
“아하하! 없어요, 언니. 진짜에요.”
“에이, 딱 보니까 있는데?”
“진짜 없어요. 아하하!”
그렇게 아무런 의미없는 이야기와 함께 미녀들과의 저녁을 함께한 후 다음날 회사에서 유 팀장에게 전날 고 대표가 전해준 서류를 건네주었다.
유 팀장은 서류의 내용을 살펴본 후 상당히 놀라워했다.
“와! 고 대표가 이런걸 줬다구요? 이거 봐. 투자사 대표 직통전화 연락처에요. 이거 아무한테나 안 주는건데? 감독님이 대표들한테 직접 연락하면 완전 짱이겠다.”
“그런가요?”
“그리고 해외 배급사 목록도 완전 좋구요. 전 해외배급사와 별로 컨택해 본 일이 없거든요. 뭐, 그만큼 옛날 우리 제작사가 만들었던 영화들이 신통치 않았던 거지만요.”
그녀는 씁쓸하게 웃으면서 서류를 뒤적이다 다시 물었다.
“그런데 어제 고 대표가 이거 주려고 만난 거예요?”
“아... 회사 배우 프로필 사진도 받아왔어요. 저기 책상 위에 있어요.”
“하하하! 역시 그런 의미였구나. 그냥 줄 리가 없지. 그래도 받은게 있는데 우리도 뭘 좀 줬으면 좋겠네요. 뭘 줘야 하나...”
그녀는 동훈의 책상 위에서 WAS엔터 프로필 파일을 뒤적이며 흥얼거리다 문득 생각났는지 동훈을 획 돌아보았다.
“혹시 그 얘기 들었어요? 임현주가 웹툰 원작 드라마 깠다는거?”
“들었죠. 사실 어제 그거 때문에 임현주가 고 대표한테 찾아와서 난리를 쳤었거든요.”
“그랬구나. 그것 때문에 난리 난 곳이 또 있었어요.”
“네?”
“사실 어제 저녁에 친구들하고 잠깐 만나서 한 잔 했는데 그 친구도 제작사 피디에요. 그런데 이번에 임현주가 드라마 까면서 투자자 미팅 완전히 나가리 됐다고 엄청 괴로워 하더라구요.”
“그럼 임현주 대신 다른 배우는요?”
“지금 그래서 알아보고는 있는데 이게 내년 봄까지 제작에 안 들어가면 작가한테 다시 판권을 사야 한다는 거예요.”
“아... 판권 기한에 걸렸구나.”
제작사가 원작자에게 판권을 살 때 국내에선 판권소멸기한을 넣는다.
예를들어 드라마, 영화로 제작 가능한 판권을 산다고 했을 때 기한을 3년으로 두면 3년이 됐을때까지 제작을 하지 못했을시 판권이 다시 원작자에게 돌아가게끔 되어 있다.
“그래서 봄까지 무조건 만들어야 한다고 지금 주연 배우 섭외 때문에 골머리를 썩더라구요.”
“그런데 그 웹툰 이름이 뭐래요?”
“그게 ‘윤비서가 왜 이럴까’였나? 제목 특색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