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흥행의 신-43화 (43/116)

# 43

흥행감독이 되면?(5)

강남 한복판, 수많은 빌딩 숲에서 한 자리를 당당하게 차지하고 있는 ‘석세스 파이낸셜’은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창작지원 투자법인이다.

말이 창작지원 투자법인이지 그냥 애니메이션과 영화, 드라마 등에 주로 투자해서 수익을 얻는 전문 투자운용사인 거다.

이 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사람은 투자할 작품을 선정하는 장홍주 실장으로 지금 유지은 팀장 앞에서 한껏 분위기를 잡고 있었다.

“유지은 팀장이라고? 요즘 얼굴 자주 보네?”

나이도 별로 차이 안 나면서 꼬박꼬박 반말을 해댔지만 유 팀장은 전혀 기분나쁜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가요? 호호.”

“전에 새로운 세계를 우리한테 안 가지고 왔었잖아? 이게 남의 영화 잘 되는거 보니까 조금 섭섭하더라고.”

“어머, 그러셨어요? 그럼 이번에 같이 하면 딱이겠네요.”

“그런가?”

이제 마흔을 갓 넘은 그는 수많은 작품에 투자하고 성공, 또는 실패해 왔기에 톱스타라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호의를 가지는 사람은 아니었다.

“음... 그런데 진짜 주혁이 하기로 했다고?”

마치 자기가 배우인 양 목소리를 착 깔고 물어보니 유 팀장은 생글생글 웃으며 공손히 대답했다.

“그럼요. 거기에 찍힌 도장이 소속사로 직접 가서 받은 거라 아직 따끈따끈해요.”

“전에 주혁이가 한 영화 망했었지 아마?”

유 팀장은 움찔했지만 웃는 표정을 잃지 않으며 대답했다.

“그건 강해천 감독님의 작가주의 성향 때문에 그렇게 된 거잖아요. 그래도 나름 평단에서는 극찬도 받고...”

“그건 알지. 그런데 강해천 감독 극찬 받은거랑 우리회사랑 상관이 있나?”

“그건 아무래도...”

“그렇지? 사람이 남의 돈으로 뭔가를 만들면 감사할 줄 알아야 해. 그런데 이상하게 말이야 꼭 예술가들은 그런게 없어. 투자 받는게 당연한 줄 안단 말이지. 난 그게 싫어.”

“맞는 말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장동훈 감독을 다른 감독들이 참 본받아야 해. 장동훈 감독 영화는 머리를 비우고 보니까 얼마나 좋아? 관객도 좋고, 우리도 좋잖아?”

“그럼요, 그럼요.”

분위기가 잘 돌아간다고 생각했는지 유 팀장의 웃음에 진심이 묻어나오시 시작했다.

“그런 의미에서 말이야...”

“네?”

“장동훈 감독 애니메이션 하나 맡아보는 거 어때?”

“아... 죄송합니다. 우리 감독님이 애니메이션 쪽은 전혀 생각이 없어셔서요.”

“그건 유 팀장 생각 아니고?”

성질 같아서는 면전에 욕이라도 한 사발 해주고 싶었지만, 그녀는 꾹꾹 눌러 참았다.

“아유, 아니에요. 그럴리가요. 감독님은 애니메이션 생각 전혀 없으세요.”

“아쉽네. 이런 감각으로 애니메이션을 만들면 참 좋을 텐데 말이야. 사실 영화 잘 나온다고 해도 우리 입장에서는 큰 돈 되는건 아니거든. 한국영화는 수출 돼봤자 크게 안 남아. 애니메이션이 많이 남지.”

“호호, 그렇긴 하죠.”

“난 배우들도 이해가 안 가더라. 주혁 정도되면 굳이 한국영화 안 찍어도 되잖아? 드라마만 찍어도 그 인기 계속 유지하는데 왜 영화를 찍는 거야?”

“아유, 상무님도 참... 인기는 드라마로 얻지만, 영화는 별개의 영역이잖아요. 드라마에서 얻는 거랑은 완전히 다르고 또 영화에서만 배울 수 있는 것들도 있으니까... 그리고 사실 드라마가 영화에 비하면 엄청나게 힘들거든요. 돈은 CF로 벌 수 있으니까 왕창 뜨면 드라마 대신에 영화쪽으로 도전하고 싶은 거예요.”

김영웅이 있는 곳이나 여기나 한류스타는 항상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영화는 드라마로 뜬 이후에 하는 새로운 도전인 거다.

“한다는데 투자를 아예 안 해줄 수도 없고... 정치인들은 지들 돈도 아니면서 마냥 우리만 쪼아대니까 우리가 참 난감해. 마음같아서는 가지고 있는 돈 다 애니메이션에 때려넣고 싶은데 말이야. 후... 어쩔 수 없지. 총 제작비가 54억이니 너무 부담스럽지도 않고 말이야.”

“그래도 다른 투자사랑 나눠서 가실 거죠?”

아무리 큰 투자회사라고 해도 수십억이나 되는 큰돈을 혼자 짊어지고 투자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리스크 부담을 줄이기 위해 큰 투자사 하나와 작은 투자사 여러 개가 뭉친다거나 큰 투자사 몇 개가 뭉쳐서 들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30억 추진해 볼테니까 20억은 유 피디가 잡아봐.”

어차피 코딱지만한 회사 차려놓고 제작비 총액을 다 투자받을 거라는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도 않았다.

유 팀장은 30억 정도면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넵! 알겠습니다. 그럼 언제까지 확정을 해주실지...”

유 피디가 눈치를 보자 그의 미간이 확 찌푸려진다.

“좀 기다릴 수 없나? 이렇게 큰 투자회사의 의사결정이 조막만한 제작사 결정하고 똑같이 이루어 질 수 있겠어? 달랑 요 작은 기획서 하나가지고 30억을 며칠 내로 결정해달라는게 말이 돼?”

“아유, 빨리 해달라는게 아니라 언제쯤 될까 궁금해서 그랬죠.”

“빠르면 2주일, 그때까지 결정 안 나면 아마 힘들 거야.”

“알겠습니다. 잘 됐으면 좋겠네요.”

그렇게 빡빡한 브리핑이 끝나고 나온 유 팀장은 곧바로 동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감독님, 저예요.”

“잘 됐어요?”

“네. 잘 됐어요.”

너무 확신에 차서 그런지 동훈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바로 도장 찍겠대요?”

“아니요. 그러진 않죠. 2주 정도 시간을 달라고 하네요.”

“그럼 아직 확정난 건 아니잖아요.”

“잘 됐다고 했지, 확정 났다고는 안 했어요.”

“네?”

“미팅 몇 번에 어떻게 수십억 투자금을 확정시켜요? 어느 투자사도 그러지는 않아요. 대신 제작기획서를 보고 투자하기 꺼려지거나 영 아니다 싶으면 앉은자리에서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안 될 거라는 암시를 팍팍 준단 말이에요.”

“아...”

“아까는 전혀 그러지 않았으니까 무리 없이 30억 따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잘 됐다고 한 거구요. 신생 제작사가 단번에 30억 투자 받는거 결코 쉬운 일 아닌 거 아시죠?”

“그럼요. 그러니까 걱정했죠. 그런데 30억? 와... 그럼 확실히 잘 된 거 맞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차기작 준비만 잘하시면 될 것 같아요. 명진 씨한테 오디션 일정 잡으라고 하시구요.”

“알겠어요. 수고했어요.”

“넵. 들어가서 뵐게요.”

유지은 팀장은 발걸음도 가볍게 사무실로 향했다.

*

전화를 끊은 동훈은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건물을 들어섰다.

오늘 찾아온 곳은 청담동 한 복판에 위치한 WAS엔터테인먼트 건물이었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올라가니 고은숙 대표가 직접 나와서 반겼다.

“밖에 춥죠? 오느라 고생하셨어요.”

“택시타고 와서 괜찮았어요. 그런데 건물 참 좋네요.”

몇몇 대형 제작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영화 제작사들의 허름한 모습과는 달리 이곳은 건물 외벽은 물론이고 내부 역시 고급스럽기 그지 없었다.

“일단 안으로 들어오세요.”

고 대표를 따라 대표실로 들어오니 전에 고깃집에서 봤었던 황대철 상무도 미리 와 앉아 있었다.

“안녕하세요. 제가 늦은 거 아닌가 모르겠네요.”

“어서 와요. 요즘 충무로에서 가장 바쁜 감독을 불러냈으니 이건 기다린 것도 아니지. 약속을 잡고 부른 것도 아니었고... 일단 앉아요.”

오늘 이곳에 온 건 고 대표가 잠시 만남을 청했기 때문이다.

제작사 대표 제안을 거절한 것에 대해 전혀 기분나쁘게 생각하지 않고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 조금 더 긍정적으로 대화해 보지 않겠냐며 부르는데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아니, 조금 더 사실적으로 말하면 이제 새로운 제작사의 대표가 된 입장에서 무언가 얻어갈 것이 있을지해서 찾아온 거였다.

“영화 대박 축하드려요. 어제 내려갔죠? 얼마까지 갔더라?”

고 대표가 상석에 앉으며 묻자 동훈이 대답하기도 전에 황대철 상무가 말했다.

“763만이었던 것 같던데요?”

“와... 대단한데요? 세상에 7백만 관객이라니... 제작사 너무 부럽다.”

“그러게요. 내가 요즘 영화세상 박만구 대표 부러워서 배가 아파 잠을 못 잡니다. 하하하!”

황대철 상무는 한차례 호탕하게 웃다가 말을 이었다.

“내가 장 감독이 우리 제안 거절했다는 말 듣고 박만구 대표 대박 낸 것보다 더 속이 상하더라고. 그런데 내 생각만 하고 살 수는 없으니 뭐라 할 수 없는 일 아닙니까?”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실은 오늘 고 대표가 장 감독을 찾은 건 나 때문은 아니에요. 다른 볼일이 있었는데 장 감독이 온다는 말에 내가 한번 들려본 것 뿐입니다. 그런데 이왕 왔으니 내가 하나 물어볼게요. 혹시 지금 영화 제작 들어간게 있습니까? 내가 전에 얼핏 듣긴 했는데 설마하니 극장에서 이제 내려갔는데 벌써 투자를 받으실 줄은 전혀 몰랐거든요.”

소문 빠르다.

“어떻게 아셨어요?”

“우리가 제작과 투자도 같이 하고 있으니까요. 우리 직원이 저번주부터 석세스 파이낸셜에서 장동훈 감독 차기작 투자를 받느니 뭐니 얘기를 하는데 깜짝 놀랐어요. 전 제작사를 차리고 내년 봄은 돼야 제작을 들어가지 않을까 했는데... 아유 뭐 일처리가 아주 번개처럼 해치워버리네.”

“돈이 별로 없어서 최대한 빠르게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음... 그럼 혹시 주연이 누군지 알려줄 수 있어요?”

아주 조금은 예민한 문제라서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뭐 때문에 그러시는지...”

“아, 다른 건 아니고... 나도 우리도 그 영화에 한 다리 걸쳐 보고 싶어서 그럽니다. 설마 제작비 총액 다 투자 받은 아니겠죠?”

“그건 아닙니다. 해주신다고 하면 저희야 감사하죠.”

“하하, 내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장동훈 감독이니까 시나리오도 잘 모르고 투자 결정을 합니다. 이런 경우는 애니메이션 밖에 없는데... 하하하!”

“생각지도 못하게 투자를 받게 됐네요. 감사합니다. 자세한 투자기획서와 일정은 직원 통해서 상무님 회사로 보내라고 하겠습니다.”

신생 제작사가 영화를 제작하는데 있어 많은 어려움이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부분이 있다면 바로 캐스팅과 투자다.

김영웅 감독이 있던 그곳에서도 스타 감독이 제작에 참여하지 않는 한 중소형 제작사가 투자를 받는다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이었다.

일단 시나리오가 좋고 캐스팅이 잘 되고 안 되고를 떠나서 회사가 중간에 망해버릴 확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런 경우가 무수히 많기도 했고.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요. 그럼 난 볼일이 끝났으니 이만 일어 나겠습니다.”

황대철 상무가 나가자 고 대표는 서류봉투 하나를 들고 동훈의 앞에 내려놓았다.

“이게 뭡니까?”

그녀는 봉투에서 서류를 꺼내며 말했다.

“제작사 새로 세웠으면 필요한게 많을 거예요. 경력이 상당한 제작 프로듀서를 받았다고 해도 제작 프로듀서가 회사일을 다 처리할 수는 없거든요. 가장 앞에 있는게 제가 잘 아는 세무사인데 제작환경을 잘 알고 있어서 세금 문제로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예요. 나중에 회사가 커지면 법인 전환에 대해서도 도움을 많이 줄 거구요. 그리고 이것들은 투자사 대표들 개인 연락처와 해외배급을 도와줄 회사 목록이에요. 그리고 이건...”

하나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 없었다.

“감사하긴 한데 이걸 왜...?”

“감독님이 잘 돼야 우리도 일이 많아지죠. 솔직히 드라마만 가지고는 배우들 살기 힘들어요.”

“이 좋은 건물을 올렸으면서도요?”

“호호, 그건 몇몇 톱스타가 돈을 벌어다준 거니까요. 솔직히 우리 회사 배우들 중에서도 일이 없어 노는 애들 많아요. 감독님이 잘 되면 일거리가 더 많아지고 시장이 커지겠죠. 그리고...”

그녀는 또 하나의 파일을 동훈 앞으로 들이밀었다.

“앞에건 서비스, 요건 그냥 참고만 하시라구요. 참고만...”

그녀가 준건 소속 배우 프로필 사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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