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흥행의 신-42화 (42/116)

# 42

흥행감독이 되면?(4)

상당수의 영화제작사들이 모여 있는 충무로가 아닌 동작구의 한 허름한 사무실.

“그럭저럭 쓸만 하네.”

동훈이 사무실 내부를 쓰윽 둘러보며 말하자 유 팀장이 한숨을 팍 쉬며 대답했다.

“에효... 이것도 감독님이 주신 금액보다 5백만 원은 더 에누리해서 겨우 얻은 거예요. 월세도 10만 원이나 깎았구요.”

“월세는 굳이... 이제 우리 돈 많이 벌 거 아닙니까?”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희망찬 이야기를 해보았지만 돌아온 건 퉁명스러운 반응이었다.

“사업자 통장에 돈이라도 많이 넣어 놨으면 제가 왜 월세를 깎았겠어요? 그리고 정말 인테리어 안 해도 되겠어요?”

이전에 쓴 사람들은 조그마한 인터넷 쇼핑몰 사업을 했는지 온갖 박스와 비닐포장지들이 널부러져 돌아다녔었다.

사람을 불러 다 청소하긴 했지만 휑한 벽면과 천장을 보니 씁쓸하긴 했다.

지금은 각종 집기를 든 박스 몇 개가 한 쪽 구석에 잘 쌓아져 있는 상태였다.

“천장이랑 바닥, 벽면만 한다고 해도 평당 백만 원은 달라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냥 책상이랑 전화, 컴퓨터 같은 집기만 넣고 쓰죠. 그것만 마련하는데도 수백은 넘게 깨지는데.”

“그렇게 해요. 톱스타들이 계약하러 와서 조금 놀라기는 하겠지만, 또 그런 맛 아니겠어요?”

그런 맛이 어떤 맛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인테리어는 뭐 그렇게 한다고 치고. 투자사 미팅이 모레라구요?”

“네. 준비는 거의 끝났구요. 양준기 쪽에서 가타부타 확정만 주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음... 캐스팅은 황정훈하고 양준기만 있으면 되는거 맞죠?”

조감독부터 여러 제작과정을 겪어 왔기에 대략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제작사의 대표가 되니 확실하게 집고 넘어가고 싶었다.

그녀는 청소부들이 청소를 잘 했는지 구석구석 살펴보며 대답했다.

“주연만 정해지면 기본은 다 한 거예요. 솔직히 투자자들은 촬영감독이 누가 되고, 조명감독이 누가 되는거 써봤자 보지도 않아요. 그들이 보는 건 딱 세 가지. 감독이 누구인가, 주연배우가 누구인가, 그리고 소재가 좋은가. 그 세 가지만 가지고도 충분히 설득 가능해요.”

“그럼 다행이구요.”

확실히 그녀 같은 경력직원이 없었으면 어쩔 뻔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답이 좀 늦네...”

그녀는 입을 삐쭉이며 핸드폰에 시선을 떼지 못했다.

“솔직히 양준기 정도 탑스타한테 일주일도 안 되는 시간 준 게 더 실수잖아요. 조금만 기다려 봅시다.”

“그럼요. 우리쪽이 심했던 건 알죠. 톱스타는 톱스타 대접을 해주는게 이 바닥 룰인데요. 그런데 이렇게 피치 못하게 요청하면 마지못해서라도 답을 주는것도 맞거든요. 일이 언제나 정해진 순리에 따라 천천히 진행될 때만 있는게 아닌거 다들 아니까요. 그래서 그런 면을 생각했을 때 조금 아쉽다 정도지 그쪽 회사가 나빴다 뭐 그런거 아니에요.”

“그런데 난 왠지 양준기가 거절할 거 같아요. 걔 정도 되는 애가 뭐가 아쉬워서 악역을 하려고 하겠어? 안 그래요?”

유 팀장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맞죠. 그런데 감독님이 두 편이나 연속으로 히트 시켰잖아요. 7백만이 뉘 집 애 이름이야? 그것도 요즘 같은 비시즌에? 그리고 톱배우들은 드라마보다 영화 선호하잖아요. 드라마만 훨씬 잘 돼서 문제였지만. 장 감독님 정도면 한편 정도는 믿고 들어올 수 있죠. 난 가능성 있다고 봐요. 그래서 양준기 측에 제일 먼저 갔다준 거고.”

“솔직히 7백만 그거 윤슬기 빨 아닙니까? 걔네 팬덤에서 n차 관람을 몇 번이나 했는데.”

“물론 그게 도움이 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되죠.”

“15세 관람가가 된 게 크긴 했죠.”

김영웅 감독이 있던 곳에서는 19금 영화여서 흥행력에 제한이 있었는데 어떻게든 15세 이상을 맞추려 노력했던 것이 주효했다.

“흠... 진짜 양준기가 와준다고만 하면 대박인데.”

“아유 대박이죠. 양준기 온다고만 하면 투자는 걱정 안해도 돼요. 이번 작품은 제작비를 많이 잡아도 50억 정도면 충분하니까 일단 투자를 받으면 사업자 이름으로 SUV 차량을 좀 렌트해야겠어요. 이곳저곳 돌아다닐 곳이 천지일 테니까.”

“그거면 되나요?”

아마 사극을 찍는다고 했으면 전국 방방곡곡 산천을 다 누벼야 했을 거지만 그래도 기본 헌팅만 한다고 해도 수백키로 이동은 예사다.

“그것만 가지고 되겠어요? 직원도 더 채용해야 하고, 촬영장비 임대계약 써야지, 명색이 회산데 밖에 간판은 걸어야 하잖아요. 제가 이러니까 투자 받으려고 전전긍긍하는 거죠.”

어디 돈 없이 회사가 굴러가겠는가.

지금껏 벌어놓은 돈으로 위에 말한 것들은 다 확보가 가능하겠지만 그렇게 하고 통장이 텅 비어 버리면 안 되니 투자부터 받아놓으려는 거다.

“화이팅입니다. 필요한 거 있으면 얼마든지 요청하세요.”

“후훗.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인데 아직까지는 제 손으로 할 일밖에 없네요. 구인광고 올렸으니까 투자 받을 때쯤에는 직원들 몇 더 채용할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둘이 희망에 찬 미래를 꿈꾸고 있을 때 유 팀장의 핸드폰이 지이잉 울렸다.

급히 핸드폰을 확인한 그녀는 확 실망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제기랄, 망했다!”

“왜요?”

“양준기가 안 한 대요. 아 진짜 씨...”

울상이 된 그녀는 조그마한 목소리로 욕설을 중얼댔다.

동훈은 그녀의 욕설을 못 들은 척 말했다.

“괜찮아요. 전 어차피 마음을 비우고 있었어요.”

“아니... 딱 봐도 시나리오 보자마자 마음을 정했을건데 이제 와서 얘기해주냐 이거죠. 아, 짜증나네.”

“아까 우리가 너무 했다고 한 거 잊은거 아니죠?”

“아니 뭐, 사람은 언제나 자기 중심적이잖아요. 후... 어쩔 수 없죠.”

그녀는 바로 전화를 들어 어디론가로 걸었다.

“아, 네. 안녕하세요. DH미디어 제작 프로듀서 유지은 팀장이에요. 네, 예전에 영화 세상 기억나세요? 하하하, 네. 맞아요. 둥지를 옮겼답니다. 네. 다름 아니라 제가 며칠 전에 시나리오 하나 보내드렸는데 혹시 받으셨는지 해서요. 일주일 가까이 됐는데 말씀이 없어셔서... 네. 장동훈 감독님이 쓰신 거예요. 네. 이번에 ‘새로운 세계’로 7백만 관객 돌파한 그 장동훈 감독님이요. 아하하! 역시 메일로 간 거 모르셨구나. 괜찮아요. 그럴 수 있죠. 네. 그럼 꼭 보고 바로 확인 부탁드릴게요. 네.”

전화를 끊은 유 팀장에게 동훈이 물었다.

“일주일 전에 시나리오 보내놨으면서 왜 미리 연락 안 했어요?”

“양준기 데리고 있는 최영준 대표 성격이 좀 못됐거든요. 그래서 남한테 먼저 준 시나리오 그 다음 차례로 받으면 보지도 않고 던져버려요.”

“그래요?”

경험이 없지 않은 동훈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양준기한테는 항상 시나리오를 가장 먼저 주고 그 다음에 몇 시간 차이라도 두고 다른 소속사에 돌리거든요. 그래서 이번에도 양준기한테 먼저 준 거예요. 양준기가 해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그런데 방금 전화한 데는 어딘데요?”

“에이플러스 엔터테인먼트라고 주혁 아시죠?”

대한민국에서 주혁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현재 최고의 한류스타 중 하나인 그는 양준기 못지 않은 몸값을 자랑하고 있었다.

“당연히 알죠. 모르면 간첩이지. 그런데 주혁한테 보내놓고 말을 안 한 거예요? 와... 간도 크다.”

“이렇게 해야 양준기가 오케이 하고 나서 나중에 주혁 측이 섭섭하네 어쩌네 할 때 ‘우린 시나리오 보냈는데?’ 이렇게 나갈 수 있거든요.”

“만약 무시하지 않고 시나리오 봤으면 어쩌려구요?”

“말했잖아요. 한 시간 늦게 보냈다고. 양준기보다 미리 답해줬으면 땡큐죠. 주혁인데... 혹시 양준기가 뒤늦게 뒤통수를 맞았네 어쩌네 할수도 없는 거죠.”

논리에 빈틈이 없다.

“와. 유 팀장님 이제 보니까 무서운 사람이네.”

“아하하! 그렇게 보여요? 아니에요. 이거 제작 프로듀서 사이에서는 그냥 투자를 받기 위한 캐스팅 스킬 중에 하나에요. 제작 피디가 남들 비위 맞춰주면서 일하기 시작하면 일은 일대로 힘들고 스트레스는 스트레스대로 받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융통성을 발휘하는 거죠. 어쨌거나 이제 한 시간만 기다려볼까요?”

그녀는 집기들을 정리한 박스 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으며 시간을 체크했다.

“한 시간이면 될까요?”

“솔직히 10분이면 충분한데 그쪽 체면이랑 우리 체면 생각해서 그 정도에 전화하는 거예요. 우리가 시간 여유만 있으면 절대 먼저 연락 안 할거란 말이에요.”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냐 생각했지만 그녀의 일처리 스타일이 그런 것이니 이해하기로 했다.

“그러지 말고 간식이라도 먹죠. 떡볶이 좋아해요?”

“콜!”

“그런데 한 시간 뒤에 뭐라고 하려구요? 한 시간 뒤에 결정하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아까 들어보니까 감독님이 시나리오 돌린다는 말도 처음 듣는 것 같던데요? 감사하게도 최 대표가 여기서 입을 다물어 주네. 그래서 양준기한테 방금 시나리오 보냈다고 하려구요.”

“아... 믿을까요?”

“못 믿으면 어쩌겠어요? 최 대표한테 전화라도 하겠어요? 이 바닥은 궁금하면 지는 거예요.”

*

에이플러스 엔터테인먼트 주혁팀.

팀장이자 주혁의 총괄매니저인 정혜주 팀장은 입술을 씹으며 고민에 빠졌다.

“읽어 봤대?”

그녀의 맞은편에 앉은 이는 스케줄매니저이자 로드매니저인 김해요로 별칭 해용이라고 불리고 있다.

“잘 모르겠는데요?”

“다시 전화해봐.”

“방금 안 받았는데요?”

“그럼 다시 해봐!”

정혜주 팀장의 고함소리에 해용이 벌떡 일어나 핸드폰을 들고 나갔다.

몇 번의 신호음이 들린 후, 드디어 주혁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렸다.

목소리조차 너무 멋져서 남자인 해용이 봐도 여자들의 마음이 이해가 될 정도였지만 지금은 그런건 생각나지 않았다.

“해용 씨, 나 시나리오 볼때는 연락하지 말아 달라고 했잖아요. 집중이 깨져요.”

“아 죄송합니다. 다름 아니라 방금 혜주 팀장님이 전화를 받았는데요.”

“그런데요?”

“그 시나리오가 양준기한테도 갔다고...”

수화기 너머에서 잠시 말이 끊겼다.

“여보세요? 형님?”

“아니에요. 잠시 생각 좀 했어요. 그래서 정 팀장님이 원하는게 어떤 거래요?”

해용이는 주혁이 차라리 반말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대답했다.

“아무래도 답변을 빨리 해줘야 할 것 같다고 하시는데요.”

“음... 작품을 선택한다는게 그렇게 막... 아무렇게나 결정할 수는 없는 거예요. 내가 캐릭터를 얼마나 잘 표현...”

주혁의 일장연설이 시작되려는 순간 언제 다가왔는지 정혜주 팀장이 전화기를 홱 낚아챘다.

“잡소리 그만하고 할 거야? 말 거야?”

“지금 결정해야 해?”

“상황이 웃기긴 한데 저쪽에서 이틀 뒤에 투자사랑 미팅 있다는 거야. 제작기획서에 배우 이름만 공란으로 남겨놨대. 그 칸에 너랑 양준기 둘 중에 하나 넣겠다는데 어쩔 거야? 줘? 말어?”

“미친 거야? 시나리오를 오늘 줘 놓고?”

“사실 일주일 전에 온 거였어. 우리 직원이 처음 보는 회사라 그냥 넘긴 것 같아.”

“아니, 넘길게 따로 있지...”

“너 하루에 시나리오가 몇 개나 들어오는지 아니? 후... 됐고, 그 직원 구워 먹든 삶아 먹든 내가 조져놓을 테니까 일단 넌 선택을 해. 어떻게 할 거야.”

잠시 시간이 흐른 후 주혁의 대답이 들려왔다.

“봤는데... 캐릭터가 예쁘게 빠지긴 했더라.”

그 말을 기다렸는지 정혜주 팀장은 대답도 안하고 핸드폰을 다시 해용에게 던지듯 건네곤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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