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흥행의 신-40화 (40/116)

# 40

흥행감독이 되면?(2)

요 며칠간 고민이 이어졌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황대철 상무의 제안이 너무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잘 몰랐는데 회사를 차리려고 보니 신경 써야 할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경력직 직원을 채용하는 것부터 배급사와 투자사와의 끈을 새로 만들어야 했으며 사무실 임대료와 인테리어 비용에 각종 세금까지...

이런 골머리를 썩힐 일 없이 모든 기반이 갖춰진 회사에 대표로 앉게 해주며 지분의 30% 가까운 스톡옵션까지 제안했으니 고민이 안 될래야 안 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역시나 오늘도 명진이와 대낮부터 막걸리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감독님, 손익분기점 넘었는데 제작사에서 아무 말 없습니까?”

“이제 넘긴 거야. 지금부터가 시작이니...”

“후... 남들은 영화가 대박 나서 좋겠다니, 돈은 많이 벌었냐니 물어보는데 할말이 없네요. 이러니 에로영화나 상업영화나 다를게 없어.”

그나마 감독은 쥐꼬리 만큼이긴 하지만 러닝 게런티라도 있다.

그 아래로 내려가면 그 쥐꼬리 만큼의 러닝 게런티도 없고 보너스 역시 제작사 마음대로인지라 주면 그저 감사할 뿐이다.

감독의 입장에선 아래 스태프에게 뭘 챙겨주고 싶어도 챙겨줄게 없어서 답답한 마음이다.

“그래서 고민 중 아니냐. 그냥 들어가?”

“에이... 감독님을 팍팍 밀어준다고는 하지만 막상 들어가면 이것저것 참견하지 않겠어요?”

“그건 그렇지. 그래서 내가 고민중이고.”

고깃집에서 들을 때야 좋았지만, 막상 계약하고나면 다른 말을 할까봐 쉽사리 제안을 승낙할 수 없었다.

“제가 감독님이 아니라서 그냥 사무실을 차리라는 말을 못하겠네요. 솔직히 제가 감독님이면 그냥 ‘영화나 잘 만들자’라고 생각할텐데 말이죠. 황정훈 씨도 다른 스케줄 안 잡고 있다고 하는데 회사 차리느라 제작이 늦어지면 괜히 민폐일 것 같기도 하고...”

명진이의 말이 다 맞았다.

영화감독이 영화나 잘 만들면 되긴 하는데 괜히 이것저것 머리만 굴리는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긴 했다.

황정훈도 차기작 주연을 그로 하고 싶다고 하니 다른 시나리오는 아예 쳐다보지도 않겠다고 선언하며 마냥 기다리고 있는 상태였다.

“내가 빨리 결정 내려볼게.”

말은 그렇게 해도 아직 마음의 결정을 못 내리는데 갑자기 유지은 팀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그날(?) 이후 유 팀장을 비롯해 영화 세상 직원들은 거의 연락을 하지 않았었다.

이미 다 만들어놓은 영화였고 이제 결과만 지켜보는 상황이었기에 연락할 필요도 없긴 했다.

그러다 요 며칠 전 직원에게 손익분기점을 넘었으며 앞으로 들어올 수익의 0.5%를 정산해줄 예정이라는 내용을 톡으로 받은게 전부였다.

그렇기에 유 팀장의 연락은 의외였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감독님. 저 유지은이에요.”

“그럼요, 알고 있죠. 그런데 어떤 일로 전화를 다...”

“어머, 우리 너무 멀어진 거 아니에요? 제가 꼭 용건이 있어야 전화를 드렸나?”

“하하, 그런 아니지만... 아시면서.”

“쫌 그렇긴 했었죠? 다름 아니라 드릴 말씀이 있는데 전화로 하긴 조금 그래요. 직접 뵙고 말씀드리고 싶은데 괜찮으시겠어요?”

굳이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요. 그럼 언제 뵐까요?”

“혹시 지금 술 드시는 중이세요?”

순간 뜨끔했다.

잘못한 건 아니지만 왠지 맨날 대낮부터 술이나 먹고 다니는 놈이 된 것만 같다고 할까?

“크흠... 어떻게 아셨어요?”

“하하하, 왠지 그럴 것 같았어요. 평소 다니는 막걸리집이죠? 지금 그리로 갈게요. 30분 이내면 도착할 것 같으니까 거기 딱 기다리고 계세요.”

“네. 저도 시작한지 얼마 안 됐으니까 천천히 오세요.”

전화를 끊으니 명진이 물어본다.

“누구에요?”

“유지은 팀장. 이리로 온다네?”

“어? 뭐지? 박만구 대표가 사과하려는건가?”

“야, 그러면 본인이 오겠지. 유지은 팀장을 왜 보내겠냐?”

“말투가 어땠는데요? 무슨 일로 온다는데요?”

“그냥 평상시 느낌 그대로던데? 그리고 만나서 얘기하고 싶대. 그래서 무슨 일로 오는지는 모르겠다.”

“에이... 궁금하게... 아, 그리고 황정훈 씨한테 시나리오 준 이후에 말이 도나 봐요. 자꾸 나한테 연락이 오네.”

이번 영화는 영화세상과 작업하는 작품이 아니기에 조감독인 명진이에게 연락이 가는 거다.

“얼마나 퍼졌는데?”

“일단 ‘WAS엔터’랑 ‘미리내 매니지먼트’에서 오긴 했는데 그 두 군데가 알았으면 다른데도 곧 알게 되지 않겠어요?”

“시나리오도 안 줬잖아?”

“당연히 안 줬죠. 황정훈 씨가 함부로 돌릴 사람은 아니잖아요.”

“그럼 냅둬. 아직 계획 안 잡혔다고만 해.”

“알겠습니다. 그리고 주연인 황정훈 씨는 정했다고 해도 악역이 중요하잖아요. 그 재벌집 재수없는 아들. 누구로 할 생각이에요?”

딱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이곳에서 그는 배우를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딱 떠오르는 사람이 없네. 황정훈 씨가 이번에 떠오르는 연기파 배우이긴 하지만 스타파워가 부족하니까 악역은 이현재 급으로 올려야 할 것 같은데?”

“흠... 알겠어요. 일단 제가 한 번 추려 볼게요.”

그렇게 다음 작품의 캐스팅에 대해 의논하기를 한참여... 유 팀장이 급하게 걸어왔는지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가게에 들어섰다.

“기다리셨죠, 감독님.”

“어차피 술 마시는 중인데요. 숨 좀 고르시고 앉으세요. 파전이라도 하나 더 시켜드릴까요?”

“하하, 여기 파전 죽이잖아요. 당연히 좋죠.”

해물파전을 하나 시키고 나니 그녀가 노란 파일봉투를 하나 꺼내서 건네주었다.

“이게 뭡니까? 불안하게...”

“왜 불안해요?”

“아니 뭐...”

뒷말은 굳이 하지 않아도 알아들었는지 그녀가 피식 웃었다.

“감독님이 생각하시는 그런 거 아니거든요? 어서 열어보기나 하세요. 내가 그거 작성하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는데요.”

“뭘 작성해요?”

뭔 소린지 궁금해하면서 봉투를 열어보니 놀랍게도 제목에 「악질형사(가제) 제작기획서」라고 쓰여 있었다.

혹시나 해서 찬찬히 살펴보니 역시나 그녀가 준비한 건 전에 술자리에서 한번 본 시나리오를 가지고 투자자에게 돌릴 제작기획서를 만들어 온 것이었다.

“이게 뭡니까?”

“뭐긴 뭐에요? 제작기획서지.”

“이걸 왜...?”

영화 세상과는 그날(?) 서로 깔끔하게 갈라선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왜 그녀가 이걸 만들어 왔단 말인지 이해가 안갔다.

유 팀장은 앞에 놓인 막걸리 한 사발을 쭈욱 들이키고는 입을 열었다.

“크으... 좋다. 제가 이 바닥에 들어온지 벌써 15년이거든요. 아들내미 하나, 딸내미 하나 이렇게 둘 키우는 워킹맘인데 항상 애들한테 미안했어요. 엄마가 하고 싶은일 한다고 제대로 돌봐주질 못했으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집도 못 들어가고 죽을 고생 해가면서 버는 돈이 한 달에 180이에요. 180. 그런데 이것도 회사가 어려워지면 한 두달 밀리곤 했죠.”

그녀는 목이 마른지 본인이 스스로 막걸리를 잔에 따르곤 한 모금 더 마신 후 재차 말을 이었다.

“전에 우리 회사가 휘청일 때 장 감독님이 ‘6급 공무원’으로 살려주셨죠. 그걸로 회사가 갚아야 할 원금, 이자 갚고 힘든 거 어느 정도 정리되고 나니까 제일 먼저 뭐가 바뀌었는지 아세요?”

“뭔데요?”

“대표님실에 안마의자가 들어 왔더라구요.”

“아...”

“어이가 없어서 정말... 그래, 내가 거기까지는 이해를 했어요. 나이도 드셨고 하니까 온몸이 쑤시겠지. 저러다 가끔 직원들도 쓸 수 있겠지. 그런 마음으로 쿨하게 넘어 갔어요. 지금까지 마음고생 하셨으니까 안마의자라도 잘 쓰셔라. 내가 그런 마음이었는데... 이번에 ‘새로운 세계’가 손익분기점을 넘으니까 어느 매장을 들렀다 오셨는지 외제차 카탈로그를 보시더라구요.”

“하하...”

웃긴 이야기는 아닌데 듣다 보니까 웃음이 나왔다.

“웃기죠? 이번에 손익분기점을 넘어서 직원들 다들 좋아하고 난리 났는데 보너스 얘기는 입 밖으로 한 번을 안 꺼내. 그러다 내가 물어봤어요. 이번에 작품 성공했는데 직원들 보너스 없냐고. 그러니까 대표님이 화들짝 놀라면서 잠시 대답을 못하다가 큰 마음 잡수시고 꺼낸 말이 50%였어요. 그것도 6백만 돌파 하면... 나 6백만 돌파하면 90만 원 받게 생겼어요. 완전 좋겠죠?”

유 팀장은 웃고 있었지만, 그녀가 진짜 웃겨서 웃는게 아님은 당연했다.

“안타깝긴 하네요.”

“와... 근데 감독님이 우리 대표님 앞에서 하는 소리 듣고 내가 망치로 머리 한 대 맞는 것 같았다니까요.”

“그럼 이건...?”

“회사 세우신다면서요? 감독님 솔직히 제작 프로덕션에 관해서 아는거 많지 않잖아요. 제작사에서 준비해야 하는게 한 두가지가 아닌거 아시죠? 그런데 감독님이 홍보사를 아세요? PPL 대행사를 아세요? 디자인, 포스터, 홈페이지, 보조출연, 스토리보드, 해외코디네이터, 촬영장비, 조명크레인, 거기다 수중 촬영하면 특수촬영팀, 특수효과팀, 사운드 믹싱에 동물연기 필요하면 동물연기 하는 분, 야외 촬영에 발전차 필요하죠? 이거 뿐인가요? 특수분장에 소품차에 스낵카도 필요해요. 그리고 보험회사에다 보험도 들어야 하구요.”

“그, 그렇죠.”

“이거 말고도 할 일이 수십, 수백가지인데 감독님이 다 신경 쓰실 수 없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도와드릴게요.”

순간 뭐라고 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잘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고 오겠다는데 좋아할수도 없고 안 된다고 할 수도 없으니 말이다.

대답을 못하고 있으니 그녀가 재차 말했다.

“회사 혼자 세우면 그거 세우다가 감독님 원하는 작품 제대로 찍지도 못하고 돈이랑 시간만 보내요. 저 채용하세요. 그럼 감독님 진짜 인재 얻으신 거예요.”

“인재는 확실한 것 같은데...”

주저하고 있으니 명진이 툭 내뱉었다.

“그러지 말고 유 팀장님이랑 같이 해요. 남 좋은 일 시키지 말고 감독님이 만들어서 완전히 새로운 판을 깔자구요.”

다른 말이었으면 모르겠지만 남 좋은 일 시키지 말라는 말이 귀에 딱 꽂혔다.

“후... 그래, 그러자.”

동훈의 대답을 기다렸는지 유 팀장이 단번에 상을 탕 치면서 말했다.

“좋아요! 그럼 전 이거 가지고 투자자들 만나볼건데 사업자는 나오셨어요? 감독님 이름값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어느 회사인지는 찍혀 있어야 말이 오가죠.”

“사무실을 아직 임대 못해서 사업자는 신청 안 했어요.”

“그럼 임대비용이랑 인테리어 비용 어느 정도나 생각하는데요? 같이 사무실 둘러보고 빨리 계약해요. 일단 임대계약하고 바로 사업자 등록하자구요. 그럼 투자 받을 수 있어요.”

“그래요. 그럼 근로계약서는...?”

“그것도 사업자 난 다음에 써야죠. 아, 저 월급 250은 받을게요. 그리고 흥행수익대비 러닝게런티 조금이라도 받고 싶어요. 어때요?”

살짝 긴장하며 물어보는데 혹시나 동훈이 안 된다고 할까봐 그러는 것 같았다.

“좋네요. 그렇게 해요.”

“후후... 그럴 줄 알았어요. 제 월급 때문이라도 얼른 투자 받아야겠네요. 오늘은 술 드셨으니까 내일부터 사무실 구해요.”

그렇게 그녀는 한동안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자신이 미리 생각해놨던 바를 한참 브리핑 한 후 떠났다.

명진은 그녀가 가자 휘파람을 부르며 찬탄을 금치 못했다.

“휘유... 실력있는 분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프로다운 분일지는 몰랐는데요?”

“한 번 본 시나리오가지고 제작기획서를 다 만들어오네... 대단하긴 하다.”

“그런데 캐스팅도 안 됐는데 어떻게 제작기획서를 만들어오셨지?”

명진이는 아까 동훈이 꺼냈던 제작기획서를 못 본 상태였다.

“그게... 그냥 막 때려 넣으셨던데?”

“네?”

“톱스타가 있긴 하더라고. 우리가 누굴 써야 할지 고민했던 그 악역에...”

“누군데요?”

“양준기.”

당대 최고의 스타 중 하나로 중국에서 엄청 인기가 있는 배우였다.

“헐... 캐스팅 가능 한 거예요?”

“자신이 있었겠지. 그런데 안 한다고 하면 어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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