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흥행의 신-38화 (38/116)

# 38

두 번째 작품(6)

시작은 호기롭게 시작했다.

“사극은 애니메이션이 대세인 와중에도 꾸준히 관객을 불러들였습니다. 스크린 확보만 성공한다면 절대 망하지 않아요.”

배급사에서는 유병세 감독의 주장에 우려를 표했지만 제작사인 LS엔터의 강력한 요청으로 어쩔 수 없이 온 힘을 다해 스크린을 천개를 넘게 확보했다.

지금까지 극장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만들어 왔기에 억지로 확보하긴 했는데 배급사에는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저도 그러길 바래요. 안 그러면 저도 이번에 시말서를 피할 수 없거든요.”

명패에 최효선 부장이라고 쓰여 있는 그녀는 전에도 그랬지만 오늘도 어딘가 피곤해 보이는 표정으로 유병세 감독을 상대하고 있었다.

“잘하신 선택입니다. 조조로 영화를 본 관객들 평이 좋아서 예매율 계속 올라갈겁니다.”

최효선 부장은 인터넷에 올라있는 감상평 가장 상단에 노출된 것들이 자신의 직원들이 쓴 거라고 말하려 했지만 그만두었다.

유병세 감독이 그걸 모를리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알면서도 저렇게 말하는건 그만큼 그가 쫓겼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물론 최효선 부장도 모든 감상평이 다 직원들이 쓴 게 아니라는 것도 안다.

그렇기에 그녀도 조금 기대를 하고 있었다.

대박까지는 아니더라도 멜티플렉스 극장주들이 이해하고 넘어갈 만큼 관객수가 서서히 떨어진다면 회사 입장에서는 큰 손해없이 끝날 일이기 때문이다.

영화에 투자하지 않았기에 솔직히 영화가 폭망하더라도 큰 손해는 아니어서 유병세 감독이나 그가 데리고 온 제작사 직원들만큼 속칭 후달리는 건 아니었다.

물론 이건 전적으로 손해를 줄이기 위한 계산법이고 영화가 대박이 난다면 당연히 배급사도 상당한 수익을 올릴 수 있다.

“유병세 감독님이 지금까지 타율이 좋았으니까 이번에도 괜찮을거라 믿고 있어요.”

말과는 달리 그녀가 봤을 때 지금은 대박을 낼 수 있다는 기대로 스크린 수를 늘릴게 아니라 최대한 보수적으로 접근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윗선에서 ‘까며면 까’라고 하니 어쩔 수가 있나.

한 가지 위안이 있다면 유병세 감독에게 말했던 대로 영화가 잘 안 되면 시말서를 써야 한다는 말은 거짓이라는 점?

그래, 그거 하나 밖에 없다.

“새로운 세계는 오늘까지 어느 정도나 들었습니까?”

“감독님 뉴스 안 보시나 봐요? 그래도 우리랑 정면승부하는 영환데 좀 보시지.”

“제가 좀 바빠서요.”

“그랬구나...”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유병세 감독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초조하고 조급한 눈빛.

그녀는 아마 자신보다 유 감독이 새로운 세계의 관객수를 더 잘 알고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오늘 2백만 넘었어요. 예매율이 떨어지지 않고 더 올라가는 추세라서 관객수는 계속 늘어날 예정이었어요. 만약 우리 영화가 개봉하지 않았다면 말이죠.”

“흐흐... 부장님도 인정하시네요. 아마 오늘 이후로 예매율은 천천히 내려갈겁니다. 그렇게 되야죠.”

마치 스스로에게 다짐을 거는 것 같았다.

“무대인사는 언제 가세요?”

“이제 10분 뒤에 출발할 생각입니다.”

“그럼 잘하시길 바랄게요. 부탁할 일 있으면 연락 주시구요.”

유병세 감독은 회의실을 나와 제작사 직원들과 함께 강남 삼성동으로 향했다.

오늘 그곳에서 개봉 후 처음으로 무대에서 관객들과 인사하는 이벤트를 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 몇 손가락에 꼽힐 만큼 인지도도 높고 관객들도 많이 모이는 곳이라 외모도 최대한 깔끔하게 꾸몄다.

“오셨어요?”

현장에 도착하니 수많은 제작진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유병세 감독은 스태프가 묻는 말에 대답하는둥 마는둥하고 곧장 단상으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어서오세요, 감독님.”

“오셨습니까.”

유병세 감독이 도착하자 배우들을 비롯한 연출부 직원들이 앞다투어 인사를 한다.

제 아무리 톱스타라고 해도 연출한 감독에게 예의를 표하는 걸 몇 번 경험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어깨에 뽕이 들어가곤 한다.

특히 흥행을 몇 번 해보면 누구누구는 다 아는 동생이 되고 어느 여배우는 전화 한 통화만 하면 불러올 수 있다는 술자리의 안주가 되기 십상이었다.

“어, 그래그래, 수고많다. 혜원 씨도 왔고, 이광주 씨 왔어? 정혁 씨는?”

“지금 주차장 들어왔다고 합니다.”

“입장 언제 시작이야?”

“15분 뒤에 들어올 겁니다.”

“빨리빨리 좀 오라고 그래. 이제 주차장이면 아직 도로 위에 있다는 말이잖아! 일 똑바로 안 해!”

“죄송합니다. 다시 재촉하겠습니다.”

유병세 감독의 호통에 조감독은 허겁지겁 다시 전화를 걸었다.

물론 다시 전화를 건다고 해도 배우가 더 빨리 올 확률은 낮다는 걸 유 감독도 알고 저 나이 어린 조감독도 안다.

그런데 알면서도 그러는건 그냥 습관처럼 나오는 행동이었다.

“지금 매니저랑 뛰어오는 중이랍니다. 이미 실내에 들어왔대요.”

그래도 재촉한게 조금은 효과가 있었나 보다.

“관객들 입장합니다!”

이제 드디어 처음으로 관객들과 마주하는 시간이라 유병세 감독은 조금씩 긴장되는 걸 느꼈다.

아무리 몇 개의 영화를 흥행시켰던 흥행감독이라고는 해도 매번 처음 관객들과 만나는 무대인사는 긴장되기 마련이었다.

사실 무대인사를 할 때마다 기자들과의 문답처럼 심도 있는 질문이 오가거나 하는 건 아니다.

관객들 중에 간혹 감독에게 깊이 있는 질문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배우에게 관심을 가지고 질문조차 없이 그저 인사만 하고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 가벼운 대면조차도 괜히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잠시 후, 관객들이 입장하고 아주 간단한 인사가 시작되었다.

별다를 것도 없었다.

배우가 영화 잘 봐달라고 하면 관객들은 경쟁하듯 주연배우에게 ‘보고 싶었어요’, ‘잘 생겼어요’를 외쳤고 조금 심하면 ‘사랑해요’, ‘날 가져요’ 정도였다.

그런데 이때 단상 가까이에 있는 남자애 한 명이 아이돌 출신이자 최고의 인기배우인 이시은에게 농담하듯 말을 던졌다.

“누나 섹시해요! 헤헤헤...”

그 남자애가 짧은 치마를 입은 이시은의 다리를 유독 뚫어지게 쳐다 본 건 맞지만, 행사의 중요도를 생각한다면 여기까지는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였다.

그런데 거기서 이시은의 매니저가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그 남자애에게 다가가 조용히 경고했다.

“너 성희롱 하는 거야. 하지마. 알겠어?”

나름 행사에 방해가 되지 않으려 조심하는티가 역력했지만 그래도 방해가 안 되는건 아니었다.

유병세 감독은 섹시하다 정도까지는 말할 수 있는거 아닌가 속으로 생각하면서도 일단 그 매니저에게 다가가 말렸다.

“매니저님 그만하세요. 그럴수도...”

“아니 우리 시은이가 이런 쪽으로 예민해서...”

막 매니저를 진정시키는데 화가난 남자아이가 버럭 목소리를 높이며 욕설을 내뱉었다.

“매니저 주제에 오버하고 지랄이야.”

이렇게 되니 매니저도 열이 받았는지 그 남자애에게 다가가 인상을 긁으며 말했다.

“뭐, 인마! 이 오타쿠 같은 새끼가... 넌 가서 만화나 처 봐.”

여기까지 오니 관계자들이 일제히 달려나와 매니저와 그 남자아이를 말리며 진정시켰지만 일은 벌어진 후였다.

“씨발... 망했다.”

유병세 감독은 얼굴을 들지 못하는 이시은을 뒤로하고 단상을 내려왔다.

*

같은 시간.

“감독님 이 기사 보셨어요?”

명진이 핸드폰을 앞으로 들이민다.

“뭔데?”

뭔가해서 보니 황정훈의 인생 풀스토리를 담은 기사였다.

지금껏 연극계에서 있으면서 수많은 작품으로 연기공력을 쌓아왔지만 모든 연극계가 그렇듯 연봉 천만원 수준의 수입으로 가정을 꾸려오느라 힘들었던 사정이 그려져 있었다.

그런데 이번 작품으로 영화계에 연기파 배우로 눈도장을 찍으면서 일약 충무로의 주목할만한 신인으로 떠올랐다.

사실 나이가 서른을 훌쩍 넘어 신인이라고 하기엔 조금 그랬지만 어쨌거나 첫 영화였으니 신인은 신인이다.

“좋은 기사네. 잘 돼서 다행이야.”

“감독님이 캐스팅을 잘 하신거죠. 저도 처음에 촬영장에서 황정훈 씨 처음 봤을 때, 왜 저런 신인배우를 이현재씨랑 붙는 주연급 조연에 넣으셨는지 이해가 안 됐는데 연기하는거 보고 바로 인정했습니다. 와... 연기가 막 살아있어. 진짜 중국인 깡패야.”

“그럼 이제 캐스팅 제의가 막 들어오겠는데?”

“그렇겠죠? 그런데 아직 소속사도 없잖아요? 황정훈 씨.”

생각해보니 얼마전 회식자리에서까지도 소속사를 구했다는 말을 듣지 못했었다.

“그런거 같긴 해. 그런데 생각이 깊은신 거지. 지금 매니지먼트사에서 계속 계약하자고 접촉할 것 같은데 일찍 해봤자 좋을 거 없잖아. 다음 작품 계약이 조금 늦어질 순 있겠지만 그거야 큰 손해는 아니겠지.”

명진이 머리를 쓱 앞으로 내민다.

“그럼 우리가 먼저 제의해보면 어떨까요?”

“벌써? 야, 나 아직 회사에 간판도 안 걸었어.”

간판도 안 건 수준이 아니라 방금전까지 사무실를 구하러 부동산 업자와 충무로 일대를 돌아다녔었다.

“알아요. 직원 구하고 뭐하고 하려면 최소 석 달은 걸리겠죠.”

“석 달 이상 걸릴 걸?”

“어쨌든 그 전에 감독님이랑 저랑 프리 프로덕션을 겸해서 이것저것 준비하자는 거죠.”

“말은 쉽다. 일단 황정훈 씨 잡아두려면 손가락 빨고 있게 할 수는 없으니까 계약금이라도 드려야 하잖아. 그 돈 어디서 가지고 오게? 제작 프로듀서가 기획서라도 작성 해야 그걸 들고 투자자한테 돈이라도 받아 오지.”

“공고 냈으니까 기다려봐요. 요즘 제작 프로듀서 구하는 사람들 꽤 되는거 알잖아요. 조건이 좋으니까 금방 올거예요. 그러니까 일단 황정훈 씨부터 잡아 보자구요. 그러다 다른 제작사에서 채가면 어쩌려구요?”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그렇게 느긋하게 기다릴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기가 급상중이기에 당장 오늘 차기작을 계약한다고 해도 그리 놀랄 일만은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그래볼까?”

“그래요. 일단 내가 황정훈 씨한테 문자 하나 넣을게요.”

명진이 핸드폰을 조물락거리는 사이 동훈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제 목소리 기억하시죠?”

어디서 들어봤나 했는데 바로 WAS엔터의 고은숙 대표 목소리다.

“아, 그럼요. 고 대표님이시잖아요. 어쩐일로 전화를...”

“다름 아니라... 혹시 시간 한 번 내주실 수 있을까요?”

“뭐 때문에 그러시는지...”

“이번에 슬기가 감독님한테 너무 감사했다고 하고, 감독님한테 감사의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해서 식사나 같이 하려구요.”

“아닙니다. 괜찮아요.”

귀찮아서 거부하려는데 고 대표의 음성이 너무 간절하다.

“그러지 마시고 시간 한 번만 내주세요. 우리 슬기가 너무 고맙다고 하는데 매정하게 딱 끊지 마시고... 네? 제가 맛있는 고깃집으로 자리 잡아 놓을게요.”

만나는건 귀찮았지만 영화를 대박 내놓고도 명진이와 막걸리나 마셔야 하는 상황에 고기를 사준다고 하니 거절할 수 없었다.

“뭐, 그래요. 그럼... 그런데 고기만 얻어먹고 불편하게 마무리 하기 싫어서 그러니까 혹시 제안하고 싶은 내용이 있으면 먼저 말해줄래요?”

박만구 대표와 싸운뒤 이제는 누구와 척을 지고 싶지 않아 미리 선을 그었다.

마주앉은 자리에서 거부하는게 곤혹스럽기 때문이었다.

고 대표는 잠시 말이 없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그럼 편하게 말할게요. 우리 슬기가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다는건 진심이에요. 그런데 거기에 내 용건 하나만 더 보태려구요. 영화 세상이랑 헤어졌다고 들었어요. 대략 어떤 내용이 오갔는지 내용도 들었고...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면 우리 제작사 한번 맡아 보실래요? 회사 새로 차리는거 보통 일 아니에요. 내가 원하는대로 다 밀어드릴게.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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