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흥행의 신-37화 (37/116)

# 37

두 번째 작품(5)

일주일만에 150만 관객을 돌파했다.

개봉관의 숫자는 늘어만 가 일주일만에 처음 확보했던 스크린에 두배나 넘게 확보해 나갔다.

“축하합니다!”

“장동훈 감독! 자네가 날 살렸어. 자네는 나한테 예수님이고 부처님이다.”

박만구 대표는 동훈을 덥썩 안으며 춤을 췄다.

그럴 수밖에...

솔직히 뉴스 조금만 봐도 제작비 백억 정도는 헐리우드 영화에 비해 껌값에 불과해 보인다.

그깟 백억이라고는 하지만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

제작사 입장에서 이 영화가 망하면 ‘영화세상’의 신뢰도는 땅바닥에 떨어질 것이고 박만구 대표는 다시 백억짜리 영화는 꿈도 꾸지 말아야 할 게 분명했다.

규모가 큰 제작사라면 대형 프로젝트 한 두 개 망한다고 해도 금방 일어설 수 있겠지만 중소형 제작사는 이런 큰 프로젝트가 망해버리면 최소 몇 년간 중소형 영화만 찍을 수밖에 없었다.

“제가 뭘 대표님을 살립니까? 잘 도와주셔서 저야 말로 감사하죠.”

빈말이 아니라 신인감독이 하고자 하는 바를 아무런 간섭없이 끝까지 밀어주고 신뢰해준 것 만으로도 박만구 대표는 충분히 감사를 받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아니야, 아니야. 내가 작년 초에 점쟁이를 우연히 만나게 됐는데 귀인이 나타날 거라고 하는 거야. 그때는 그냥 개소린가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장동훈 감독이 귀인이었던 거지. 이게 이렇게 딱! 맞아 떨어질 수 있나 그래? 야, 지은아. 내 말이 맞냐? 안 맞냐?”

“맞죠, 그럼요.”

“야, 오 상무야. 내 말이 맞지?”

“맞습니다.”

아주 죽이 착착 맞는 걸 보니 역시 한 회사 직원들 다웠다.

“아직 그래도 손익분기점은 한참 남지 않았어요?”

박 대표는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으응... 아니야. 전에 해외 선판매 됐잖아? 그래서 원래 손익분기점이 5백만 가까이 됐는데 해외 선판매 때문에 4백만만 넘어도 손익분기점을 훨씬 넘어. 지금 150만 돌파했고 예매율이랑 스크린 확보는 계속 되고 있으니까 아마 다음 주말쯤에는 손익분기점을 넘지 않을까 싶은데?”

“에이... 그건 너무 빠른데?”

동훈이 너무 낙관적으로 본다는 말에 유지은 팀장이 나섰다.

“윤슬기 때문에 단체관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사실 연기력이 너무 안 좋을까봐 걱정했는데... 물론 우리 대표님은 절대 걱정 안 했구요.”

“난 무조건 찬성했지. 난 아이돌 출연 적극 찬성이었어. 제작사 대표치고 아이돌 싫어하는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그래!”

유 팀장이 맞장구를 친다.

“그럼요. 뭘 모르니까 아이돌 나오면 싫다고 하는데 아이돌 없이 어떻게 중소 제작사가 영화나 드라마 만들겠어요. 아이돌이 나와줘야 광고가 붙으니 할 수 없이 하는 거죠. 어쨌든 윤슬기 때문에 단체관람이 계속 이어져서 스크린 확보를 못해 애먹는 수준이에요. 영화관에서도 놀라서 애니메이션 점차적으로 줄이는 추세구요. 사실 우리 대표님께서 조금 오버하신 경향이 있긴 한데 아마 다다음주에는 손익분기점 가볍게 넘을 거라고 예상하고 있어요.”

잘 되는 것 같기는 했는데 생각보다 더 대박이 나니까 얼떨떨하기도 하고 조금 부담스럽기도 했다.

“어쨌거나 저도 이번에 너무 큰 돈을 쓰면서 영화를 만들다보니까 걱정을 많이 했는데 제작사나 투자자들 모두 잘 될 것 같아서 마음이 후련하네요. 짐을 한결 던 것 같아요.”

“흐흐... 그렇지? 아, 그리고 내가 우리 유 팀장한테 들었는데 혹시 다음 영화 준비해?”

어째 이 이야기가 안 나올까 싶었다.

유지은 팀장 입장에서 괜찮은 시나리오를 가지고 감독이 고민하는데 당연히 밀어붙이고 싶었을 거다.

다만 그녀는 자신이 영화를 만들지 안 만들지 고민한다고 생각했지 제작사를 차려서 만들려고 한다는 생각은 못했다는게 문제였다.

“사실 준비한 시나리오가 있기는 합니다.”

어차피 알게 된 사실이니 더 이상 잡아뗀다고 쉽게 물러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솔직하게 말했다.

“어, 정말? 이야... 우리 장 감독 크게 되겠어. 이게 나이가 서른을 넘어가면 머리가 팍팍 돈다는게 쉽지 않은 거거덩? 그런데 장 감독은 무슨 장독대에서 된장 푸는 것마냥 아이디어를 마구 퍼다 쓰네. 이게이게 쉽지 않거덩. 내가 유 팀장한테 그 얘길 듣고 막 숨이 가쁘더라니까? 후욱후욱... 너무 기뻐서 숨이 안 쉬어지는거야. 내가 나이를 먹으니까 참 별 경험을 다 해요.”

쉽지도 않고 말을 쏟아붙는데 요행히 침은 튀지 않아 다행이다 싶을 정도다.

언제 말이 끝나나 기다리다 숨을 고르는 순간 재빨리 입을 열었다.

“저기... 대표님께 너무 죄송한데...”

순간 박만구 대표의 입가에 미소가 진 채로 굳어져간다.

직감적으로 동훈의 입에서 거절의 말이 튀어 나오리라는 걸 경험적으로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 왜 죄송해? 잠깐 이리 앉아 봐. 아니다, 내 방으로 가자고. 어, 오 상무랑 유 팀장만 들어와. 직원들은 마저 먹던거 먹고...”

이미 분위기가 식어버린 파디인걸 느꼈는지 직원들은 과자와 음료수 등을 집어먹던 손을 가지런히 내려놓는다.

미안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일단 박 대표를 따라 들어갔다.

“일단 앉아봐. 무슨 일인데 그래? 내가 뭐 실수한거라도 있어? 난 진짜 우리 장 감독 밀어주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는데?”

“그럼요, 알고 있습니다. 대표님께서 얼마나 도와주셨는지 알고 있죠.”

“그런데? 다른데랑 하려고?”

조금은 상기된 박 대표의 얼굴을 보니 괜히 미안한 감이 있었다.

“그런건 아니구요. 진짜 아니에요.”

동훈이 손을 저으며 아니라고 하자 박 대표는 한숨을 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후... 아니야, 괜찮아. 우리가 언제 전속으로 감독 잡아놓고 계약했나? 큰 곳 가려면 가도 돼. 안 그래도 우리 살려준 감독인데 내가 잡으면 그건 실례지. 혹시 추천해줘? 내가 얘기 잘 해줄게.”

다른 뜻이 있어보이지 않고 정말 순수하게 도와주려는 듯 싶었다.

“대표님, 그게 아니라... 사실 제가 다른 제작사와 계약해서 영화를 만들기보다 제가 제작사를 하나 세우려고 해요.”

“어? 제작사를 만들겠다고? 왜? 뭐하러?”

그가 황당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대표님께서 잘 해주신거 알지만 그래도 제가 만들고 싶은 작품 마음껏 만들고 감독을 비롯한 스태프들이 제대로 대우받을 수 있는 시스템을 한번 만들어 보려구요.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는게 대표님이 잘못됐다는게 아니라 그냥 이런 변화를 줘보면 어떨까 싶은 마음에 하는 거라...”

갑자기 박만구 대표가 말을 끊었다.

“자네 지금 굉장히 건방지다는거 아나?”

“네?”

“변화를 줘? 아니 영화 두 개 성공시켰다고 자네가 뭐 이 바닥에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줄 알았어? 무슨 변화를 주게? 스탭들 인건비 올려주고 싶어? 그렇게 해서 좋은 사람 되면, 안 그래도 애니메이션 때문에 박박기는 곳을 아예 죽여버리고 싶어서 그래?”

아무래도 박 대표가 단단히 오해를 한 듯 싶다.

아니면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듣던지 말이다.

“스태프 인건비가 올라간다고 이 바닥 죽는거 아닙니다. 좋은 작품이 나오기 위해선 스태프들을 살 수 있게 해줘야 작품이 나오는거 아닌가요?”

“영화 한편 뚝닥 만드니까 다른 감독들도 다 그런줄 아나 보지? 지금도 촬영스케줄에 맞춰서 찍는 감독 열중에 셋도 안 돼. 그런데 스탭들 인건비 다 챙겨주고나면 제작사 다 망하는거지. 지금 그걸 하겠다고 하는거야. 세상을 몰라도 한참 몰라. 본인은 선구자가 되고 싶을지 몰라도 아마 다른 스태프들 그거 따라하겠다고 설치다가 이 바닥 다 나자빠질거다.”

“그렇게 해서 나자빠질거면 나자빠져야죠. 아랫사람들 피 빨아서 살아남아야 할 회사라면 죽는게 맞습니다. 그리고 아닌 말로 아무리 영화를 잘 만들어도 감독들에게 돌아가는게 없으니 다들 영화감독을 꿈꾸다가 현장에서 현실을 보고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전향하는거 아닙니까. 더 좋은 대우를 해주면 더 좋은 작품이 나올 것이고 그럼 시장은 더 커질 겁니다. 왜 그걸 모르십니까?”

원래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지만 말을 하다보니 하고 싶은 말이 계속 튀어나왔다.

김영웅 감독이 있던 곳도 그랬었다.

처음엔 열악하기 그지없는 대우 속에서 스탭들의 몸을 갈아가며 영화를 만들다 어느 순간 박찬호, 봉준명 감독이 영화제작환경을 바꾸면서 표준계약서도 생기고 충무로가 변화하기 시작했던 거다.

그나마 그쪽에서 영화판은 조금 더 나았지 드라마 쪽은 김영웅 감독이 죽을때까지도 박봉에 주당 150시간을 넘게 일할 정도였다.

뭐 어쨌거나 여기서는 그 단초를 자신이 만들고 싶었다.

그리고 그걸 바탕으로 이곳에서도 충무로에 꽃을 피우고 싶은 마음이었다.

“결국 하고 싶은 말이 그거 였구만. 돈을 더 달라 그거 아니야? 대박쳤는데 쥐꼬리 같은 돈 받고 보니까 억울했던거야? 와, 이거 완전 미친 놈이네. 야, 나가! 너 내가 이번에 영화 수익난거 계약서대로 하나도 빠짐없이 제대로 챙겨 줄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나가. 우리 이제 얼굴 보지 말자. 알겠지?”

“후... 이렇게까지 될 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어쩔 수 없죠. 알겠습니다. 제가 감독 될 수 있게끔 영화 만들어주신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동훈은 그에게 꾸벅 절하곤 회사를 나왔다.

처음엔 입맛이 씁쓸하고 가슴이 답답했는데 시간이 조금씩 지날수록 가슴 한편이 후련해지는 걸 느꼈다.

어려운 숙제를 마친 느낌일까?

동훈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종로를 향했다.

가서 명진이와 막걸리를 마시며 얼큰하게 취한뒤 다음 작품을 논의하면 걱정이 모두 날아갈게 분명했다.

*

“대표님, 화가 나신건 알지만 너무 흥분하신거 아니실까요?”

유지은 팀장이 쥐구멍에 들어가듯 기어가는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지만 박만구 대표는 어림반푼어치도 없는 소리라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흥분을 안 하게 됐어? 그놈 얘기하는거 아까 못 들은거야? 나만 들었나?”

“그래도 잘 타이르면...”

“타이르긴 뭘 타일러. 그놈 얘기하는게 내가 직원들 피 빨아먹는 악덕 고용주라는 말이잖아. 내가 악덕 고용주야? 야, 유 팀장아. 한 번 말해봐라. 내가 악덕 고용주냐?”

“그건 아니죠...”

“아니면서 왜 아깐 입에 꿀이라도 바른 것처럼 입 꾹 다물고 있었어?”

“대표님이랑 대화 하시니까...”

“아유, 열받아...”

“참으세요, 대표님. 지금 박스오피스 순위랑 관객수, 수입 보면서 마음 좀 달래세요. 뭐니뭐니해도 돈이 최고의 화병 치료제잖아요.”

박대표는 그 말에 화를 가라앉히며 자리에 앉았다.

화면에 뜬 박스오피스 순위를 보니 다시 입가에 미소가 실실 나오는지 헛기침을 하며 화를 가라앉혔다.

“험험... 이래서 옛말에 검은머리 짐승은 거두는게 아니라고 했는데...”

동훈을 욕하던 박 대표는 어디에선가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황급히 받았다.

“어이, 오랜만이구만. 나야 잘 지내지. 아유, 축하는 뭐... 응, 운이 좋아지 뭐. 그래그래. 내가 한턱 쏠게. 언제 만나자고? 언제가 괜찮은데...”

박 대표는 미소띤 얼굴로 통화하며 오 상무와 유 팀장에게 얼른 나가보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결국 조용히 문을 닫고 나온 유 팀장에게 오 상무가 말했다.

“유 팀장아. 너 너무 장 감독 편드는거 아니냐? 아까는 너무했다.”

“죄송합니다.”

“잘해라. 어?”

오 상무는 유 팀장의 어깨를 툭 치고 남은 과자와 음료수를 향해 걸어갔다.

유지은 팀장은 많은 생각이 담긴 눈빛으로 문이 잠긴 대표실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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