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
두 번째 작품(4)
싱글벙글하며 케잌을 주문해놓고 나니 명진이 다시 물어본다.
“유 감독이 엿 먹으라는 뜻인 줄 모르면 어떡하죠?”
“그럴 리가. 만약 그럼 내가 아직도 호구인 줄 아는 거겠지. 그럼 그거대로 더 재밌겠는데? 내가 정말 순수한 의도로 보냈다고 생각할 거 아니야? 크크큭... 그게 더 웃기겠다.”
그렇게 킥킥거리며 웃고 있는데 명진이 스윽 다가오며 황정훈에게 흘낏 눈길을 주고 말했다.
“나 주연 추천. 황정훈 어때요?”
“정말?”
팔에서 닭살이 쫙 올라오는게 느껴졌다.
실제 영화를 본적도 없는 놈이 어떻게 황정훈이 제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을까?
정말 재능있는 사람은 보는 눈이 다르다는 걸 느꼈다.
“그 영화 캐릭터가 그렇잖아요. 조금 거친데 인정이 있고 정의로운 형사. 그럼 너무 잘생기면 안돼. 그럼 몰입도가 떨어지잖아요?”
“그렇지. 확실히 네가 좀 알아.”
“흐흐... 황정훈 씨 마스크가 좀 그래요. 평소에 술을 많이 해서 그런지 항상 얼굴이 조금 검붉고 피부가 거칠죠. 저 마스크면 따로 뭘 설명할 필요가 없어. 그냥... 그냥 삶에 찌든 형사야. 그쵸?”
“크크크... 그래. 네 말이 맞다.”
그렇게 둘이 남들은 못 듣게 속삭이며 낄낄대는데 언제 다가왔는지 이현재가 슬쩍 막걸리를 내밀었다.
“저도 같이 우습시다. 이거 원 둘만 그렇게 웃으니까 사춘기 애들한테 따돌림 당하는 것 같아요.”
“아유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대한민국에 이현재 씨 따돌릴 사람 있습니까?”
“그런데 무슨 말씀을 그렇게 재밌게 하셨어요?”
“아... 캐스팅 때문에 서로 얘기하다가 옛날 생각이 나서 빵 터졌었어요. 그런데 이현재 씨랑 이렇게 가까이서 술 마실 수 있다는게 뭔가 감격스러운데요? 솔직히 1년 전에는 어디 감히 톱스타와 마주보면서 막걸리를 대작하고 이런걸 상상하지도 못했는데 정말 많이 바뀌었어요.”
조감독이었을 때 수많은 회식 자리를 가졌지만 언제나 중요한 자리에는 끼지 못하고 연출부 막내들과 한 쪽 끝에서 언제 회식이 끝나나 기다리고만 있었다.
그런데 신인감독이라고는 하지만 연출했던 영화가 성공하고 두 번째 작품마저 기자들의 호평을 받으니 톱스타가 먼저 다가와 술을 건네고 있다.
이런 상황이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잘 모르는 사람들이야 스타라서 어렵게 생각하지만 막상 저와 친한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똑같은 사람인데요. 뭐. 화면에서 보여지는 것 때문에 사람들이 신비감 같은 걸 갖는데 그게 좋을때도 있지만 친해지고 싶은 사람하고 가까이 가기 힘든 경우는 그게 안 좋더라구요.”
“그럼 오늘부터 친하게 지냅시다.”
“그런 의미에서 한잔 더 받으세요.”
이현재를 시작으로 배우들이 한명 씩 다가와서 술을 건넸다.
차마 거절할 수 없어 그걸 다 받아 마시다보니 화장실을 들락거렸음에도 언제부터인가 필를이 끊겨버렸다.
눈을 떠보니 어느새 해가 중천에 떠 있다.
“아우... 머리야...”
동훈은 깨질듯한 머리를 부여잡고 화장실로 가 씻기 시작했다.
“어제 어떻게 왔지?”
막걸리 먹고 취한 사람은 부모도 몰라본다는데 어제 밤 기억이 사라져서 불안하기 그지 없는데 퍼뜩 정신이 들었다.
오늘 개봉일이라 언론이나 VIP들이 아닌 진짜 관객들의 평가가 올라올 시간이기 때문이다.
이미 조조를 본 관객들이 어떤 평을 남겼을지 궁금함에 대충 씻고 후다닥 들어와 평점을 클릭했다.
[느와르 별로 안 좋아하는데 이건 재밌게 봤음]
[황정훈이라는 배우 처음 보는데 포스 장난 아님]
[개쩜. 꼭 보셈. 두 번 보셈]
[드루와, 드루와!]
“후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반 관객 평점도 무려 9점을 넘어서고 있었다.
물론 개봉 첫날 평점은 제작사와 배급사 직원들의 열심히 올리는 중이겠지만 그것 치고도 상당히 높은 편이다.
아마 평점조작의 물이 빠지고 개봉 열흘이 넘어가면 못해도 7점 상위권에서 8점 초반은 넘어설게 분명했다.
“흐흐...”
아무리 관객의 반응이 좋을 거라고 예상했음에도 실제 관객들의 평이 좋으니 실실 웃음이 나왔다.
이때 유지은 팀장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감독님, 아무래도 이번에 대박 날 것 같아요.”
그녀는 흥분해서 다짜고짜 소리를 질렀다.
“아직 첫날도 안 지났어요. 그리고 배급사 SHOW에서 개봉관도 많이 안 잡아줘서 대박이라고 하기까지는...”
제작사에서 큰 돈을 투자한 영화는 배급사에서 최대한 개봉관을 많이 잡아주려고 노력한다.
다만 노력은 하더라도 대형 멀티플렉스에서 탐탁치 않아하면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아무리 방학시즌이나 추석 연휴가 아니라고 해도 극장에는 애니메이션이 걸려 있었고 영화가 그걸 능가한다는 보장이 없기에 극장에서 개봉관 확대를 불편해 했던 거다.
“관객들 평이 좋아요. 실제 우리 직원들이 관객들을 상대로 조사했는데 이 정도 수치면 예매율은 갈수록 올라갈 거고 개봉관 더 늘어날게 확실해요. 제 생각에 최소 5백만 가능할 것 같아요.”
“5백만이나 확신을 해요?”
“크크크... 내가 확신하는 이유가 있다니까요. 지금 윤슬기 팬덤에서 단체관람 예약하고 난리 났어요.”
“아...”
역시 연기가 안 된다는 편견을 버리고 시험삼아 캐스팅 했는데 결과가 대박으로 돌아왔다.
이번 그 눈물의 기자회견(?)이 확실히 큰 도움이 됐던 거다.
“됐어요! 이제 우리 살았어요! 대박이에요!”
*
유병세 감독은 씁쓸한 기분으로 그가 평소 자주 다니는 사무실을 방문했다.
충무로에서 속칭 ‘페르소나’라고 불리는 이 사무실은 친한 지인 감독 몇 명이 하도 자주 모여 술 마시고 놀며 작품에 관해 이야기하다 보니 아예 사무실을 차리게 된 경우였다.
이중 유병세 감독은 창립멤버이자 핵심멤버로 아무 감독이나 이 모임에 끼어 주지 않았다.
띠띠딕
번호키를 열고 들어가니 최순길 감독은 한쪽 소파에서 자고 있었고 박광효 감독은 먹던 짜장면을 막 입에 넣고 있는 중이었다.
“왔어?”
“다 먹고 얘기해. 그러다 나올라.”
“우움,,, 하나 더 시킬까?”
“아니야. 나 먹고 왔어.”
유병세 감독은 지친 얼굴로 자신의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그 모습에 유 감독의 기분이 좋지 않음을 안 박광효 감독이 단무지 하나를 입에 넣으며 물었다.
“왜 그래? 언론시사회 반응이 안 좋아? 어제 시사회 끝나고 기사 뜬 거 보니까 괜찮던데?”
“어, 나쁘지 않았어.”
“근데 왜 표정이 안 좋아?”
“아니... 오늘 저녁에 배우들이랑 회식 있는데 같이 안 갈래?”
“난 됐다. 내가 연출하지도 않은 회식에 내가 왜 끼어?”
“새끼... 싫으면 관둬라. 졸라게 예쁜 여배우 하나 소개시켜주려고 했는데...”
유병세 감독이 슬쩍 말을 흘리자 박광효 감독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무조건 안 간다는 건 아니고 내가 괜히 껴서 재미가 없을까 봐 그랬지, 재미가... 그런데 그 여배우가 누구야?”
“신세연. 알지?”
“어? 알지. 근데 걔 보통 회식자리 잘 안 나와서 네가 싫어했잖아.”
“어찌나 빼는지... 그래도 오늘은 VIP시사회라 어지간한 배우들 다 모였잖아. 그래서 안 빼고 오더라고.”
“오옷! 그럼 WAS엔터 배우들도 모이는 건가?”
“겸사겸사해서 그쪽이랑 쪼인 할 것 같아.”
“이여... 유 감독 능력 하나는 정말 탁월해. 내가 이래서 유 감독을 좋아하잖아.”
박광효 감독과 유병세 감독은 동갑이었기에 페르소나 모임에서 유일하게 서로 말을 놓는 사이였다.
“그래서 갈 거지?”
“아유, 네가 권하는데 안 갈 수가 있나?”
“그럼 좀 씻고 가자. 샤워실에서 샤워하고 면도 좀 하고... 응?”
감독은 촬영장에서 연출을 할 땐 부산스럽게 움직이지만, 다음 작품을 준비할 땐 작가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앉아서 시나리오 작업을 할 때도 있지만 상당 부분의 시간을 게임을 하거나 독서, 또는 영화감상을 하는데 소비한다.
이 모든 것들이 창작을 위한 밑거름이 되기에 어느 누구도 놀고 있다고 뭐라 하는 사람은 없었다.
단지 그러다 보면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 거의 폐인 집단처럼 보이는 건 사실이다.
유독 청결을 중시하는 유병세 감독을 제외하면 다들 꼬리꼬리한 냄새에 지극히 아재스러운 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참고로 이 모임에 속한 감독들은 다 총각들이었다.
“안 그래도 샤워실에서 씻고 가려고 했어. 근데 뭘 입고 가야 하나? 보자보자... 뭘 입어야 하나...”
박광효 감독이 뭘 입을까 고민하던 그때 저쪽 소파에서 쪽잠을 자고 있던 최순길 감독이 소란스러움에 깨어났다.
“뭔데? 어디 가는데? 고기 먹으러 가는 거야?”
“형님은 안돼요.”
유병세 감독이 선을 딱 자르자 민망했던지 최순길 감독이 시선을 피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냥 물어본 거야. 나도 가겠다는 건 아니고... 그런데 어제 기사 좋던데?”
“그렇긴 하던데 막상 까봐야 아는 거지. 형님도 알잖아.”
서로 알고 있다.
기자들이 언론시사회가 끝나고 나가는 기사들은 어지간히 영화가 별로이지 않고서는 다들 착하게 나간다는 걸 말이다.
그리고 이미 언론시사회가 끝나고 진짜 평이 어떠했다는 건 유병세 감독도 알고 저들도 안다.
그럼에도 직설적으로 이야기하지 못하는 건 서로의 자존심이 걸려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적당히 칭찬해주고 체면을 세워주는 정도로 덕담을 건네는게 이 모임을 유지시켜주는 비결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긴 하지. 그런데 이번에 맞상대할게 만만치 않겠어. 장동훈 감독이 유 감독 친구였지, 아마?”
“친구는 개뿔, 내가 언제 그런 친구가 있었다고 그래.”
“너 가끔 여기에 걔 데리고 오고 그랬었잖아. 뭐, 아니라면 됐고.”
최순길 감독은 더이상 유병세 감독의 심기를 거스르면 안 될 것 같아 그만 두었다.
여기서 더 성질을 돋우면 주변 사람만 피곤해진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특히 평소보다 예민하게 구는 걸 보니 이번 영화 때문에 단단히 날이 서 있는게 느껴졌을 거다.
그런데 이때...
띵똥!
밖에서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내가 나가볼게.”
박광효 감독이 애써 귀찮은 표정을 무릅쓰고 걸어 나간 후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자 묘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저기... 선물이 왔는데?”
“선물? 누구 선물?”
유병세 감독의 물음에 박광효 감독은 대답 대신 그의 앞에 작은 상자를 내려놓았다.
“뭐지? 이거 케잌인데? 나 생일 아닌데? 누구지?”
상자 겉면이 유명한 베이커리 상표였기에 내용물이 케잌인 건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유병세 감독은 고개를 갸웃하며 포장을 푸는데 작은 메모 하나가 스륵 바닥으로 떨어졌다.
“오오! 편지도 보냈는데? 누구야?”
박광효 감독이 호들갑을 떨었지만 유병세 감독은 왠지 모를 불길함에 메모를 펼쳐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집에 가서 보려고 올려두는데 눈치 없는 박 감독이 메모를 들어 펼쳤다.
“개봉 축하드려요. 대박나세요. 파이팅? 파이티이잉?”
박 감독의 표정이 기묘해지자 유 감독이 메모를 확 뺏어 확인하니 놀랍게도 발신인이 그가 너무도 잘 아는 사람, 장동훈이었다.
“이 새끼가 진짜...”
유병세 감독은 손으로 메모를 구기며 부들부들 떨었다.
그 서슬에 박 감독과 최 감독은 서로 눈치를 보며 사라졌고 남은 유 감독은 혼자 한참을 열불내다가 허공에 대고 소리 질렀다.
“그래, 누가 이기나 해 보자! 네가 이기는지, 내가 이기는지 한 번 붙어 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