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
두 번째 작품(3)
처음에는 이 문자의 뜻이 뭔지 몰라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문득 그녀가 지금 한창 ‘왕의 눈물’ 시사회에 관심을 초집중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왕의 눈물이 잘 안 나왔나 본데?”
“네? 어떻게 아세요?”
동훈은 대답 대신 핸드폰에 찍힌 문자를 보여주었다.
“어? 유지은 팀장님이네? 이 누님 쪼개는 걸 보니까 완전 망했나 본데요? 크크크큭...”
“에이, 그렇게까지는 망하지 않았을거야. 그런데 생각보다 평이 별로였나 보네.”
유병세 감독처럼 꼼꼼하고 순서가 정확한 감독은 연출을 할 때 어지간해서는 실수하지 않으며 현장편집을 거쳐 편집실에서 나온 편집본을 봐도 자신의 생각과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동훈은 그녀의 문자가 조금 의외일 수밖에 없었다.
“감독님은 별로 안 좋아하시는 것 같네요?”
안 좋아할 리가 있나?
마음 같아서는 이 자리에서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 안 좋아하긴... 내가 성인군자도 아니고...”
“하긴, 난 감독님 그렇게 안 봤단 말이죠. 내가 그래서 감독님 마음에 들더라니까.”
“하여간 말은... 일단 계속 보기나 해.”
“예압!”
명진이는 정자세로 대답하고는 다시 시나리오로 눈길을 돌렸다.
그는 계속 ‘제목이 에런데...’, 또는 ‘제목이 이상한데...’라고 중얼거리며 시나리오를 읽어 갔고 동훈은 그 혼잣말을 무시하며 상념에 잠겼다.
이번 영화는 오로지 황정훈과 같이 연기하다가 문득 그가 주연이었던 그 영화를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 때문에 시작한 시나리오였다.
그냥 재밌겠다는 생각에 시나리오를 적어가기 시작했는데 막상 시작하고 보니 정신없이 써내려 가서 사흘도 채 안 되는 시간에 대략적인 내용이 다 나와버렸다.
결국 영화가 개봉하고 석 달 정도를 느긋하게 쉬려던 계획을 취소하고야 말았다.
이렇게 재미있는 시나리오가 다 나왔는데 쉬고 있자니 몸이 근질근질했기 때문이었다.
“이야... 역시 감독님 머리는 보물상자인가 봐요. 재밌네.”
“괜찮아?”
“선과 악의 대립이 단조로워서 관객이 이해하기 빠를 것 같고 후반부에 어느 정도 반전도 있네요. 캐릭터도 재미있어서 제가 뭐 손을 대고 싶어도 될 게 없는데요?”
명진이와 같이 일하려는 이유는 연출과 구성, 그리고 캐릭터에 관해 그만큼이나 감각 있는 연출가가 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명진이가 손을 댈 게 없다고 하니 역시나 기본적으로 천만을 넘긴 영화는 뭐가 달라도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래? 일단 각본까지 다 나온 건 아니니까 천천히 작업해보도록 해야겠어. 혹시 그거 보고 꼭 맞는 캐스팅이 떠오르는 사람 있으면 얘기 좀 해주고.”
“조연 이하로요?”
“주연급이라도 딱 맞겠다고 생각하면 추천해줘. 오늘 그거 하라고 너 부른 거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집에 가서 천천히 생각해볼게요. 이제 술이나 더 먹죠.”
“그러자.”
둘은 다시 막걸리에 파전을 곁들여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지금 시작해도 아마 저녁나절은 돼야 끝나겠지만 원래 연출하는 사람들치고 술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부어라 마셔라 하며 시간을 보내고 나니 어느새 밖이 어둑해져 있었다.
명진이도 그렇고 자신도 술이 올라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일단의 무리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여기 계셨네. 그거 조금 취했다고 무슨 문자를 그렇게 못 찍어요?”
유지은 팀장을 비롯해 ‘새로운 세계’에 출연했던 주연 배우들 순식간에 테이블을 쉭쉭 맞추었다.
“뭐야, 다 왔네?”
“감독님, 벌써 이렇게 취하신 거예요? 너무한다, 우리도 부르지.”
주연배우이자 톱스타인 이현재는 물론이고 황정훈과 신은정, 그리고 요즘 제일 핫한(?) 배우인 윤슬기도 끼어 있었다.
그 외에도 많은 주조연 배우들이 우르르 몰려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을 정도였다.
“뭡니까? 오늘 회식 있었어요? 나만 몰랐나? 야, 명진아. 너 몰랐냐?”
“나도 몰랐는데요. 왜 회식을 연출부 모르게 잡고 그래?”
명진이가 혀가 꼬부라져서 묻자 은정이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오늘 회식 아니었어요. 그냥 팀장님이 오늘 회식 어떠냐고 물어서 모인 거에요.”
그녀의 대답에 동훈이 말했다.
“다들 스케줄 없었어요? 술 먹자고 해주길 기다린 것처럼 다 모였네?”
“그러게 먼저 모이자고 하시면 좀 좋습니까? 전 술 마시자는 사람 있으면 얼른 달려가는데 아무도 전화오질 않아서 굉장히 심심했습니다.”
황정훈이 넉살 좋게 웃었다.
“다들 바쁘실까봐 그랬죠. 그리고 우리 언론시사회 끝나고 회식 했었는데...”
그게 일주일도 채 안 됐지만, 저들은 못 들은척 세팅된 자리에 앉았다.
유 팀장이 능숙하게 메뉴를 시키고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에게 막걸리를 한 사발씩 꽉꽉 채운 다음 가장 먼저 잔은 머리 위로 들었다.
“선창하겠습니다.”
“뭘 또 하려고...”
동훈은 오늘따라 유난히 업된 그녀는 동훈의 혼잣말이 들렸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외쳤다.
“한국형 느와르의 신기원, 새로운 세계의 대박을 위하여!”
“위하여!”
“위하여!”
“위하여...”
동훈은 감독의 신분이니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선창을 따라해주었다.
“으음... 감독님 목소리가 약하시네. 법인카드로 장어즙이라도 사다 댁으로 보내 드려요?”
“먹고 쓸데도 없습니다.”
“쓸데가 없으니까 이런 자리에 목소리라도 키우셔야죠. 그렇게 센스가 없으니까 쓸데가 없지. 이게 악순환이에요. 센스가 없다, 고로 여자를 못 만난다, 고로 센스가 늘질 않는다, 결국 여자는 더 안 생긴다. 언제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실까?”
“끄응... 네네. 센스 키우도록 합죠.”
유지은 팀장은 흐믓하게 웃더니 자신의 가방에서 서류 하나를 꺼냈다.
“이게 뭐게요?”
“뭡니까?”
“흐흣! 오늘 ‘왕의 눈물’ 언론시사회 갔다가 들은 진짜 감상평. 그중에 제가 아는 기자분들한테 직접 들은 얘기에요.”
“그걸 뭘 서류로 들고 다녀요?”
“한 사람한테 들은 게 아닌거죠. 기자한테만 물어본 게 아니라 시사회를 본 관계자들까지 꼼꼼히 체크한 거라구요.”
“완전히 007 제임스 본드네요?”
“우리만 그런거 아니거든요? 다른 제작사나 배급사는 더 하다구요. 걔들은 진짜 영화 찍는다니까요?”
“그래서 결론이 뭐에요?”
“히히히...”
유 팀장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고 애처럼 웃으며 동훈에게 건넸다.
내용은 생각보다 적나라했다.
“편집이 거칠고 내용이 복잡하다, 내용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지루해지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한다, 최소 두 번은 봐야 이해가 갈 것 같은데 두 번을 봐야 하는지 모르겠다... 이야... 너무 쎈데?”
“그렇죠? 유병세 감독이 연출에 너무 힘을 줬다고 말들이 나와요. 너무 생각이 많았던 거지.”
“흐음... 왜 그랬을까? 그런 친구가 아닌데...”
유병세 감독을 걱정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그토록 꼼꼼한 친구가 왜 갑자기 어려운 연출을 선택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작가주의 색채가 옅기로 유명한 유병세 감독은 지금까지 오락영화를 줄곧 찍어왔기에 이번 사극에서도 플롯을 비교적 단순하게 가져와 쉽게 이해시킬 수 있도록 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작가주의 색채가 진한 영화를 찍었다니...
혼자 고민하는데 이현재가 끼어들었다.
“유병세 감독님이 아마 압박을 많이 받았던거 같아요.”
“압박이요?”
“우리야 출연하고 싶은 영화에 출연하면 되는 건데 감독님들 세계에선 속된 말로 눈치가 보였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이번에 사극 찍는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말들이 있긴 했는데... 그게 이렇게 나타난 건가?”
옆에 있던 은정이 물었다.
“저기 선배님 혹시 그 영화에 캐스팅 제의 받으셨어요?”
“왕의 눈물? 어. 시나리오 받긴 했었지.”
“와... 만약 그거 했다가 망했으면...”
은정이 입을 가리고 놀라자 이현재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아직 우리 성공 안했어. 이 친구 이거 김치국 마시는 솜씨가 보통 아니네.”
“어? 이 정도 반응이면 거의 성공 아니에요?”
은정이 억울한 표정으로 주변을 돌아보자 동훈이 말했다.
“그렇게 성공을 자신하시면 이번에 개봉하고 나서 조조로 한번 보고 오실래요?”
“어... 아니요.”
“거 봐. 본인도 아직 무서워서 못 보면서...”
동훈이 놀리자 은정의 얼굴이 빨개진다.
유 팀장은 은정을 보며 웃다가 말했다.
“그만 놀리고 어쨌거나 지금 상대쪽 배급사 움직임이 굉장히 부산스럽대요. 그 얘긴 뭐냐. 우리가 대박 난다는 말씀. 자, 오늘 먼저 가는 사람이 다 쏘는 거예요.”
그녀가 상을 탕탕 때리며 선언하자 다들 맞는 말이라며 맞장구를 쳤다.
“저기요, 나 여기 온 지 다섯 시간이 넘었어요. 이건 너무 불공평한 건데?”
“공평한 거 원하시면 스포츠 하러 가시던가요. 어? 그런데 이거 뭐에요?”
유 팀장이 이제는 아예 엎어져 있는 명진의 얼굴을 살짝 들어 올리며 그 아래에 깔린 시나리오를 집어 들었다.
동훈은 순간 아차 싶었다.
이번 작품은 자신이 새로 준비 중인 제작사에서 만들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직 구상중이고 새로운 회사를 만든다는게 생각처럼 쉽지 않다고 생각하기는 한다.
실력 있고 센스 있는 직원도 채용해야 하며 여러 가지 법적인 절차를 거쳐야 하는 것도 골치아팠다.
그럼에도 제작사를 세우려고 하는 건 아직 이곳은 김영웅 감독이 있었던 곳과는 다르게 실력있는 감독이 그렇게 많은 대우를 받을 수 없는 시스템이었다.
6급 공무원이 4백만을 돌파하며 상당히 많은 수익을 거두었음에도 자신의 통장에 들어온 돈을 1억이 채 되지 않을 정도니 말이다.
그 돈 가지고 제작사를 세운다는 것도 남들이 들으면 뭐하러 돈 버리는 짓을 하냐고 비웃음을 살 일이다.
“다음 작품 준비중인거에요. 아직 확정된 건 아니고.”
“확정된 게 아닌데 조감독한테 보여준 거예요? 어머, 나 섭섭해요.”
그녀는 장난스럽게 눈을 찡그리며 시나리오를 넘겼다.
그런데 그 순간 이 자리의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않고 유지은 팀장의 얼굴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는 거다.
그게 어색했는지 황정훈이 막걸리를 내밀며 말했다.
“벌써 시나리오를 다 쓰시고, 감독님은 참 쉬지를 않는 것 같습니다.”
“쉬다가 쓴게 아니라 예전부터 조금씩 끄적인걸 요새 좀 다듬은 거예요. 야심작이라거나 그런건 전혀 아니고...”
황정훈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유지은 팀장은 시나리오를 덮고 고개를 홱 돌렸다.
“감독님, 이거 우리랑 계약해요.”
“네? 아니... 아직 할지 안 할지 결정이 안 난 거라서...”
“이거 왜 이래요? 이미 구성 다 잡아 놓고 캐릭터 설명까지 다 끝냈으면서... 저랑 줄다리기 하시는거면 오케이! 제가 이거 대표님한테 가지고 가서 확실히 정리해 올게요. 어때요?”
동훈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미안한데 조금만 생각을 해볼게요. 지금 여러 가지 생각이 많거든요.”
그녀도 여기서 더 땡기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시나리오를 다시 내밀었다.
“알겠어요. 그럼 나중에 결정나면 꼭 연락주세요.”
“그럼요. 어떤 결정이 나든 연락 드릴게요.”
이때 엎드려 있던 명진이 침침한 눈을 뜨며 일어났다.
“왜 더 자지?”
“아흐음... 아유, 그럴수야 있나요? 그런데 유병세 감독 이번에 영화 망하면 진짜 타격 크겠는데요? 모임에서 거의 따돌림 당하는거 아닌가?”
유병세 감독이 끼어있는 모임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상당히 많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감독들 몇 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충무로에서는 ‘페르소나’라는 이름으로 상당히 유명했다.
“아마도 그렇겠지? 그 모임 좀 이상하잖아. 겉으로는 친하게 지내도 속으로 얼마나 경쟁하는데.”
그렇게 대답하던 동훈은 문득 머릿속으로 번뜩이며 스쳐가는 아이디어가 생각났다.
곧바로 핸드폰을 뒤적이는데 명진이 물었다.
“뭐하세요?”
“어, 페르소나 사무실로 케이크 하나 보낼려고.”
“케이크?”
“응. 뭐라고 써서 보내면 좋을까? 영화 개봉을 축하합니다? 대박을 기원합니다? 흠... 뭐가 좋을까~ 으흥흥~”
명진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주문을 하는 동훈을 보고 고개를 흔들었다.
“악마다. 악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