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
두 번째 작품(1)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새로운 세계의 후반부 작업을 위해 편집실과 CG작업실을 오가며 반폐인처럼 지내기를 석 달여...
드디어 완성된 편집본을 내보일 수 있게 되었다.
동훈은 유지은 팀장과 함께 가장 먼저 배급사 ‘SHOW’를 찾았다.
“부장님, 스케줄 바뀐 거 없죠?”
인사도 채 하기 전에 유 팀장이 의기양양한 태도로 말했다.
그때 거만한 태도로 유지은 팀장을 상대하던 김용민 부장은 동훈과 함께 와서인지 바른 자세로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바뀔 게 뭐 있나? 그나저나 이번 주까지 편집본 안 들고 왔으면 나 시말서 쓸 뻔했어. 아우... 아주 그냥 심장을 쫄깃하게 해?”
“나는 뭐 직장생활 안 하나, 자꾸 그러지 마요. 그리고 장 감독님께서 일정 맞춘다고 얼마나 고생하셨는데요.”
“알지, 알지. 원래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거잖아. 시말서 쓸 뻔했지, 쓴 건 아니니까 뭐가 문제겠어? 아이고 우리 장동훈 감독님. 나 김용민 부장입니다. 반갑습니다.”
“말씀많이 들었습니다. 장동훈입니다.”
“그때 시상식에서 신인감독상 받으실 때 너무 훤칠하시고 그러셨는데... 좀 고생을 하시긴 했나 보네. 많이 상하셨어.”
“하하하! 그렇죠? 그래도 여기 온다고 사우나 한번 갔는데 이거 혈색이 돌아오질 않네요.”
“이거 어쩌나? 그래도 나이가 젊으시니까 금방 회복 될 겁니다. 일단 앉으세요.”
그제야 숨을 돌리고 자리에 앉자 김용민 부장이 직원을 시켜 차를 내오게 했다.
김용민 부장이 뜨거운 인스턴트 커피를 마실 때 유지은 팀장이 문득 궁금한지 그에게 물었다.
“근데 왜 그렇게 닦달하셨어요? 비시즌인데다가 그때 스케줄도 없어서 말 맞춘거 아니었어요?”
“그랬지. 그런데 위에서 영화 하나를 딱 그때 맞추자고 하는거야. 그래서 내가 ‘영화 세상’이랑 픽스 시켜놓은게 있다고 안 된다고 했지.”
“아... 그게 뭔데요?”
“유병세 감독 작품이라던데?”
“어? 그래요?”
유지은 팀장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슬그머니 고개를 동훈에게 돌렸다.
그녀도 어찌된 사정인지 눈치를 챈거다.
동훈이 아무말없이 그냥 가만히 있자 그녀의 고개가 다시 김용민 부장에게 향했다.
“작품 이름이 뭐에요?”
“사극이야. ‘왕의 눈물’이라는건데, 사극치고 제작비는 그렇게 많이 쓰지 않았대. 80억인가? 어쨌든 위에서 밀고 내려오는데 그거 막느라 골치가 아팠어요.”
“추석이랑 겨울방학 시즌에 밀지 않고요?”
“걔들도 우리랑 똑같지. 애니메이션이랑 정면승부한다는것도 부담스럽고 일단 그쪽은 일정이 빡빡해. 이제와서 밀어본다고 하면 다른 제작사들이 가만있지 않지.”
“흥! 그럼 우리는 가만 있는대요? 아주 웃겨!”
유지은 팀장은 팔짱을 끼며 콧방귀를 꼈다.
그 모습에 김용민 부장이 씨익 미소지었다.
“에이... 솔직히 제작사 규모에서 많이 못 미치잖아. 배급사 입장에서도 어지간하면 대작 빵빵히 만들어주는 제작사를 밀어주고 싶지. 몇 년에 한 번씩 내미는 제작사는 뒤로 미룰 수밖에 없어. 그건 유 팀장도 인정을 해줘야해.”
“이제 달라요. 우리 작년에도 성공시켰고 이번에 백억짜리 프로젝트라구요! 우리 이제 중견 제작사 쯤은 돼요.”
“그거야 이번 영화가 성공하느냐, 안 하느냐에 달린 거 아니겠어? 어쨌든 상황이 그렇다는 걸 설명하는 거야. 오해하지 말라고. 장동훈 감독님도 들으셔서 아시겠지만 제가 조금 곤란했어요. 유병세 감독 제작사가 우리나라 톱이라는 LS엔터잖습니까. 국내에서 만드는 영화, 애니메이션 절반 가까이를 LS에서 만드니까 우리도 눈치를 안 볼수가 없어요. 이해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아, 그럼요. 이해합니다.”
“허허... 장 감독님 성격 참 좋으시네. 솔직히 내가 감독님이라도 삔토 상할만 해요. 아는데 회사라는게 참 내 맘대로 되질 않거든. 어쨌든 감독님이 고생해서 이렇게 편집본이 늦지 않게 도착했으니까 위에서도 이제는 뭐라할 수 없게 됐어요. 영화 완성도만 좋으면 훨씬 좋고.”
동훈은 가만히 듣고 있다가 물었다.
“저기... 그럼 유병세 감독은 어디와 계약하게 되는 겁니까?”
“설마 위에서 유병세 감독을 놓치기야 하겠어요? 유 감독이야 그렇다고 쳐도 LS에서 제작하는거니까 어지간하면 배급을 맡으려고 할텐데 만약 시기를 11월 내외로 고집하면 우리도 어쩔 수 없지.”
유지은 팀장이 물었다.
“유병세 감독이 11월로 고집할거라 생각하세요?”
김용민 부장도 미간을 찌푸리며 확신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게 애매해. 들어보니까 지금 후반부 작업중이라는데 그게 일찍 끝나면 11월이 적당하긴 하면서도 그렇게까지 급할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단 말이지. 그래서 나도 뭐라 확답을 주기는 힘든데? 뭐, 근데 유병세 감독이 다른 배급사에게 넘기고 우리랑 정면승부를 벌이려고 한다면 조금 곤란하긴 하겠어.”
유지은 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일단 편집본 보시죠.”
“그래, 기다려봐.”
김용민 부장은 회의실을 나갔다.
이제부터 진짜 긴장되는 시간이다.
동훈은 담담히 기다리는데 유 팀장은 입술을 깨물며 초조하게 시간을 보냈다.
“저보다 더 긴장한 거 같은데요?”
“긴장 안하면 그게 이상한거죠. 아니, 미친거지. 광고료까지 백억 잡아놓은 대작 중에 대작이란 말이에요. 그게 지금 처음으로 평가받는 자린데 긴장 안하면 머리가 어떻게 된 게 분명하다구요. 감독님이야 자신이 있는지 모르지만 전 화투에서 패를 뒤집는 심정이에요. 장땡이 떠야 하는데...”
그녀가 긴장하는게 당연하다 싶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갑시다.”
김용민 부장이 들어와 밖으로 불러냈다.
일행이 간 곳은 빔프로젝트가 설치된 아주 커다란 회의실.
이미 그 회의실에는 많은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재생하겠습니다.”
직원 하나가 컴퓨터를 능숙하게 조작하더니 곧 불이 꺼지고 화이트스크린에 빛이 쏘아졌다.
약 두시간의 시간이 지나고 불이 켜졌을 때 편집본을 시청한 사람들이 조금 달아오른 얼굴로 서로간에 대화를 나누는 것이 보였다.
가장 구석진 자리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저들이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는 몰라도 그것이 부정적이지 않음은 확실했다.
밝고 조금은 흥분된 얼굴로 대화를 나누던 그들은 우르르 회의실을 빠져나갔고 동훈과 유 팀장은 다시 아까 그 작은 회의실로 돌아왔다.
“결과가 나쁘지 않은 것 같죠?”
분명 분위기가 좋았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가 다시 확인차 물어본다.
그만큼 부담감이 심하기 때문일거다.
“그런 것 같은데 조금 있다가 김 부장 들어오면 물어보죠.”
잠시 후, 김용민 부장이 밝은 표정으로 들어왔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감독님. 편집본을 보고 말이 좀 길어졌어요. 일단 반응은 좋습니다. 마케팅쪽에서도 아주 좋아하더라구요. 일단 개봉 전에 바로 해외판매 알아보기로 결정했습니다.”
“오오!”
유지은 팀장은 손을 모으며 감동에 젖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일단 해외 선판매를 하면 개봉을 하기 전부터 매출을 쭉 올릴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관객에게 기대해야하는 손익분기점을 낮출 수 있으니 제작사나 투자자 입장에서 보면 굉장히 반가운 일일 수밖에 없다.
“완성된 편집본을 가지고 우리 마케팅팀에서 2분짜리로 다시 만들어 볼 겁니다. 문제는 없으시죠?”
괜히 티저영상을 잘 만들었니, 아니니 나중에 태클걸지 말라는 말이었다.
“괜찮습니다. 어련히 잘 만드시겠어요.”
“하하, 감독님 화끈하시네. 사실 우리 애들 실력 좋아요. 그리고 영화 완성도가 아주 좋아서 티저만 가지고도 선판매가 상당할 수 있습니다. 뭐, 이거야 감독님은 관심이 덜할수도 있는데 사실 배급할 때 선판매를 무시할 수 없거든요. 광고효과도 좋고.”
“아닙니다. 일단 남의 돈으로 영화 만들었으니 잘 돼야 나중에 저도 다시 투자받아서 영화 만들죠.”
“그렇죠? 어쨌든 내가 유 팀장 때문에 지금까지 쿠사리 좀 먹었는데 편집본 보더니 다들 기다리길 잘했다고 하더라고. 장동훈 감독님이 제일 고생 많으셨고, 유 팀장도 고생 많았어.”
“부장님도 고생 많으셨어요.”
지금까지는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려 투닥거렸던 둘은 미소지으며 결과에 만족했다.
*
[장동훈 감독의 ‘새로운 세계’ 해외 35개국 선판매 쾌거!]
[한국형 느와르의 새로운 패러다임, 새로운 세계]
[장동훈 감독, ‘새로운 세계’로 연타석 홈런 가능할까?]
[유병세 감독의 차기작 ‘왕의 눈물’, 흥행예감 발동]
후반기 작업이 끝나고 배급사에서 개봉 시기를 일찍 당길수록 영화가 잘 나왔는지 아닌지 어느정도 예측이 가능하다.
물론 본다고 해서 다 맞는건 아니지만 그래도 제작사와 배급사가 영화를 보고 가진 자신감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는 거다.
그런 의미에서 추석시즌이 지난 11월에 정면승부를 거부하지 않는 유병세 감독의 차기작이 어느 정도나 잘 나왔는지 궁금증을 불러 일으킬 정도였다.
“벌써 언론시사회네요?”
후반기 작업을 끝내고 여유가 생긴 동훈은 사무실에 들러 분위기를 살펴보고 있었다.
반대로 배급사와의 조율과 마케팅까지 신경쓰는 유지은 팀장은 어제도 밤을 샜는지 대충 묶은 머리에 죽어가는 얼굴로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말도 마세요. 요즘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바쁜데 일정은 자꾸 다가오니까 환장하겠어요.”
“왕의 눈물은 시사회 일정 잡혔어요?”
신경쓰고 싶지 않아도 이미 왕의 눈물이 11월 8일로 개봉을 확정지어 놓은터라 신경을 안 쓸수가 없었다.
“일주일 뒤에 할 것 같아요. 장소 픽스했다는 얘기 들었으니까 늦어도 오늘 저녁에는 보도자료 나갈 것 같아요. 그쪽에서도 최대한 자기네들쪽으로 이목을 집중시키려고 할테니까.”
“흠.., 골치 아프네.”
“저희도 그렇지만 배급사에서도 엄청 신경쓰이나봐요. 특히 LS엔터에서 만든거라 어떡해서든 가지고 오려고 했는데 다른 배급사한테 뺏겨서 결국 부딪치게 되니까 이건 뭐... 그런데 유병세 감독 쫌 짜증나네! 생긴것도 쫌생이 같이 생겨가지고...”
솔직히 생긴건 잘생긴 편이라 주변에 항상 여자가 끊이지 않던 놈이다.
오죽하면 여배우랑 몇 번의 썸씽이 있을 정도니 말이다.
“어쩔 수 없죠. 우린 작품 잘 나왔으니까 다른거 신경쓰지 말고 해보자구요.”
“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애들한테 커피 좀 쏘고 가세요.”
“하하, 알겠습니다.”
솔직히 유병세 감독의 작품이 얼마나 잘 나왔을지 궁금하긴 했다.
잘 나오면 우리쪽 관객수를 잡아먹어서 큰 손해를 보게 되겠지만 그걸 떠나서 새로운 세계보다 더 재미있을지 순수하게 그게 궁금했다.
이틀 뒤. 언론시사회 당일.
영화에 참여한 주연배우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전에는 빠져있다가 이번에는 기자들과의 자리에 함께 했는데 역시나 오늘의 주인공은 감독도 주연배우들도 아니었다.
가장 먼저 질문을 받은 사람은 바로 윤슬기였다.
“윤슬기 씨. 이번에 영화배우로 첫 시작을 알리셨는데 각오 한 말씀 부탁드릴게요.”
다행스럽게도 아직 정식으로 질문을 받기 전에 장난식으로 물어본것이긴 했지만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윤슬기의 행보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어... 감독님과 여기계신 선배님들께 민폐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왕 답변이 나와서일까?
다른 기자가 기습적으로 나섰다.
“팬분들게 하고 싶은말 있습니까?”
“어... 그게...”
윤슬기는 대답을 하다가 감정이 복받치는지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기자들의 질문시간이 시작되기도 전에 모든 카메라가 일제히 그녀에게 집중됐다.
“제가 너무... 정말 열심히 했는데... 잘 봐주셨으면...”
동훈은 황당해 어쩔줄을 몰라 스탭들이 있는 뒤쪽을 돌아보는데 이상하게 유지은 팀장은 좋아서 희희낙락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