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흥행의 신-32화 (32/116)

# 32

서울영화제(3)

유병세 감독의 전작인 ‘지옥열차를 타라’는 어느 정도 작품성을 인정 받았지만, 제작비가 80억이나 들어간 대작이었음에도 관객은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했다.

한마디로 감독 경력에는 도움이 되는 작품이지만 제작사와 투자자는 물먹은 작품이었던 거다.

본인은 아무리 아무렇지 않은 척해도 제작자와 투자자들에게 미안하지 않을 수 없었고 동훈과 현주의 말이 그의 아픈 곳을 찔렀음은 부정할 수 없었다.

“진짜 안타까워하는거 맞지?”

역시나 유병세 감독의 얼굴은 치킨집의 붉은 조명 아래에서도 확연히 드러날 만큼 달아올라 있었다.

“아니, 그럼 당연하지. 나 솔직히 이번에 최소 3백만은 들 줄 알았다? 진짜야. 영화 완전 잘 나왔잖아.”

동훈은 점차 말을 하면 할수록 평소 성격이 그대로 나오는 걸 느꼈다.

친구라는 생각을 버리자 입에서 나오는 대로 술술 지껄이게 된 거다.

“아 진짜?”

“그럼 당연하지. 내가 왜 가짜로 안타까워하겠어? 우리 술 나왔다. 그럼 맛있게 먹어.”

동훈이 뻔뻔스럽게 웃으며 점원에게 술을 받아들자 유병세 감독은 벌건 얼굴로 화를 억누르며 자리에 앉았다.

“와, 이제는 사람 속 긁을 줄도 아네. 세연 씨. 동훈이랑 작품 할 때 어땠어요?”

세연은 갑작스러운 물음에 화들짝 놀랐다.

안 그래도 분위기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화살이 자신에게 돌아오자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난감했던 거다.

“어... 전 그때 쿠키 영상 하나 찍었던 거라 하루밖에 촬영을 안해서 어땠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첫 영화라서 그냥 엄청 긴장되고 부담스러웠다는거? 그것만 기억이 나는 것 같은데요?”

그 짧은 시간에 최대한 머리를 굴려서 나온 답변이었다.

그래도 그게 먹히긴 했는지 유병세 감독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는 동훈이 있는 곳을 살짝 힐끔대다가 목소리를 낮추고 입을 열었다.

“다행이네. 저 새끼랑 오래 촬영하면 속이 터지거든. 배우들한테 어떻게 디렉팅을 해야 할지도 모르고 감독을 꿈꾼다는 새끼가 씬을 나누고 붙이는 재주도 없어요.”

“네...”

뭐라 대답할 말이 없었던 세연은 그저 고개만 끄덕이며 맞장구만 쳐주었다.

여기서 그건 아닌 것 같다고 나선다는 건 눈치 없는 오지랖일 뿐, 자신에게도 장동훈 감독에게도 도움이 안 된다는 걸 알기에 어쩔 수 없었다.

“어쨌든 내가 세연 씨를 캐스팅 했던게 마스크가 너무 좋아서였어. 원래 세연 씨처럼 청순하면서도 글래머러스한 몸매는 아무리 예뻐도 카메라로 보면 좀 퉁퉁하게 나오거든? 그런데 카메라로 봐도 그냥 예뻐. 아주 관객을 빨아들인다니까?”

“아, 네. 감사합니다.”

“실장님이 아주 잘 선택하신 거야. 특히 이 혜선이라는 캐릭터가 아주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순수한 아인데 내가 딱 세연씨를 보고 ‘이거 세연 씨가 아니면 안 된다’ 생각했지. 이거 연기할 수 있는 배우, 우리나라에 많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연기하는거 보니까 내가 기가 막히게 배우를 잘 골랐다고 생각했다니까. 이거 개봉하고 나면 분명히 세연 씨 뜹니다. 내가 장담하는데 떠.”

“아, 네...”

세연은 그저 고개를 숙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병세 감독은 그런 그녀를 흐믓하게 바라보다가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는 확 인상을 쓰며 잔을 내려놓았다.

“아, 오늘따라 술도 맛이 없네.”

유병세 감독은 세연에게 썰을 풀어 놓음으로써 마음을 풀어보려 했지만 그래도 저 건너편에서 현주와 웃으며 수다를 떠는 동훈을 보니 속이 뒤틀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무래도 이번에 만든 작품으로 저 새끼를 눌러버려야 기분이 시원해질 것 같다고 생각했다.

*

“감독님, 유병세 감독이랑 뭐 있어요?”

현주는 맞은편에서 은근히 계속 동훈을 힐끔거리는 유병세 감독을 보며 물었다.

“아뇨, 아무 일도 없는데요?”

“흐음... 말하고 싶지 않은가?”

하여간 여자들은 모두 다 눈치 귀신들이다.

“그냥 그렇다고 해두죠.”

“유병세 감독이랑 사이 안 좋으면 곤란할텐데...”

“그건 또 왜 그렇습니까?”

“저 감독 뒤끝이 좀 있거든요. 피곤해.”

“현주 씨도 꺼리는 사람이 있어요?”

다시 봤다는 듯 과장되게 놀란 표정을 지어주자 그녀가 황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당연히 없죠. 그런데 내가 안 꺼려진다고 다른 사람도 그러라는 법은 없잖아요? 그리고 아무래도 감독님은 신인이니까 생각해야 할 게 많잖아요? 안 그래요?”

“뭐...”

동훈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뭔가 다가가기 힘든 알 수 없는 아우라가 있었다.

분명 한번 보면 그대로 사람을 홀릴만큼 아름다움에도 이상하게 그녀에게는 조금 거리를 두게 한다고 할까?

아무래도 초기에 그녀 때문에 영화가 엎어졌던 경험을 하다 보니 괜히 거리를 두게 되는 것 같았다.

자기가 좋을때는 언제든지 살갑게 대하다 조금 마음에 안 든다 싶으면 언제든지 깽판을 치고 사람을 힘들게 하는 스타일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현주는 그런 동훈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그런데 저 여시는 왜 저기로 붙었대요? 알아요?”

“누구요?”

“저기... 신세연.”

설마했는데 대놓고 후배를 상대로 여시라고 할 줄은 몰랐다.

동훈이 벙찐 상태로 바라보자 그녀가 상관없다는 듯 다시 재차 말을 이었다.

“난 감독님이 이번 작품에도 저 여시랑 같이 할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알아보니까 동생이랑 했다면서요?”

“그건 또 어떻게 알았습니까?”

“조감독한테 물어보니까 대답해주던데요? 그게 뭐 대단한 비밀이라고... 말로는 엄청 예쁘다던데?”

“집안 유전자가 대단한 것 같더라구요.”

“유전자가 좋은 만큼 타고난 연기력도 비슷한가요?”

“그건 뭐...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세요?”

“하... 아니다. 되지도 않게 빙빙 돌려 얘기하려니까 복장 터지네. 그냥 얘기할게요.”

“네.”

“이번 영화 끝나고 다음 시나리오 있으면 우리 쪽에 먼저 좀 돌려달라고 우리 대표님이 신신당부하셨어요. 그리고 이전에 이진혁과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은 잊어달라고도 하셨구요. 뭐, 후자는 난 상관없으니까 알아서 하시고, 어쨌든 무슨 말인지 알았죠?”

“하하, 그럼 그거 때문에 회식에 온 겁니까?”

그녀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으음! 나 술 좋아해요. 그리고 내가 좀 재수없긴해도 회식자리에서 진상부리진 않아서 스탭들도 나 끼는거 그렇게 싫어하지 않을 걸요?”

본인이 평소 자신이 진상인건 아나보다.

“그런데 내가 이번에 만든 영화 망하면요?”

그녀는 소주를 반쯤 탄 소맥을 쭈욱 들이키더니 배시시 웃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당연히 그래도 시나리오 달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원래 밭떼기 계약을 할 때도 한해 농사가 망하든 풍작이든 사전에 계약한 금액으로 계약하는 건데?”

진심으로 그렇게 해야한다는게 아니라 그냥 한번 떠본 건데 그녀의 반응이 또 예상 밖이다.

“뭐, 그렇게 해요. 내가 스타급으로 팍팍 밀어드릴게.”

그녀는 여전히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 대표님 대신에 확답을 주는 거예요?”

“나 우리 회사에서 그정도 힘은 있어요. 캐스팅 권한이 있다는게 아니라 그냥 말빨이 센편? 어쨌든 난 오늘 나 할 일 다 했음. 술이나 먹어야지.”

그렇게 그녀와의 대화가 자연스럽게 끊기고 술자리를 이어가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동훈의 테이블로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오늘 술자리가 각 영화팀마다 모였다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다들 아는 얼굴에 한다리 건너면 형님, 동생, 후배, 선배 사이다.

술이 알딸딸하게 올라가니 본인들의 자리를 벗어나 친한 사람들끼리 모이는 거야 술자리에서는 흔한 일인데 동훈의 자리로 모여드는 건 신인감독상을 축하할 겸 얼굴도장을 찍기 위해서였다.

“아유, 안녕하세요. 조명 맡고 있는 조성진입니다. 일단 술한잔 받으시죠.”

“네. 전에 저랑 같이 일한 적 있으신데...”

“기억하시는구나! 난 또 다 잊어버리신줄 알았지. 난 그때도 우리 장동훈 감독님 센스가 보통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연출력이 정말 좋으시더라구, 일단 한잔 받으셨으니 드시고...”

“아, 네.”

동훈이 얼떨결에 원샷하고나서 그에게 잔을 돌려주며 소주를 따랐다.

“받으시죠.”

“얼마전에 찍으신 작품도 상당히 좋을 것 같다고 말들이 나오던데... 제가 그때 같이 못해서 너무 안타깝더라구요.”

“그런가요? 하하...”

솔직히 당시 스태프를 구할 때 촬영감독은 동훈이 딱 찍어서 골랐기에 유지은 팀장이 고생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스태프들은 그렇게 쉽게 구해진 건 아니었다.

이전 작품의 스태프들을 그대로 가져온다고 했지만 사실 크게 신뢰를 못받고 있었기에 몇 번이나 계약서를 수정해가며 가까스로 설득했었기 때문이다.

이전 작품이 너무 빨리 찍었기에 작업환경은 좋지만 괜히 이상한 작품을 만들어 경력에 오점이 남을까봐 각 스태프 수장들이 꺼려했었던 건데 이제는 완전히 상황이 달라진 거다.

그 꼴을 보는 유병세 감독의 속이 한 번 더 뒤집어진 건 당연했다.

특히 자신과 같이 술자리를 하던 막내 스태프 하나가 동훈에게 술을 따르며 눈도장을 찍는 걸 보자 술잔을 탁자에 탕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그만합시다. 이집 치킨이 좀 별로네.”

“감독님이 여기 맛있다고...”

“시끄러, 빨리 일어나.”

유병세 감독은 식탁 한 구석에 올려져 있는 계산서를 낚아채듯 잡아채고 바로 계산대로 향했다.

그리고 계산하고 나오며 입구 근처에 위치한 동훈에게 잠시 들렀다.

“나 먼저 간다. 잘 먹고.”

“어. 그래. 나 안 나갈게. 잘 가라. 오늘 일 너무 신경쓰지 마. 푹 자고 일어나면 별일 아니야.”

유병세 감독은 그냥 나가려고 했지만 마지막 동훈의 말에 가게를 나가려던 걸음을 멈췄다.

“너 근데 언제 개봉하냐?”

“뭐? 아... 새로운 세계? 글쎄. 아마 11월 쯤에 개봉할 거 같은데?”

원래 언제 개봉하는지는 배급사에서 오픈해도 된다고 말해주기 전에 어지간해서는 외부에 얘기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일부러 오픈한 건 일종의 도발이었다.

자신도 알고 상대방도 도발인 줄 아는 그런 도발...

“11월? 아... 촬영 다 한 거야?”

“응, 지금 후반기 작업 중이거든.”

“그럼 적당한 시기네. 나도 마침 촬영 거의 끝나가고 있어. 잘하면 비슷한 시기에 개봉 할수도 있겠다.”

“아 정말? 그렇구나. 잘 나왔으면 좋겠다.”

“그러게. 그런데 이번엔 잘 나올 거 같아.”

그의 자신감이 어쩐지 이번에는 허세로 보였다.

어지간한 감독이 아니고서는 자신이 아직 찍은 작품의 완성된 편집본을 보기 전까지는 잘 나왔다고 확신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유병세 감독이 배운게 많고 엘리트적인 코스를 밟아 왔지만 기본적으로 감독은 예술의 영역이며 예술은 노력보다 타고난 재능이 더 중요하다.

지금까지 유병세 감독을 봤을 때 단 한 번도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다 찍지도 않은 작품을 자신한다는건 지금 냉정하게 판단하고 있지 못하다는 거다.

“나오면 내가 제일 먼저 유 감독 작품 보러갈게.”

“그러든지. 과연 그럴 정신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간다.”

유병세 감독이 가게를 나가고 그 뒤를 민망한 얼굴의 세연이 지나갔다.

왠지 그녀가 안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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