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서울영화제(2)
배운 것도 많고 인맥도 훌륭한 데다가 친근하게 다가와 이것저것 가르쳐주는 걸 보고 인성이 참 바르다 생각했었다.
“에이... 그래도 그건 아니지. 영화 구성이 깔끔했어. 신인감독치고 기승전결이랑 장르적 핵심기조를 끝까지 잘 유지했다고. 기존 감독이라면 몰라도 신인감독상 정도면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흥! 구성 깔끔하고 로코 분위기에 쓸데없이 질질 끌지 않은 건 인정. 그런데 너무 유치해. 대사가 그게 뭐야?”
“뭐, 조금 유치하긴 했지만... 아깐 친해보이던데 너무 까는거 아니야?”
“아 됐다. 나가자. 오늘 정혜리랑 임현주 졸라 예쁘더라. 가서 사진이나 찍자.”
뒤처리를 어떻게 처리하고 나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 정신이 딴데 팔린채 자리로 돌아왔다.
“무슨 일 있어요? 얼굴이 안 좋아보이시는데?”
“아니요. 괜찮아요.”
화장실에서 유병세의 말을 듣고 난 뒤 처음에는 화가 치밀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화는 가라앉고 궁금증이 일기 시작했다.
말투로 봐서는 분명 뭔가 자신이 그에게 크게 밉보일 짓을 한 거 같은데 그게 뭔지 도통 알수가 없었다.
물론 알아냈다고 해서 그와 친해진다는 생각 따위는 없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심란한 동훈의 마음은 상관없이 언제 시작했는지 벌써 가수들의 축하무대가 이어지고 있었다.
“어쩜 저렇게 무표정한지... 다들 너무 심해.”
옆자리에 앉아 있는 유지은 팀장은 가수들의 축하공연을 보면서도 표정 하나 없이 그저 보고만 있는 배우들을 향해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도 몇몇 배우들은 분위기 맞춰 주는데요?”
“그렇긴 하네요. 회식할 때는 그렇게 잘 놀면서...”
그렇게 유지은 팀장과 쓸데없는 잡담으로 시간을 보내는데 누군가 동훈의 옆으로 슬쩍 와 앉았다.
“안녕하세요. 장동훈 감독님 되시죠?”
고개를 돌려보니 배우 민정혁이었다.
그는 김영웅 감독이 있던 차원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배우로 이렇게 잘생긴 배우가 왜 그쪽에서 배우를 하지 않았을까 의아한 대표적인 예에 해당했다.
곧고 날카로운 콧날에 짙은 눈썹으로 어찌 보면 강해보이지만 눈이 크고 웃는 표정이 좋아 여자들치고 민정혁을 싫어하는 사람이 없었다.
작년에 코믹형사물로 스크린 데뷔를 했는데 오늘 남자 신인배우상에 노미네이트 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아유, 민정혁 씨. 반가워요. 평소 팬이었습니다.”
물론 그냥 하는 말이었다.
“정말요? 아휴, 감사합니다. 사실 저 작년에 감독님 영화 너무 재미있게 봤거든요.”
“그랬나요?”
“실은 제가 예전부터 임현주 선배님 팬이라 기대 안하고 팬심으로 봤는데 엄청 재밌더라구요. 연기에서도 배울 점도 많고...”
“그러셨구나...”
사실 연기는 현주보다 민정혁이 더 잘해서 배울 게 별로 없었을 텐데...
어쨌거나 본인이 그렇게 생각한다는데야 할 말이 없다.
“오늘 제가 장담하건대 무조건 신인감독상 딸 겁니다.”
“하하. 아유 고마워요. 말이라도 고맙네요.”
“진짜에요. 진심으로 감독님이 신인감독상 받을 거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셀카 한번 찍어도 될까요?”
“그럼요.”
민정혁이 바짝 다가와 셀카모드로 사진을 찍는다.
안 그래도 외모 차이가 심했는데 이렇게 바짝 붙으니 완전 오징어가 되겠다고 생각했지만 티내지 않고 환하게 웃어주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다음에 또 뵐게요.”
민정혁이 떠나자 유지은 팀장이 웃으며 속삭였다.
“앙큼한데요?”
“앙큼하다구요?”
“쯧쯧... 이래서 남자들은 눈치가 없어. 모르겠어요? 방금전까지 CF한 편 찍고 간 거?”
동훈은 입을 벌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게 광고였구나?”
“제대로 어필하고 간 거죠. 그런데 확실히 감독님 연출이 마음에 들긴 했나봐요. 어지간해서는 배우들이 신인감독한테 저렇게 대놓고 어필하는 경우는 드믄데 말이죠.”
듣고보니 김영웅 감독이 있던 곳에서도 이런 경우가 종종 있긴 했지만 신인감독에게 추파(?)를 던지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민정혁의 방문에 아까까지의 짜증났던 기분은 훌쩍 날아가고 청명한 가을 날씨처럼 후련해졌다.
유병세 감독이 뒤에서 욕을 하고 다닌다고 계속 기분 나빠서 우울해하고만 있으면 자기 손해일 뿐이다.
행사가 진행된 지 한 시간이 넘었을 때 드디어 사회자가 기다리던 시상을 거행했다.
“이번 시상은 감독님들 인생에 단 한 번 수상 가능한 영광스러운 상입니다. 바로 신인감독상인데요, 신인감독님들께 있어선 오늘의 메인이벤트인 감독상과 작품상에 비길만큼 아주 중요하고 뜻깊은 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시상하실 분은 영화 ‘사랑과 죽음’의 최준식 씨와 영화 ‘그대와 그대와’의 송수연 씨입니다.”
잔잔한 음악이 깔리고 멋진 턱시도를 입은 최준식과 가슴이 꽤나 많이 패여 아슬아슬해 보이는 은빛 드레스의 송수연이 걸어 나왔다.
송수연은 오래전에 한범석 감독님과의 술집 사건으로 얼굴을 익히 알고 있어서 그런지 더 반가웠다.
최준식은 마이크 앞에 서서 송수연에게 말했다.
“허허허... 오늘 너무 눈이 부십니다. 너무 아름다우셔서 쳐다보기가 어렵네요.”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민망하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송수연도 그걸 아는지 가슴골을 살짝 가리며 호탕하게 웃었다.
“아하하! 감사합니다. 제 코디가 오늘 시상을 나간다고 하니까 너무 신경을 많이 써주셨거든요. 저도 입어보고 진짜 너무 깜짝 놀랐는데 입고 보니까 저도 이런 모습이 있었구나 하면서 스스로가 놀라고 있습니다. 하하하! 어쩜 좋아... 푸흐흡!”
송수연은 민망함에 얼굴이 빨개지며 웃음을 터뜨리다가 화제를 돌렸다.
“선배님 요즘 영화 촬영하신다고 들었어요. 이순신 장군님이 되셨다고...?”
“음... 아주 영광스러운 배역이지만 굉장히 어렵고 어깨를 누르는 부담을 짊어지고 연기하는 중입니다.”
“정말 기대가 됩니다. 선배님이 이순신 장군님을 어떻게 표현하셨을지 너무 궁금하네요.”
“송수연 씨는...”
“하핫! 저는 지금 쉬는 중입니다. 여러 감독님들! 저 백수니까 많이 불러주세요!”
송수연은 귀엽게 어필하고 난 뒤 카드대본으로 시선을 돌려 준비했던 시상을 시작했다.
“그럼 신인감독상에 오른 후보 보시겠습니다. 먼저 ‘6급 공무원’의 장동훈 감독.”
“코믹과 액션, 그리고 로맨스를 아주 간결하고 조화롭게 표현해내 많은 관객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시상자 뒤편으로 짧게 편집한 영화가 흘러가는 와중 최준식 배우가 약간의 첨언을 덧붙였다.
“다음 ‘최악의 하루’ 최대출 감독.”
“빠르고 감각적인 연출에 스릴있는 시나리오가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다음 ‘인간사냥’의 오미혜 감독.”
“처절한 삶의 흔적을 극도로 절제한 미장센으로 표현했습니다. 앞으로 충무로를 이끌어갈 여성감독의 등장이었습니다.”
이렇게 세 명의 후보감독들을 호명한 송수연은 또 하나의 카드를 꺼내들며 심호흡을 했다.
“아우... 제가 다 긴장되는데요?”
송수연이 카드를 펼치려는 그때, 단상 아래에 대기하고 있던 조감독이 최준식을 향해 크게 팔을 휘둘러보였다.
앞에 시상이 너무 빨리 끝나서 시간을 끌라는 표시였다.
경험 많은 최준식이 재빨리 송수연에게 물었다.
“수연 씨는 어느 감독이 받을 것 같아요?”
“어... 이거 대답 잘못하면 저 계속 백수되는거 맞죠?”
“그럴 리가 있나. 이렇게 아름다운 배우를 감독님들이 안 쓸 리가 없잖아요?”
“그러기에는 너무 오래 쉬었죠. 푸흡. 아유 그런데 전 다 훌륭하신 감독님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하나 딱 골라주면 바로 그 감독님이랑 계약하는건데... 우리 수연 씨가 아직 때가 안탔네. 하하하.”
최준식의 썰렁한 농담에 다들 억지로 웃었다.
대선배가 농담을 했는데 웃지 않을 수 없었을 거다.
“하하, 그런가요? 어... 전 그래도 다 똑같이 훌륭하신 감독님이라...”
“그럼 다 고만고만하다는 말씀?”
“어머, 선배님 저 여기서 죽이시려는 거죠?”
“하하하!”
그제야 조감독이 오케이 싸인을 내렸다.
그걸 본 수연이 재빨리 명단이 적힌 카드를 뽑았다.
“시상하겠습니다. 서울영화제 신인감독상 수상자는...”
두두둥...
“축하합니다. ‘6급 공무원’의 장동훈 감독님.”
설마했다.
영화가 잘 나오긴 했지만 설마 자신에게 이런 영광이 돌아올 줄은 몰랐기에 얼떨떨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축하드려요, 감독님.”
유지은 피디의 축하를 뒤로 하며 단상에 올랐다.
수많은 플래시의 세례와 자신을 바라보는 카메라들에 혼란스러웠지만 최대한 흥분을 내리누르고 송수연이 주는 트로피를 받아들였다.
“축하해요, 감독님.”
트로피를 건네주며 송수연이 작게 속삭인다.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던 당시 이진혁과는 다르게 좋은 이미지로 남아 있었던 그녀였기에 그녀의 축하는 진심으로 다가왔다.
오늘 영화제에 참석한 ‘6급 공무원’의 스탭들 몇몇이 다가와 안겨준 꽃다발을 품에 안고 마이크 앞에 섰다.
“이런 큰 상을 주시고, 참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스탭들과 배우님들은 아시겠지만 굉장히 우여곡절 끝에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저보다 스탭들과 배우들이 더 큰 고생을 했는데 제가 대표로 상을 받았다고 생각하겠습니다. 그리고...”
동훈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관객 어느 한 부분을 지그시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제가 사실 영화학과를 나오지 않아 속칭 근본이 없습니다. 그런 저를 이 바닥에 들어올 수 있도록 이끌어주신 한범석 감독님께 먼저 영광을 돌립니다. 그리고 근본없는 저지만 앞으로 그 누구보다 좋은 이야기로 관객들을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분명히 보았다.
어이없는 표정으로 이죽거리는 유병세 감독의 얼굴을 말이다.
“다시 한번 장동훈 감독님의 신인감독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트로피와 꽃다발을 안고 내려와 꽃다발을 스탭들에게 주고 자리로 돌아왔다.
그때부터였을거다.
같이 일했던 배우와 스태프는 물론이고 자신의 번호를 아는 사람들 모두 축하한다는 문자와 전화가 걸려왔던 것이.
정신 사나웠지만 그만큼 뜻깊었던 영화제가 끝나자 동훈을 비롯한 ‘6급 공무원’ 팀들은 뒷풀이를 하러 세종문화회관 뒷골목으로 향했다.
이 자리엔 영화제 내내 배우들과 같이 도도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던 임현주까지 포함되어 있어 그녀를 제외한 모두를 의아하게 만들었다.
물론 그 누구도 그녀에게 왜 뒷풀이에 참여하느냐고 간 크게 물어보는 이는 없었지만 말이다.
골목 어딘가의 치킨집에 들어서자 이미 영화제에 참석했던 다른팀 수십여 명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나마 남아있던 네 개의 테이블을 붙여 자리를 잡자 자연스럽게 동훈이 가장 가운데에 앉고 그 옆을 현주가 자리했다.
“매니저는 어디가고 혼자 왔어요?”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을 거예요. 여기에 밴을 끌고 들어올 수 없으니까. 언니! 여기 후라이드 5마리랑 양념 5마리 주세요. 맥주 3천 두 개랑 소주도 5병 주시구요.”
“주문이 되게 자연스럽네요? 아무도 뭐 먹을지 안 물어봤는데.”
“치킨집 와서 삼겹살 먹을 거예요? 뻔한 걸 뭘 물어봐요? 감독님 연출은 잘 하는데 의외로 고리타분하시구나?”
“그걸 고리타분하다고 할거 까지야... 어쨌든 뒷풀이 같이 하게 돼서 좋네요.”
“그거 진심이죠?”
“그럼요.”
“그럼 다행이고.”
그녀는 씨익 웃는데 갑자기 반대편에 기분나쁜 얼굴이 눈에 확 들어왔다.
“와... 너 여기왔어? 오늘 자주보네?”
유병세 감독이다.
그런데 그의 팀 가운데 낯익은 얼굴이 하나 더 있었다.
청초하고 아름다운 얼굴의 여배우, 신세연이었다.
“그러게. 세연씨 반가워요.”
동훈이 손을 흔들자 세연이 고개를 꾸벅 숙인다.
“어머, 안녕하세요, 감독님.”
“아, 맞다. 둘이 같이 일했지? 어쩌냐? 세연씨 내 지금 작품에 같이 하기로 했다. 기분나빠하지 마.”
같이 작업했던 배우가 이후 다른 감독이랑 작업한다고 기분나빠할 감독은 아무도 없다는 걸 동훈도 알고 윤 감독도 안다.
그냥 기분나쁘라고 지껄인 말인 거다.
아까였다면 당황했겠지만 이번엔 웃으며 받아줬다.
“기분 나쁘긴... 너도 오늘 상 못받았다고 너무 실망하지는 마라. 관객수만 조금 들었으면 상 받을 수 있었는데 아까웠어, 진짜. 막 내가 화가 나더라. 조금만 더 들지...”
여기서 생각지도 못하고 임현주가 한 마디 더 보탰다.
“저두 너무 안타깝더라구요. 너무 실망하진 마세요,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