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흥행의 신-30화 (30/116)

# 30

서울영화제(1)

배급사에서 영화를 개봉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두 가지다.

개봉 시기에 ‘관객이 많이 올 수 있는 환경인가?’ 하는 부분과 ‘맞붙는 영화가 얼마나 관객을 빨아들일까?’ 하는 부분이다.

그런 면에서 배급사가 방학 시즌과 명절과 같은 연휴 시즌을 선호하는 건 무엇보다 학생들과 가족단위 관객을 끌어모을 수 있기 때문인데 다들 그 시즌을 노리다보니까 상대 영화를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생긴다.

일부러 안 본다기보다 시사회가 나오기 전까지 상대 영화가 어느 정도나 잘 나왔는지 알수가 없기에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다.

또 배급사에서 개봉시키는 영화가 한 두 개가 아니라서 모든 영화들을 다 피해다닐 수만은 없다.

결국 상대 배급사 영화를 신경쓰지 않고 개봉시기의 관객수만을 보는게 배급사에서 일차적으로 쓰는 전략이다.

“정말 괜찮아요? 11월 초라 학생들이나 가족 단위 관객은 전혀 오질 못하는데.”

“어차피 우리 영화를 보러 가족들이 오는 것도 이상하잖아요. 칼부림이 난무하는데.”

명절 같은 연휴 시즌이 되면 사람들은 꼭 보고 싶은 영화나 애니메이션이 없다고 해도 데이트코스로 극장을 찾곤 한다.

그렇기에 11월이나 4월, 6월은 배급사에서 대작 개봉을 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렇긴 하지만... 아쉽지 않으세요?”

“살짝 아쉬울뻔했는데 괜찮아요.”

“흠... 감독님이 괜찮다고 하니 대표님과 상의해보고 11월 개봉으로 진행해보도록 할게요.”

“네. 어쩌면 딱 적당한 때인거 같기도 해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이럴 때 생각지도 못한 작품이 뜬금없이 대박이 터지기도 한다.

유 팀장이 배급사 ‘SHOW’에서 가져온 예상 개봉 영화 목록을 보고나서 추석과 겨울방학 시즌에 개봉하고자 했던 생각이 오히려 미련했음을 알았다.

“어째서요? 우리도 나름 백억 대작인데 이런 비수기때 들어가는 것 때문에 솔직히 전 자존심 상한단 말이에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빈집털이 제대로 할 수 있는 기회일지도 몰라요. 보니까 추석이나 겨울방학때 애니메이션 개봉작들이 줄줄이 이어지는데... 전에 말씀하셨던 것처럼 대작 애니메이션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는 걸 보니까 무섭긴 하네요. 으으...”

동훈은 목록을 보며 부르르 떨었다.

유 팀장은 그런 동훈이 이해가지 않는지 고개를 갸웃했다.

“어차피 영화는 영화고 애니는 애니일 뿐이잖아요. 어차피 박스오피스도 애니 따로 영화 따로 잡는데...”

“배급사에서도 그렇게 말하던가요?”

“어... 그건...”

당장 오늘조차도 전 추석 시즌에 애니메이션한테 밀렸다며 배급사에게 까이고 오지 않았던가?

“괜찮아요. 배급사에서는 지금까지 애니메이션이 좋은 기록을 해왔으니까 애니를 우선순위를 둔 것이고 영화가 계속 좋은 기록을 세우면 애니보다 영화를 우선순위로 두고 배급을 할 겁니다. 이번 기회가 오히려 더 좋은 기회죠. 어차피 19금으로 내놓을지도 모르는데 추석이나 방학시즌이 아니면 어때요?”

“감독님, 아무리 제작비를 넉넉하게 받아서 광고 빵빵하게 할 수 있다고 해도 일단 손익분기점이 5백만이에요. 5백만 결코 쉬운 스코어 아니에요.”

오늘 유난히 걱정이 많은 유지은 팀장에게 동훈이 진지하게 목소리를 깔고 말했다.

“유 팀장님. 배급일정이 마음에 안 드는 건 이해해요. 하지만 연휴시즌에 개봉한다고 다 성공하는 거 아니고, 감독 앞에서 자꾸 이렇게 걱정하는게 감독 사기 떨어뜨리는 걸 수도 있습니다.”

그제야 자신의 실책을 알았는지 그녀가 얼굴을 붉힌채 사과했다.

“미안해요. 우리 회사에서 정말 손에 꼽을정도로 대작을 하다 보니까 욕심이 생겨서 그랬나봐요.”

그녀 말대로 손익분기점이 무려 5백만이 넘기에 불안한 건 당연했다.

“아닙니다. 영화 잘 되자고 그러는 거 알아요. 그러니까 개봉 시기는 그렇게 마무리 짓죠.”

“네. 대표님께 감독님도 동의했다고 말씀드릴게요.”

유 팀장이 씁쓸하게 떠나는 걸 보며 동훈은 힘차게 소리쳤다.

“자, 스탠바이 할게요!”

*

2달 뒤.

동훈이 지휘하는 ‘새로운 세계’의 촬영은 단 하루의 오차도 없이 무사히 마치고 종료되었다.

제작사는 물론이고 배우와 스태프 모두 장동훈 감독에게 감사를 표현했을 정도로 촬영현장은 분위기도 좋았고 디렉팅도 완벽했다는 말이 자자했다.

그렇게 촬영을 마치고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을 때 동훈은 생전 처음으로 백화점에서 맞춘 양복을 입었다.

서울시와 해주일보에서 주최한 ‘서울영화제’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작년 한해동안 개봉한 영화들을 종합적으로 심사해 평가하는 자리이자 영화인들의 정기적인 행사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영화제에 비해 생긴지 10년도 되지 않았지만 제법 객관적인 평가로 이제는 어느 정도 권위를 인정받고 있었다.

“와! 감독님 오늘 엄청 근사한대요?”

유지은 팀장이 엄지를 치켜세우며 칭찬해줬지만, 동훈은 오랜만에 입는 정장이 영 불편했다.

특히 목을 조르는 보타이는 숨을 막히게 했다.

“후반기 작업하느라 바빠 죽겠는데 이거 꼭 참석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신인감독상 노미네이트 되셨는데 무조건 참석해야죠.”

“설마 주겠어요?”

“에이... 모르잖아요? 그리고 안 줘도 얼굴 정도 비춰줘서 나쁠 거 없죠. 감독도 인기 많으면 은근 도움 되는거 아시죠?”

웃긴건 성공하지 못한 영화감독이라고 해도 예능에 몇 번 얼굴을 내밀면 투자를 받기가 조금 수월해지는 측면이 있기는 하다.

투자자들이나 투자기관도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기획서를 들고 오는 것보다 TV에서 얼굴 몇 번 본 사람의 기획서를 조금이라도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 때문이다.

“굳이 뭐...”

“오호! 그 자신감 좋은데요?”

이젠 얼굴 팔리지 않아도 그런 이유로 굳이 나설 필요 없다는 말이었다.

“그럼 갑시다.”

유지은 팀장은 프로듀서 상에 노미네이트 되었기에 이번 영화제에 같이 참석했다.

그 때문에 그녀도 여배우들이나 가는 청담동 미용실을 새벽부터 다녀왔다.

그녀와 같이 세종문화회관에 도착하니 수많은 카메라 플래쉬 세례가 펼쳐졌다.

물론 김영웅 감독이 있던 차원과 비교해 기자들의 수가 조금 부족한게 차이가 있기는 했다.

동훈과 유지은 팀장은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쉬가 쏟아지는 레드카펫을 슬쩍 돌아 행사장 안으로 들어갔다.

이 영화제의 주인공은 배우와 유명 감독이기에 민망한 상황이 벌어질까 레드카펫을 피한 거였다.

“어? 장동훈 감독!”

미리 정해진 자리로 걸어가는데 누가 이름을 불렀다.

고개를 돌려보니 비슷한 시기에 같이 조감독으로 일하기 시작했었던 유병세 감독.

나이도 비슷하고 성격도 비슷하며 좋아하는 영화는 물론이고 심지어 이상형인 여자 취향도 비슷해서 한때 굉장히 친하게 지냈던 친구였다.

학벌, 인맥 없이 밑에서 커오며 온갖 무시와 멸시를 당했던지라 같이 일하는 동료는 있어도 마음을 터놓고 말할 사람은 거의 없었는데 유일하게 마음속 이야기를 거리낌없이 할 수 있는 친구가 바로 그였다.

다만 유병세 감독은 동훈과 달리 영화학과 출신에 영화아카데미를 두루 거친 영화계 엘리트였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연락이 차츰 뜸해지다가 결국 유병세 감독이 60억 대작 사극 영화로 입봉하면서 축하전화를 한 후 아예 연락이 끊겼다.

아니, 끊겼다기보다 동훈이 그때부터 그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던 게 맞았다.

자격지심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마음 속 아픔이 사그러드는 건 아니었기에 알면서도 언제간 그와 같은 레벨에 도달할 때 연락할 마음만 가지고 있었다.

반대로 유병세 감독도 동훈에게 연락을 해오지는 않았지만 섭섭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게 고맙기도 했다.

“어? 병세야. 잘 지냈어?”

“이야... 완전 사람이 달라졌네. 연락 한 번 없더니...”

유병세 감독은 동훈의 어깨를 툭 치며 웃는다.

“정신없었어. 갑자기 일이 막 진행돼서.”

“일이 막 진행돼? 와... 감독 되더니 완전히 사람이 달라졌네. 예전엔 그런 허풍같은 거 안 쳤잖아?”

“어? 아니, 허풍이 아니라 정말 바쁘긴 했어.”

“새끼, 누군 영화 안 만들어본 줄 알겠어. 그런 허세는 술자리 여자들 앞에서 해.”

“그런가? 하하. 어쨌든 너도 좋아보인다.”

오랫동안 연락을 안했었기에 그의 책망어린 농담에도 그저 미안할 뿐이었다.

“나야 뭐 항상 그렇지. 이번에 신인감독상 노미네이트 됐다며?”

“노미네이트만 된 거지. 그냥 자리 채우려고 왔어.”

“당연하지. 설마 진짜 받으려고 한 건 아니지?”

“어? 어. 그렇지. 그냥 분위기도 한 번 보고...”

“서울 처음 온 촌놈처럼 막 두리번거리면 안 된다. 여배우들이 놀라.”

어째 유병세 감독의 어투가 예전과는 많이 달라진 것 같아 당황스러운 와중에 유지은 팀장이 급히 나섰다.

“안녕하세요. ‘영화세상’ 제작피디 유지은입니다. 유병세 감독님 전부터 뵙고 싶었어요. 반갑습니다.”

“네. 그러세요?”

“그런데 저희가 지금 급하게 이동해야 해서요. 먼저 들어갈게요. 가세요, 감독님.”

동훈도 유 팀장이 말을 듣고서야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러죠. 나중에 연락할게.”

동훈은 유병세 감독의 대답을 듣지도 못하고 유지은 팀장의 손에 이끌려 자리를 벗어났다.

유 감독과 멀찍이 떨어진 지정좌석에 도착했을 때 유 팀장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친한 사이셨어요?”

친했냐고? 5분 전까지만 해도 분명 친했다고 자신있게 말했을 거다.

“어... 친하게 지내긴 했는데...”

“뭔지는 몰라도 마음이 단단히 상했나본데요?”

“그런 것 같아요. 아니, 그랬을 거예요. 워낙 친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제가 연락을 안 했거든요.”

아무래도 당시 연락을 끊고 살았던게 유 감독으로서는 많이 섭섭했던게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평소 저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는데 갑자기 이 자리에서 마주치니 욱하고 올라왔던게 틀림없었다.

지금은 꽤 성공해서 어딜가나 인정받는 그가 설마 자신이 조금 잘 된다고 질투하는 건 아닐 거라 생각했다.

괜히 마음이 심란해지면서 가만히 앉아있기 힘들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막상 화장실을 가기 전엔 몰랐는데 막상 화장실에 들어서니 배가 아릿하게 아파왔다.

아무래도 긴장이 돼서 그런가보다 생각하며 급히 문을 열고 들어가 변기에 앉아 있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밖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그 중 하나의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그런데 아까 누구야?”

“누구?”

“그 왜... 계단 앞에서 한참 이야기를 나누던데?”

“아... 장동훈이?”

동훈은 순간 귀가 번쩍 뜨였다.

저 귀에 익은 목소리가 유병세 감독이었던 거다.

“장동훈 감독? 아... 친한가보네?”

“친하긴 개뿔...”

“이번에 장동훈 감독 신인감독상 노미네이트 됐다며? 아까 심사위원들쪽에서 흘러나온 이야기 들었는데 장동훈 감독이 유력하다는 말이 었던데?”

“시팔, 그런 새끼가 신인감독상을 받는게 말이 돼냐? 연출의 기본도 모르는 새낀데 운좋게 플롯 잘 만들어서 관객 좀 나온걸로 상을 주면 영화제 권위에 똥칠하는거지.”

동훈은 그제야 자신이 예전 힘든 시기에 사람을 잘못 만났음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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