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흥행의 신-29화 (29/116)

# 29

불어오는 바람(2)

며칠 뒤 이어진 대본리딩에서 가장 두각을 드러내는 이는 황정훈과 윤슬기였다.

황정훈은 연기가 너무도 리얼하고 현실감 있어 상대역인 이현재가 대본리딩임에도 들떠 침을 튀기며 연기를 하기도 했었다.

반면 윤슬기는 오디션에서 보여준 그녀 특유의 아이 같은 발성을 상당 부분 지운 모습으로 나타났다.

아직 그녀 스스로도 어렵고 익숙하지 않은 것 같은지 오히려 연기는 전보다 조금 어색했지만, 동훈은 그녀에게 박수를 보내주었다.

어색한 연기는 고치면 되는 거지만 평생을 살며 굳어진 발성을 바꾼건 결코 쉽게 되는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음속에 한 가지 걸리는 짐을 덜었기 때문인지 첫 촬영부터 문제없이 진행됐다.

그리고 이 시기에 비슷하게 제작에 들어가는 영화가 ‘명량’ 말고도 하나가 더 있었다.

*

“일정 빠듯한 거 아시면서 이렇게 진행을 안 하시면 저희도 정말 힘들어요.”

WAS엔터 산하 영화, 드라마 제작사인 ‘플라워 줌’에서 제작하는 액션 스릴러 영화인 ‘배신자’의 메가폰을 잡은 이는 바로 강석호였다.

그 ‘플라워 줌’의 제작피디인 송제국 피디는 현장에 나와 귀 막고 모니터만 뚫어지게 쳐다보는 강석호 감독에게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현장이 돌아가다 보면 일정이 변동될 수도 있는거 아닙니까?”

그는 여전히 고개를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어쩌면 송제국 피디의 얼굴을 보기 민망해서 일수도 있었다.

“일정이 하루 늘어날 때마다 제작비가 얼마나 늘어나는지 알고 계세요?”

“그 얘기만 벌써 열 번도 넘게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그냥 대충 찍고 넘겨요? 그렇게 할까요?”

“아니, 대충 찍으라는게 아니라... 일정을 당겨야 하지 않겠냐는 말이에요.”

“누군 일정을 당기고 싶지 않아서 그럽니까? 장면이 나와줘야 다음으로 넘어가죠.”

송제국 피디는 혈압이 올라 죽겠다는 듯 가슴을 때리며 말했다.

“감독님 말을 이해 못하는게 아닙니다. 그런데 벌써 한 씬 찍는데만 오전을 다 날리고 있잖아요? 제가 오늘 10시부터 지금까지 계속 있는데 계속 똑같은 것만 촬영하시고... 그렇다고 NG가 난 것도 아닌데...”

급기야 강석호 감독이 대본을 내던졌다.

“에이, 시팔! 더러워서 못 해먹겠네.”

“뭐, 뭐요?”

“아니, 내가 찍기 싫어서 안 찍냐고? 배우들 연기가 저런데 어떻게 오케이를 하고 넘어가냔 말이야! 그렇게 마음에 안 들면 당신이 찍든가. 어!”

강석호 감독은 횅하니 현장을 떠나버렸다.

떠난 그를 붙잡으러 조감독이 연방 ‘감독님!’을 외치며 따라갔고 마침 이 영화에 합류하게 된 오동철 촬영감독이 송제국 피디를 달래러 왔다.

“참으세요. 강 감독도 지금 한참 예민해서 저러는 거니까.”

“아니, 영화감독 치고 예민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래요?”

“아시잖아요? 전에 찍어놓은 작품 아직도 개봉을 못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마침 자기 새끼나 다름없는 장동훈 감독이 대작 영화를 찍고 있는 중이라서 예민함이 끝을 달리고 있을 겁니다. 안 그래도 고집스러운 성격인데 지금 오죽하겠어요?”

“본인 영화가 잘 안 나와서 배급사가 타이밍을 못 잡는건데 그걸 이렇게 풀면 안 되죠. 그리고 장동훈 감독... 하...”

송제국 피디도 장동훈 감독을 왜 신경 쓰냐고 말하려다가 관두고 그저 한숨을 쉬었다.

그도 감독들 사이에 얼마나 자존심 싸움이 심한지 알기에 왜 그걸 신경 쓰냐는 말 자체가 말이 안 된다는 걸 아는 거다.

“강 감독 저러는 거 한 두 번 있는 일도 아니고 조금 시간 지나면 풀릴 겁니다. 저희가 잘 풀어서 찍어볼게요.”

“오 감독님. 지금 상황이 좋지 않아요. 이미 일정이 5일이나 지체됐다구요. 그런데 오늘 오전 일정에 반도 진행하지 않고 저렇게 도망쳐버리면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하루에 천만 원씩만 잡아도 벌써 오천만 원이나 오버한 거예요.”

“알죠, 압니다. 그런데 이렇게 닦달하면 강 감독 성격상 더 튕겨나갈거예요. 조금만 기다려봅시다. 네?”

“후...”

결국 울화통을 참지 못한 송제국 피디가 촬영장을 떠나고 나자 오동철 촬영감독은 터덜거리며 홀로 돌아온 조감독에게 다가갔다.

“뭐래?”

“모르겠어요. 그냥 짜증내시면서 현장 가 있으라고만 하셨어요.”

“지금 배우들이랑 스탭들 스탠바이 시켜놓고 감독이 사라지면 어쩌자는 거야? 아, 정말 미치겠네.”

“이러다 오늘 땡치는 거 아닐까요?”

“몰라, 인마...”

오동철 촬영감독이 걱정하는 조감독을 뒤로하고 다시 자리로 돌아오니 촬영팀원 중 하나가 걱정스레 물어왔다.

“감독님 곧 오신답니까?”

“몰라, 인마. 와도 몇 시간은 걸리겠지.”

“아... 장동훈 감독님하게 할 땐 좋았는데...”

장 감독 이야기가 나오자 오동철이 눈을 부라렸다.

“이 새끼가...”

“죄송합니다. 그런데 사실 감독님도 그때 좋았잖습니까. 전 지금까지 오전 10시에 시작해서 7시에 촬영 딱 끝내주는 감독은 처음이었습니다. 야간 촬영만 없으면 완전 직장인이었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그건 장 감독이 이상한 거지. 강석호 감독이 잘못된게 아니야. 사람이 컴퓨터도 아니고 머릿속에 모든 장면이 다 완벽히 짜여져 있는게 말이 돼? 여러 컷을 찍어보고 편집을 해봐야 예상했던 그림대로 장면이 잘 나왔는지 아는 거지.”

“그러고 보면 장동훈 감독이 참 대단하지 않았습니까?”

“새끼야, 너 그딴 소리 현장에서 흘리고 다니지 마. 알아?”

“그럼요. 강 감독님 귀에 들어갔다간... 아휴...”

팀원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리로 돌아간다.

오동철 촬영감독은 씁쓸한 마음에 담배 한가치를 입에 물었다.

“직장인? 씨발, 세상 많이 좋아졌네.”

오동철 촬영감독은 현장 스태프들의 분위기가 예전과는 다르게 점차 바뀌어 가는 걸 느꼈다.

만약 장동훈 감독이 이번 영화도 성공한다면 앞으로 스태프들은 그와 같이 일하기 위해 줄을 서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

대한민국에서 세 손가락안에 꼽는 대형 배급사인 ‘SHOW’의 한 회의실.

회의에는 유지은 팀장이 참석하고 있었다.

유 팀장은 애써 여유로운 표정으로 눈앞의 사람들을 상대하고 있었지만 남모르게 탁상 아래에서 딱딱 손가락을 부딪히고 있는 걸로 보아 무척 긴장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회의실의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는 사람은 40대 중반의 중후한 인상의 남자였다.

구겨진 정장과 풀어헤친 넥타이의 그는 거만한 표정과 자세로 유 팀장의 제안에 회의적인 의견을 피력했다.

“에이... 이러면 곤란하지. 이미 우리 스케줄 다 짰다고. 그리고 아직 촬영 중이라며? 추석 개봉은 힘들지 않겠어?”

유 팀장은 동훈의 당부를 잊지 않고 있었다.

추석은 안 되더라도 무조건 겨울방학 시즌 전에 개봉해야 한다고 했던 걸 말이다.

사실 유 팀장이나 제작사 대표인 박만구 대표 입장에서도 최대한 빨리 개봉해 돈을 벌어들이길 원하고 있었다.

다만 동훈이 적극 밀어붙였던 이유가 명량과 맞상대를 하고 싶지 않아서라는 걸 모를 뿐이었지만 말이다.

“장동훈 감독님이 늦어도 5월 전까지 촬영 마무리하겠다고 하셨어요. 후반 작업 생각해도 8월 전에는 무조건 마무리 됩니다.”

“완성도를 믿을 수 있을까?”

“부장님, 장 감독 전에 프리 프로덕션 없이 중간에 각본 바꿔서 4백만 넘긴 감독이에요. 이번에는 프리 프로덕션 석 달 넘게 꼼꼼하게 진행했고 완벽하게 준비한 작품이에요.”

“그렇긴 한데... 유 팀장도 LS엔터에서 ‘사건의 지평선’의 배급을 추석에 한다는 소문이 도는 거 알지? 그래서 우리도 애니메이션으로 맞상대를 한다는 전략을 세웠거든. 그래서 추석 시즌은 조금 곤란해.”

“하... 너무하시네요. 전 추석에 4백만을 넘겼는데 너무 소극적으로 가시는 거 아니에요?”

“소극적이 아니지. 우린 종목을 영화에서 애니로 바꿨을 뿐이야. 적극적인 맞대응 전략이지. 그리고 추석에 4백만을 넘겼다곤 했지만 결국 승자는 LS엔터에서 내민 애니메이션이었잖아. ‘6급 공무원’이 선전한 건 맞지만 결국 2위였어. 유 팀장도 그건 인정하지?”

맞는 이야기에 그녀도 할 말이 없었다.

“...”

“그리고 솔직히 1분짜리 티저 영상이라도 들고 와서 배급을 해달라 말라 하던가. 하다못해 편집본이라도 들고 와야지, 촬영도 아직 안 끝난 상황이라며? 이게 뭐야?”

유 팀장은 짜증을 폭발시켰다.

“다 찍고 와서 배급해달라고 하면 스케줄 다 찼다고 발 뺄 거잖아욧!”

찔끔한 그가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발을 빼긴 왜 뺀다고 그래? 우리가 왜 돈 버는 일 싫어하겠어?”

“우리가 원하는 시기에 안 넣어줄거니까 그러죠.”

“유 팀장아. 내가 아무리 배급을 조율한다고 하지만 이건 나도 명분이 없어. 나도 씨발 윗대가리들이랑 애들한테 설명을 해야 할 거 아니냐? 추석에 걸치는 시기는 일단 안 돼. 그러니까 조금... 유도리를 발휘해보는게 어때?”

유지은 팀장은 머리를 쓸어올리며 물었다.

“뭐, 어떤 유도리를 말씀하시는 건데요?”

“11월 첫째주부터 둘째주까지 눈에 띄는 작품이 안 보여. 어때?”

“딱 2주? 어떤 이벤트도 없는 비시즌기간이 일단 SHOW에서 제안할 수 있는 최고 좋은 시기라는 거죠?”

“그렇지.”

남자는 어깨를 으쓱하며 더 이상은 협상이 힘들다는 제스쳐를 취했다.

유 팀장은 회의실을 나와 조금은 무거워진 어깨로 촬영장을 찾았다.

그런데 연말 개봉대기작들을 찬찬히 훑어본 동훈은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좋은데요? 생각보다 더 좋은 결과가 나올 수도 있을 것 같아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