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흥행의 신-28화 (28/116)

# 28

불어오는 바람(1)

다시 한 번 자세히 살펴보았다.

감독은 저쪽 차원과 이곳에서도 동시에 감독을 하고 있는 몇 안되는 사람 중에 하나인 김상철 감독이 맞았다.

게다가 가장 핵심 인물이 되는 이순신 역의 주연 역시 저쪽 차원과 같았다.

다만 조연들 상당수가 달라졌을 뿐이다.

영화 ‘명량’은 김영웅 감독이 있는 차원에서 박스오피스 신기록을 놓치지 않았던 작품이다.

무려 1,761만명. 이걸 무슨 수로 이기나?

같이 영화를 만드는 사람에게 있어 저 ‘명량’이라는 영화는 일종의 핵폭탄급 재앙이나 마찬가지였다.

무조건 피해가야 한다는 말이다.

김영웅 감독이 다시 와서 메가폰을 잡는다고 해도 엄두가 안 날 작품이다.

문제는 제작 기간이 끝난 후 개봉 시기가 비슷해질 수밖에 없다는 데에 있었다.

지금이 2월이니 제작 기간을 짧게 둔다고 해도 석 달에서 반년은 걸릴 거다.

후속 작업까지 생각한다면 대작 영화가 노려볼 만한 시기는 딱 두 군데다.

조금 이르면 추석 연휴 시즌과 겨울방학 시즌.

투자자의 상황을 생각해 영화가 잘 나온다면 개봉을 빨리 밀어붙여 투자금을 회수하려고 할 수도 있고 여유가 있어 아예 내년 여름방학 시즌을 볼 수도 있다.

어쨌거나 한 영화의 관객수가 1,700만이나 들면 최소 한 달 정도는 극장가를 휩쓸었다고 봐도 되기에 개봉 시기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면 피를 보게 될 거다.

“오늘 크랭크인인데 왜 그렇게 우울해하세요?”

유 팀장이 고사를 지낼 축원문을 들고 오며 물었다.

“아, 아니에요.”

동훈은 애써 안 좋은 생각을 지워버렸다.

일단 명량이 재앙급이라는 건 혼자 알고 있는 사실이기에 마음먹고 피하려고 하면 못 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김영웅 감독이 있던 곳에서 만들어졌던 명량과 각본이 달라질 가능성도 있다고 봤다.

그것뿐인가?

김영웅 감독이 있던 곳과 이곳의 기술력이나 촬영 기법 등 모든 것이 부족하니 작품의 완성도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었다.

어쩌면 그렇게 무서워하지 않아도 될지 몰랐다.

“뭐 보고 있었는데요?”

“혹시 오늘 크랭크인 한다는 ‘명량’ 이야기 들어보셨어요?”

“그럼요. 알고 있죠. 안 그래도 너무 비슷한 시기에 2백억 대작 영화라고 그래서 찝찝해하던 참이었어요. 그래도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올 추석이나 겨울방학에 ‘사건의 지평선’ 시즌 6가 방영될 거라는 소문이 있거든요. 전 명량인지 하는 것보다 이게 훨씬 더 걱정인데요?”

“아... 그렇긴 하죠.”

‘사건의 지평선’ 시리즈는 애니메이션 최초로 천만 관객을 돌파했던 작품으로 수백 년 후 우주 전쟁에 관한 내용을 그리고 있었다.

당연히 정면 대결은 상상도 하지 말아야 하며 무조건 피해야 하는 작품이다.

“백억 이상 작품 중에 대박 터진 작품 많지 않잖아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러니 얼른 나오세요. 다들 감독님만 기다리고 있어요.”

충무로의 허름한 골목 앞에 연예인들이 타고 다니는 밴 차량들이 줄지어 주차되어 있었다.

기자들도 몇 명 와 있다고 들었다.

“네, 가시죠.”

건물 2층 공실에 돼지머리를 비롯한 각종 고사재료들을 올려놓은 모습이 꽤나 그럴듯했다.

“오셨어요?”

“오셨습니까?”

동훈이 모습을 비추니 다들 인사하며 반겼다.

그중에서 가장 눈을 사로잡는 이는 단연 이현재다.

180이 넘는 큰 키에 작은 얼굴, 남자다움이 물씬 풍기는 마스크는 남자가 봐도 반할 것 같았다.

만면에 웃음을 띠고 여유롭게 고사를 준비하는 그는 누가 보더라도 이 자리에 주인공이라고 여길만했다.

두 번째로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이는 다름 아닌 은정이었다.

옷은 수수하게 차려입고 왔지만 S컬 펌 헤어와 풀메이크업을 보면 분명 아침부터 부산하게 미용실을 들렀다가 온 것이 분명하다.

그 외에도 윤슬기를 비롯한 주조연 배우들과 그들을 따라온 소속사 식구들, 그리고 각 스태프들이 좁은 공간에 빼곡히 들어와 북적여 댔다.

“좀 웃어 주세요. 이현재님, 여기 좀 봐주세요.”

당연히 기자들은 이 현장을 바쁘게 찍고 있었다.

“여기요.”

동훈은 유지은 팀장이 건네준 축문을 들고 돼지머리 앞에 섰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던 배우와 스태프들이 하던 말을 멈추고 동훈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오늘 ‘새로운 세계’의 스태프와 배우들이 신령님께 엎드려 고합니다. 제작사 ‘영화 세상’과 투자사 ‘화앤누리 벤쳐투자’, 이렇게 두 회사가 손을 맞잡아 세상에 새로운 작품을 내놓게 되었습니다. 전 스태프가 밤잠을 못 자고 정성들여 준비한 작품이오니 아무쪼록 여기 준비한 음식을 부족하다 하지 마시고 드시어 저희들의 작은 바람을 이루어주시길 기원하나이다.

카메라, 조명기에 붙어사는 조명 귀신, 운전대에서 스태프들을 노리는 졸음 악귀, 스태프 간 우정을 해치는 불화 귀신, 촬영장을 떠도는 온갖 잡귀와 지박령들 얼씬도 못 하게, 썩 물리쳐 주옵소서.

비옵니다. 천치 신령들께 비옵니다.”

“천지 신령들께 비옵니다.”

동훈은 지갑에서 미리 준비한 백만 원짜리 수표 하나를 꺼내 돼지 입에 물려주었다.

“오오! 백만 원!”

“우리 감독님 통 크네!”

다들 통 큰 액수에 입이 벌어졌다.

동훈은 절하고 일어나 한마디 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7백만만 부탁드립니다.”

“하하하!”

“이왕이면 천만이라고 하시죠!”

동훈이 물러나고 주연배우인 이현재가 돼지머리에 십만 원짜리 수표 몇 장을 꽂았다.

그는 특유의 묵직하고 카리스마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대로 된 남자 영화 한번 만들어 보겠습니다. 화끈하게 천만 기원합니다!”

“하하하!”

“진짜 남자네!”

이 자리에 있는 그 어느 누구도 그의 바람이 진짜로 이루어질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현재도 농담으로 한 말일 테니 말이다.

그런데 이현재가 절을 하고 물러나자 그다음 나서야 사람이 나서지 않고 있었다.

거의 주연이나 마찬가지인 황정훈이 주춤거리며 눈치를 보고 있었던 탓이다.

영화계에 처음 발을 들이는 자신이 이 자리에서 배우 중 두 번째로 나선다는 게 말이 안 된다는 듯 자신을 떠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 사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황정훈 씨, 어서 나오세요. 빨리요.”

결국 동훈이 콕 찍어서 지정하자 결국 못 이겨서 나오는데 평소보다 얼굴이 더 빨개져 있었다.

그는 지갑에서 오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 돼지 입에다 물려주고는 제법 큰 목소리로 말했다.

“천지 신령님! 잘 부탁드립니다!”

짧고 간결한 말이었지만 십년 넘게 연극배우로 다져진 발성 때문에 넓지 않은 실내에 쩌렁쩌렁 울렸다.

진짜 배우는 목소리만 가지고도 포스를 보인다.

목소리, 특히 발성이 좋지 못한 배우는 절대 좋은 배우가 될 수 없다는 걸 이 자리 그 누구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저 사람이 이번에 오디션에서 뽑혔다는 그 사람인가?”

“경쟁률이 얼마였던지 기억해?”

기자들은 황정훈의 목소리에 담긴 포스를 느끼진 못했지만, 이현재에 이어 두 번째로 나섰다는 것만으로도 기삿거리를 찾은 것이기에 열심히 사진을 찍어댔다.

이어 투자사와 주요 스태프, 주조연 배우 몇이 절을 하고 난 다음 오늘 고사의 또다른 주인공인 두 여배우의 차례가 되었다.

아이돌부터 스타였던 윤슬기는 그 서 있는 것만으로도 그림 같은 자태를 연출하고 있었지만, 신은정의 옆에 서 있으니 그 빛이 조금 바래보였다.

은정이 슬기보다 더 예뻐서냐 아니냐를 떠나서 새로운 마스크인 은정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게 되니 자연스럽게 시선이 돌아가기 때문이었다.

윤슬기 역시 이를 의식했는지 시종일관 천사 같은 미소를 잃지 않으며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마 저렇게 계속 똑같은 표정으로 웃고 있다가는 집에 돌아갈 때쯤이면 입가에 경련이 일지 않을까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걸그룹 출신이라 어쩌면 익숙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우리 영화 대박나게 해주세요.”

윤슬기가 절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데 언제 와 있었는지 고은숙 대표가 말을 걸어왔다.

“너무 바쁘신거 아니에요?”

“아, 제가요?”

“네. 제작사에 연락을 해도 통 연결이 안 되시던데.”

고 대표에게 연락이 온 건 알고 있었다.

물론 따로 연락을 취하진 않았다.

만나지 않아도 어떤 이야기를 해 올지 대충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보나마나 윤슬기의 연기가 부족해도 분량을 줄이지 말아 달라고 하는 걸 꺼다.

“준비할 게 많아서요. 밥 먹을 시간도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고기라도 대접해드리려고 했는데요.”

“아유, 그거 먹다 체하면 더 고생해요.”

동훈이 말을 안 받아주자 고 대표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진짜 하고싶은 말을 시작했다.

“주주들이 이번 작품에 대해 많이 기대하고 있어요. 결과가 좋다면 윤슬기나 우리에게 있어 제 2의 도약이라고도 할 수 있죠. 감독님에게도 결코 나쁘지 않은 결과일 거예요. 슬기의 팬덤은 상상 이상으로 크고 구매력이 높으니까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째 저보다 윤슬기 씨의 연기력을 못 믿으시나 봅니다?”

고 대표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런가요? 오디션 끝나고 회사에 엄포를 하신 분치고 의외네요?”

“이미 벌려진 판이니 어쩌겠습니까? 잘 해주길 바라야죠.”

“솔직히 궁금했어요. 슬기가 캐스팅 되기 전에 이현재와 캐스팅 논의가 되고 있던 상황이었다면서요? 그럼 투자를 위해서 슬기를 캐스팅한 것도 아닌데 연기는 굉장히 빡빡하게 보시고... 감독님 성향상으로는 작품성을 굉장히 신경 쓰시는 분인 것 같은데 왜 슬기를 캐스팅 했을까. 제 경험상으로 흥행만을 생각하는 감독이면 이렇게까지 배우를 압박하지 않거든요. 적당히 잘 타이르고 넘어가지. 아무리 생각해도 감독님의 생각을 잘 모르겠어요.”

“그냥 욕심인 겁니다.”

“욕심이요?”

“네. 관객을 최대한 많이 받아야 한다는 욕심인거죠.”

“아... 이보다 더 긍정적일 수가 없네요. 사실 돈보다 중요한 건 없으니까요.”

고 대표는 만족한 표정으로 미소짓다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다음 작품은 어느 제작사와 같이 하실 건가요?”

“으흠... 그런 질문은 이번 작품이 잘 되는지를 보고 판단하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남들보다 한 발 빠르게. 그게 내 경영 철학이에요.”

연예계에서 그녀의 위치라면 저런 자신감은 보일 만했다.

다만 그녀는 낚시 바늘을 잘 못 던졌을 뿐이다.

동훈은 그녀가 낚을 수 없는 곳에서 있었다.

“다음 작품은 DH미디어에서 선보일 겁니다.”

“DH미디어? 그게 어디죠?”

동훈은 대답 대신 미소만 지어 보였다.

고 대표는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동훈이 받은 계약금을 모두 털어서 준비 중인 영화제작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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