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흥행의 신-27화 (27/116)

# 27

장동훈 사단(3)

순간적으로 딱 떠오르지 않는 걸 보면 근래에 만난 사람은 아닌...

“어?”

생각났다.

김영웅 감독의 후배이자 두 번의 천만영화를 만들어냈던 유명진 감독.

많은 명작을 만들어냈던 그가 이곳에서는 싸구려 에로영화를 만들고 있을 줄이야...

“성함이...?”

“아, 장동훈입니다.”

“장동훈? ‘6급 공무원’의 장동훈?”

“네. 제가 그 장동훈이에요.”

“이야~ 반갑습니다. 유명진이라고 합니다.”

처음에 건방진 자세는 어디로 가고 90도로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한다.

요즘 영화계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장동훈 감독을 모른다면 이 바닥에서 간첩이나 다를바 없긴 한데 그 태도가 조금 의외이긴 했다.

“저도 반가워요.”

작은 키에 수북한 곱슬머리는 김영웅 감독이 있던 곳과 변함이 없었다.

지금이면 아직 서른도 채 되지 않았을 젊은 나이라서 자신 보다 어릴 게 분명했다.

그는 악수하고 나서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아유~ 우리 강현수 촬영감독 님은 내 보물인데, 이거 막 빼가면 상도의가 아닌데요?”

“촬영 이달 말까지라면서요?”

“아니 뭐 그렇긴 한데... 하하하!”

동훈은 현수에게 고개를 돌렸다.

“형, 나랑 같이해요. 다른 감독들은 몰라도 난 형이 뭘 원하는지 알고 있어.”

“알고 있다고?”

“아마 같이 일해보면 내가 하는 말이 진짜라는 걸 알게 될 거예요. 그리고 계속 에로영화 찍을 거예요?”

다른 무엇보다 본인 스스로의 실력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을 그가 에로영화를 찍는다는 게 자존심이 무척 상할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과 맞는 사람이 없어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겠지만, 상업영화를 통해 자신의 실력을 뽐내고 싶을게 분명했다.

역시나 현수의 눈빛이 흔들렸다.

“언제부터 들어가는데?”

“캐스팅 끝내고 투자받았어요. 프리 프로덕션 들어갈 거예요.”

“파이낸싱이 끝났다고? 벌써?”

“이현재가 캐스팅됐거든요.”

“아...”

현수는 이현재가 캐스팅됐다는 말에 어떻게 투자가 됐는지 단번에 이해했다.

“하실 거죠?”

“번호 알려줄 테니까 회사에 계약조건 문자로 보내라고 해.”

그가 쉽게 허락한 건 영화의 규모가 커서가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걸 마음껏 펼칠 수 있다는 생각에서일 거다.

유명진 감독이 옆에 있다가 강현수 촬영 감독에게 축하의 말을 건넸다.

“축하합니다. 내가 우리 감독님 여기에 있을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지. 그래도 좋은 구경 많이 했으니까 불만 없죠?”

유명진 감독의 익살스러운 말에 현수가 빙그레 웃음 지었다.

“감독님 아니었으면 폐인 됐을 겁니다. 그래도 이렇게 나와서 일할 기회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감사는 무슨... 내가 감사해야죠. 그나저나 큰일이네. 우리 예쁜이들 현수 감독님만큼 예쁘게 잡아줄 수 있는 사람이 없는데 이걸 어쩌나?”

그가 아쉬운 표정으로 투덜거릴 때 동훈은 그에게 상업영화에 도전하실 생각은 없냐고 물어보려고 하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그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는데 섣불리 그런 얘기를 꺼내는 것 자체가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오늘은 강현수 촬영감독을 성공적으로 스카웃 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유명진 감독이 주변을 슬쩍 돌아보곤 목소리를 낮게 깔며 입을 열었다.

“감독님, 말씀 끝나셨으면 저랑 잠시 이야기 좀...”

“아, 네. 그럼요. 어디로 갈까요?”

“아니 뭐 사람 없는데로...”

그는 동훈의 팔을 잡아끌고 아무도 없는 모텔 비상구로 이끌었다.

강현수 감독도 두고 조감독인 경수도 없이 단둘이 남았을 때 그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다름 아니라 촬영감독 말고 다른 스탭은 구할 생각 없으십니까?”

“네? 아... 사실 연출부가 아직 다 구성된 게 아니긴 한데 하필 조감독은 이미 계약이 된 상태라...”

“스크립터는요?”

스크립터는 카메라에 찍히는 모든 과정과 진행 과정을 기록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촬영에 들어가면 영화 시작부터 끝부분까지 순서대로 찍지 않는다.

촬영 일정에 맞춰 중간 부분부터 촬영에 들어갔다가 마지막 날에 첫 씬을 찍을 수도 있다.

그렇게 뒤죽박죽된 씬을 모두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도록 정리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바로 스크립터다.

어찌 보면 굉장히 중요한 일이면서도 감독이 하는 일을 그저 보조해주는 역할이라고 봐도 됐다.

“스크립터요? 감독님이 스크립터를 하기에는...”

아무리 에로영화라고 하지만 스탭을 지휘하며 영화를 제작하던 감독이 일개 스크립터로 일하기에는 부족하지 않냐는 물음에 그가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언제까지 에로영화만 찍을 수 없잖아요?”

딱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그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왜 여태껏 에로영화만 찍고 있었는지...

그는 김영웅 감독이 있던 곳에서 데뷔할 때부터 천재적인 감각으로 단번에 주목할만한 충무로의 스타로 떠올랐었다.

그랬던 그의 인생에 어떤 변환점이 생겼기에 에로영화를 하고 있었을까?

세연이처럼 아예 다른 직업이면 모르겠지만 영화감독이라면 분명 영화에 대한 갈망이 있었을 테니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맞는 말씀이에요. 당연하죠. 그런데... 어쩌다 에로영화를 찍게 되셨어요?”

“실은 제가 대학생 때 돈이 많이 부족했어요. 솔직히 말하면 더럽게 가난했죠. 그런데 그때 한 영화사에서 에로영화 공모전을 열더라구요. 상금이 천만 원이길래 그거에 욕심나서 단편으로 출품을 했는데 거기서 대상을 받았지 뭡니까.”

“아...”

이 지랄 맞은 재능충 같으니라구...

“단편이라 장비는 6mm 카메라랑 조명 몇 개 대여하면 끝이겠지만 배우는 어떻게 섭외했어요?”

“큼... 웨이터 알바하는 친구한테 아가씨들 소개 좀 해달라고 했는데 마침 마음에 맞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랑 상금 나누기로 하고 찍었죠. 그 친구 지금 일 때려치우고 배우하고 있는데 지금도 저한테 고마워합니다. 헤헤...”

사실 같이 해주기만 한다면 천군만마를 얻은 것과 다를 바 없을 거다.

그의 영화는 재기발랄하고 톡톡 튀었다.

그와 함께 스크립트를 만지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에게도 도움이 되겠지만 분명 자신에게도 도움이 되는 게 많을 거라고 생각했다.

“대단하네요. 확실히 재능이 있으시겠어요.”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학교 다닐 때만 해도 교수님들이나 친구들이 다 저더러 사고 한번 제대로 칠 거라고 말했었어요. 하하하! 뭐, 다른 쪽으로 사고를 치긴 했지만. 이제는 쪽팔려서 동창회도 안 나갑니다.”

그의 사정이 이해가 갔다.

“그럼 다시 시작하셔야겠군요.”

“만약 감독님하고 같이 작업해서 저에게 제대로 된 상업영화를 배울 기회가 되면 나중에 제가 연출봉을 잡을 수 있을까요?”

어쩌면 그가 가장 묻고 싶었던 건 바로 이거일지도 몰랐다.

그저 스크립터만으로 끝나는 결말은 결코 원하지 않을 거다.

그는 지금 자신만의 도박을 시작한 거나 다름없었다.

역량 있는 감독 밑에서 시작한다면 단기간에 빠르게 성장할 수 있을 테니까.

“재능이 있다면 충분히 가능하겠죠. 일단 이번엔 스크립터로 계약을 하고 저와 일을 해보면서 차츰 일을 익혀보시죠.”

“그럼 제작사에 다음 영화는 포기한다고 확실히 정리한 다음에 참여하겠다고 연락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래요, 이야기 잘 해봐요.”

그는 다시 한번 허리를 숙였다.

모텔을 나오며 근처 식당을 찾으니 경수가 배를 만지며 투덜거렸다.

“아, 배고파.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가요? 에로영화나 찍던 사람인데? 저 사람 소문도 안 좋던데...”

“이유가 있으니까 온 거야.”

투덜거리는 경수를 보며 생각을 굳혔다.

경수는 몇 번이나 주의를 줬는데도 불구하고 본래 성격인지 말을 함부로 내뱉고는 한다.

사실 경수는 영화 제작에 센스가 있어 데리고는 있지만 어쩔 수 없이 안철호 감독의 사람이다.

지금이야 안 감독이 잠수를 타고 안 돌아온다고 하지만 언젠가 모습을 드러내면 결국 다시 그를 따라갈 수밖에 없을 거다.

이번에는 마땅한 인재가 없어 경수와 같이하지만, 다음번에는 유명진 감독, 아니 이제는 그냥 유명진과 같이하는 게 나았다.

며칠 뒤, 제작사에 유명진 감독이 제작에 참여하겠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전해왔다.

물론 강현수 촬영감독도 함께였다.

현재 촬영하는 영화만 끝내고 합류하겠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동훈은 뛸 뜻이 기뻤다.

영화를 만드는 건 축구를 하는 것과 같다.

감독하나만 뛰어나다고 좋은 영화가 만들어지는 건 결코 아니다.

선수도 좋아야 하고 코치도 훌륭해야 한다.

그렇게 손발이 맞는 최고의 감독과 그 스탭들을 누구누구의 사단이라고 표현한다.

저 둘은 후에 장동훈 사단의 대표적인 인물이 될 거라고 확신했다.

조명과 미술감독을 비롯한 각 스태프들은 유지은 팀장의 추천으로 진행했다.

추천하고 싶은 사람은 있었지만 이미 그 사람들은 다른 작품을 하고 있었기에 이번에는 포기하기로 했다.

제작사에서 스태프들과 계약을 마무리하고 난 뒤, 근 넉 달에 걸쳐 프리 프로덕션을 진행했다.

조감독이 작성한 헌팅 리스트를 검토하고 답사를 진행했으며 콘티를 작성하고 세트장을 만들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손이 꽁꽁 얼어붙는 영화 10도의 2월 3일, 영화 ‘새로운 세계’ 크랭크인이 열렸다.

이 의미 있는 날에 장동훈은 홀로 머리를 붙잡으며 욕설을 내뱉었다.

“하... 시팔 좆됐어.”

그의 정면 컴퓨터 모니터에 뜬 기사는 이랬다.

[2백억 대작 ‘명량’ 오늘 크랭크인]

“저걸 어떻게 피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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