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흥행의 신-26화 (26/116)

# 26

장동훈 사단(2)

하루 뒤, 충무로의 작은 사무실에 동훈과 경수, 유 팀장이 다시 모였다.

유지은 팀장은 동훈의 눈치를 조심스럽게 보며 입을 열었다.

“알아봤는데요, 감독님. 스태프 구성은 감독의 권한이라 어지간해서는 스태프 구성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요. 그래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는게 많은 돈이 투자되는 영화에요. 아시다시피 100억 들어오기로 결정 났고 거기에 맞춰 잡아야 하는데 경력이 많지 않은 스태프... 특히 촬영감독은 영화 제작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잖아요?”

“그렇죠.”

“지금까지 상업영화 딱 네 편 작업했더라구요. 나이도 많지 않고.”

강현수 촬영감독이 가장 최근에 작업했던 ‘사랑하는 그대와’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던 단편영화였다.

그래서 유 팀장이 처음에 잘 떠올리지 못했던 것인데 그래도 짬밥이 있는 건지 단편영화의 촬영감독까지 알고 있어 내심 놀랐다.

“그렇게 따지면 저도 어리죠. 강현수 감독님이 저보다 세 살 정도 많은 걸로 알고 있는데.”

“그렇긴 하지만...”

유 팀장의 걱정도 이해가 가긴 했다.

촬영기술은 나이가 들수록 노련해지고 완숙해진다는 게 이 바닥의 일반적인 생각 때문이다.

반면 동훈은 달랐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저들과 비슷한 생각이었지만 이제는 달라졌다고 해야 맞겠다.

세월이 지난 명작 영화를 보며 배웠던 기법들은 낡았다는 걸 인정하지 못했을 뿐이다.

더 새롭고, 감각적인 기법이 관객들의 눈을 사로잡을 수 있다는 걸 실제 김영웅 감독의 인생으로 배웠기 때문이다.

“걱정하시는 게 어떤 건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형 정말 실력 괜찮아요.”

“정말 괜찮은 실력이면 왜 다른 제작사나 감독들이 그분을 찾지 않았던 거죠?”

충분히 일리있는 물음이다.

“조금... 성격이 독특하다고 해야 하나?”

“어떻게요?”

“자기보다 모른다고 생각하면 감독이라고 해도 무시하는 게 있거든요.”

“감독한테두요? 허... 미친거 아니에요?”

“사실 저도 오동철 감독님한테 무시당했었잖아요?”

“아니, 그거야...”

괜히 동훈의 학벌 이야기를 건드렸다고 생각했는지 유 팀장은 말을 얼버무렸다.

영화나 드라마 스탭들 어느누구를 봐도 현장에서 허허 웃으며 하라는대로 다 하는 스탭은 없다.

다들 자신만의 주관이 확실하고 아니다 싶으면 물러서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는 일종의 기싸움이기도 하다.

한번 약하게 보이는 순간 현장에서 완전히 무시당하며 속칭 호구가 잡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리 감독이라고 해도 밑의 스탭들에게 약한 모습이나 실력이 부족함을 드러내면 안되기에 성격이 더러운 것 정도로는 나쁜 감독이라고 하지 않는다.

“잡아만 주세요. 분명 기대 이상일 겁니다.”

강현수 감독의 특이한 성격은 당시 봤을때는 그저 자기만의 세계에 갇힌 아웃사이더 같았지만 이제 와서 그 작품들을 다시 보면 분명 다른 감독들의 작품들과는 달랐다.

잔재주를 부리지 않는 선명하고 간결한 카메라워크는 요즘 나오는 영화들에 비해 분명 수준이 높았다.

본인도 그걸 확신했음이 틀림없다.

그렇기에 자신이 그리는 최적의 동선과 구도가 틀리다고 하면 상대방을 무시하게 된 것이다.

물론 그 성격이 올바르다는 건 아니지만 분명 그의 실력만큼은 국내 최고 수준이라고 생각했다.

“후... 모르겠어요. 일단 지금 작품 촬영 중에 있대요.”

“작품요? 무슨 작품이요?”

“에로영화요.”

아이고야...

이래서 유 팀장이 더 거부하고 싶었던 거다.

일반적인 상업영화나 단편영화도 아니고 에로영화를 작업하는 사람과 같이 한다는게 마음에 걸리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할 거다.

“아... 요즘 그거 찍고 있나 보네요. 어디서 찍는지는 아세요?”

반명 동훈은 에로영화를 찍는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지 않았다.

그 사람성격이면 빠르게 해치우고 적당히 돈을 받는 에로영화가 스트레스는 덜 받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동훈도 조감독을 하기 전에 에로영화에 잠깐 몸을 담았던 적도 있었다.

“찾아가시려구요?”

“아무래도 팀장님이 가시기는 그러니까 제가 가야죠. 제가 직접 가야 이야기가 통할 겁니다.”

유 팀장은 번호가 적힌 메모지 하나를 건넸다.

“일단 이 번호가 제작사 연락처에요. 거기에 물어보면 촬영일정이랑 장소 알 수 있을 거예요.”

“고마워요.”

“후... 이거 잘하는 건지 정말 모르겠네요.”

유 팀장은 울상이 되어 있었지만, 동훈은 나중에 가면 그녀가 분명 후회할 거라 확신했다.

동훈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경수의 어깨를 툭 쳤다.

“가자.”

“지금요?”

“그럼 하루라도 빨리 가야지. 시간이 남냐?”

“아, 네. 알겠습니다.”

“일단 여기 이 번호 전화해서 촬영장 주소 받아.”

“넵.”

이때 유 팀장이 차 키 하나를 내밀었다.

“이거 타세요.”

“이거 뭡니까?”

“회사에서 감독님 움직이시는데 불편하지 마시라고 법인차 하나 드리는거예요. 촬영 끝날때까지 편하게 쓰시면 되요. 그리고 이건 식사랑 주유하실 법인카드구요.”

“오오...”

생전 처음 받아보는 법인카드에 이제 정말로 다른 인생을 살게 됐다는 느낌이 들었다.

“대신 그걸로 술드시면 안됩니다.”

“하하, 술은 제 돈으로 사먹겠습니다.”

회사 주차장에 세워진 차는 연식이 조금 된 검은색 그랜져였다.

보통 봉고차를 운전하며 현장을 누볐는지라 그랜져를 운전하는덴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렇게 차를 몰고 한 시간여를 운전한 끝에 도착한 곳은 경기도 외곽한 한 모텔.

주변이 한적하고 경치가 좋아 은근히 손님이 많을 것 같았다.

“근처에 맛있는 음식점도 많은데 식사는 어떻게...”

“인마, 사람 데리러 왔으면 그 사람 데리고 밥을 먹을 생각을 해야지. 그 친구가 못 먹을 상황이면 우리끼리 먹겠지만.”

“아, 넵. 잘 알겠습니다.”

모텔은 멀리서 볼 땐 괜찮아 보였지만 가까이 다가가니 오래된 티가 나 보였다.

“계십니까?”

조그마하게 나 있는 카운터에 얼굴을 내미니 나이가 지긋하신 할머님과 눈을 마주칠 수 있었다.

“쉬고 가시게?”

“그건 아니구요. 혹시 여기서 오늘 촬영 있지 않나요?”

“아... 영화촬영 일행인가? 206호로 가봐. 거참 시끄러워 죽겄데. 그런데 진짜로 거시기 하는 건 아니지?”

손을 휘저으며 말하는 폼이 아주 질색하는 것 같았지만 어째 눈빛에는 호기심이 가득해보였다.

“아하, 촬영이에요. 촬영. 하하, 감사합니다.”

노파가 말한 거시기야 뻔했다.

아마 아침부터 지금까지 내도록 그것(?)을 촬영했을테니 노파가 저리 말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노파가 말한 206호에 가까이 가자 멀리서부터 조금 수다스러운 감독의 디렉팅 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더 격정적으로 해보라고. 짐승같이, 와앙! 잡아먹을 것처럼... 막, 이렇게 막... 내 말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돼? 손을 거칠게 움켜잡으란 말이야. 이렇게, 막 이런 식으로...”

“감독 오빠 나 배고파.”

“감독 오빠가 아니라 감독님. 따라해봐 감독님.”

“감독님.”

“그래, 그리고 나도 배고파. 원래 말 많이 하는 사람이 더 배고픈 법이다? 조금 있으면 점심시간이니까 제발 이번 한번에 가자. 응?”

“씬 4-7 찍습니다. 태호형 스탠바이 해주시고 분장팀 나가주세요. 아유, 거기! 만석이형! 형은 나가야죠. 감독님하고 촬영감독님만 빼고 다 나가세요. 만석이형! 쫌!”

상황을 잠시 지켜보니 조금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일단 촬영 방해하면 안 되니까 들어가지 말고 잠깐 계단에 앉아 기다리자.”

“끝날때까지요?”

“응. 오래 안 가. 식사 안 먹었다니까 금방 끝날거야.”

“진짜요?”

경수는 에로영화를 찍어본 적이 없기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206호 언저리를 힐끔거리며 쳐다보았다.

“일반 상업영화야 여러 컷을 찍으니까 오래 걸리지만 에로영화는 오래 안 찍어.”

“왜요?”

“야, 너 에로영화 보면서 스토리나 영상미를 신경 쓰냐? 오로지 목적은 야한 씬. 그거 하나 아니야?”

“전 개인적으로 스토리가 있는 동영상을 좋아하긴 하는데 가장 핵심이 그 씬인건 맞죠.”

“그럼 그 씬을 제외한 나머지는 대충 찍는거야. 어차피 에로영화 보는 사람들은 보고 또 보고 하지 않아. 한번 보고 다른 영화를 또 찾지.”

“하긴...”

“그러니 빨리 찍어서 계속 새로운 작품을 내는 거야. 빨리 찍어야 제작비도 덜 드기도 하고. 그리고 결정적으로 에로영화 하는 사람들은 식사시간은 칼같이 지키거든. 이상하게 졸라 배고파.”

그렇게 경수와 에로영화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어느새 206호에서 부산스러운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종민아! 또 한솥도시락이야? 나 지겨워 죽겠다!”

“감독님 어쩔 수 없어요. 그래도 감독님은 백합도시락으로 특별히 챙겼습니다.”

“백합보다 돈까스 도련님이 더 맛있는데...”

저런 잡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현장이 적당히 마무리 된 듯 싶어 얼른 206호로 다가갔다.

역시나, 방 구석 한편에 도시락을 받아 챙기는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현수 형!”

“어?”

동훈이 손을 흔들며 나오라고 하자 그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도시락을 들고 206호를 나왔다.

“형, 오랜만이에요.”

“이야... 장동훈이. 이게 몇 년만이야?”

“한 4년 됐나?”

“반갑다. 요즘 뉴스 봤어. 더럽게 잘 나가던데?”

“하하, 고마워요. 운이 좋았죠.”

“마음에도 없는 겸손 떨지마. 영화 잘 나왔더라.”

그 누구에게도 결코 빈말을 하지 않는 그였기에 그 칭찬이 더 기쁘게 들렸다.

“고마워요.”

“그런데 여기는 어떻게 알고 왔어?”

“제작사에 전화해서 현장 주소 받았어요. 형 보려고.”

“날 왜?”

“저 촬영감독 찾고 있어요. 형, 저랑 같이 작업할래요?”

동훈의 제안이 너무 뜻밖이었는지 현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강현수 뒤로 누군가의 얼굴이 툭 튀어나왔다.

“지금 스카웃하는 거야? 누구 마음대로?”

동훈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사람의 얼굴이 굉장히 낯이 익다는 걸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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