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
오디션(3)
고은숙 대표의 미간에 팍 주름이 생겼다.
“모든 활동을 빠짐없이 해야 한다면 개봉시기에 스케줄을 아예 잡지 말라는 말이 아닌가요?”
“다른 스케줄과 병행한다면 어렵겠죠.”
“아직 크랭크인도 안 들어갔어요. 촬영일정도 아직 안 나왔고 편집이 끝날 때까지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릴지도 몰라요. 그 뿐인가요? 배급사도 안 정해졌으니 배급사에서 개봉 시기를 언제로 잡을지는 그 누구도 모르는데...”
“모르고 말씀드린 거 아닙니다.”
“감독님, 너무하신 거 아니세요? 우리 슬기 지금 당장 미니시리즈 주연 캐스팅까지 오는 애에요. 내가 이 위치에서 거짓말한다고 생각해요?”
“거짓말이 아닐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도 윤슬기 씨가 그 정도 스타성이 있다고 생각했구요.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연기력만 받쳐준다면 제가 대표님께 캐스팅 좀 허락해달라고 간청했을 겁니다.”
“말이 빙빙 도는데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가 그게 아닌거 알잖아요?”
“죄송하지만 여기까지가 제가 드릴 수 있는 최선입니다. 어렵다면 저도 여기서 포기할 수밖에 없구요.”
고은숙 대표는 고개를 윤슬기에게 돌렸다.
계속 표정이 좋지 않았던 윤슬기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 모습에 고은숙 대표가 입을 열었다.
“후... 알겠어요. 그럼 말씀드렸던 배역으로 슬기가 캐스팅 된걸로 알고 있을게요.”
역시나 윤슬기가 포기하지 않을 줄 알았다.
소문이 진짜였던 거다.
“오디션 끝나고 제작사에서 계약서 진행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할게요. 만나서 반가웠어요.”
서로간에 합의가 되긴 했지만, 고은숙 대표는 기분이 많이 상한 게 분명했다.
보통 이런 경우라면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며 친분을 다지기 위해 시간을 보냈을 텐데 고 대표는 미련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오늘 즐거웠어요.”
가게를 나오는데 현주가 슬쩍 다가오더니 말했다.
“배짱이 대단하네요? 우리 대표님 어디 가서 맞고 다니시는 분 아닌데, 오늘 제대로 기선제압하던데요?”
“대표님 듣고 계시지 않아요?”
“들어도 뭐라 안 하실 거예요.”
안하무인 톱스타의 전형을 눈앞에서 보는 것 같았다.
그녀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어왔지만, 지금까지 언감생심 그녀 정도되는 톱스타와 일한 적이 없었는데 확실히 소문이 실제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아... 네.”
“그런데 아까 말했듯이 우리 대표님 한번 신세지면 꼭 갚는 스타일이에요. 그게 좋은 쪽이든 안 좋은 쪽이든. 그러니 좋은 결과 있기를 바랄게요. 저 아줌마 속이 나보다 더 좁아.”
마지막 문장은 속삭여서 말했는데 고 대표의 표정을 보니 현주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 것 같다는 듯 험상궂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쨌거나 그렇게 미팅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유지은 팀장이 걱정스레 물었다.
“연기가 그렇게 걱정되면 차라리 안 받는 게 낫지 않았을까요? 윤슬기 때문에 투자받는 게 훨씬 쉬워지긴 했지만, 윤슬기가 없다고 해도 투자 받는 건 크게 문제될 것 없었거든요. 이현재 캐스팅도 순조롭게 진행중이고... 이현재만 캐스팅 확정되면 백억까지도 문제 없이 끌어낼 수 있어요.”
“꼭 돈뿐만은 아니었어요. 기본적으로 윤슬기가 가진 팬덤이 있으니까 그걸 최대한도로 활용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연기가 마음에 안 들면 정말 깔 꺼에요?”
“에이... 어떻게 그래요?”
중소형 기획사도 아니고 국내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을 만큼 대형 기획사가 바로 WAS엔터테인먼트다.
그곳과 척지고 영화를 찍는다는 건 차, 포 떼고 장기를 두는 것과 같다.
국내 최고의 명성을 지니게 돼 제발 캐스팅 좀 해달라고 애원할 정도의 명성이 생긴다면 모를까, 벌써부터 그러면 자신감이 아니라 객기일 뿐이다.
“그럼요?”
“최대한 연기를 잘하게끔 도와줘야죠.”
김영웅 감독에게서 얻은 지식은 영화의 스토리만이 아니다.
연출의 방법과 편집능력, 배우의 연기 지도까지 정말 많은 지식을 받았다.
“가능할까요?”
“세상에 발연기 배우가 한 둘인가요? 최고의 배우들만 데리고 영화를 찍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세상사는게 다 마음대로만 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발연기가 문제라면 제가 도와주면서 찍어야죠. 그래도 앉은 자리에서 경고를 했으니 어중간하게 연습해 오지는 않을 겁니다.”
“음... 그래도 걱정되긴 하네요. 워낙 소문이 무서운 친구라...”
유지은 팀장은 웃음기를 머금었지만 그래도 우려되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일반인들은 모르지만 연예계 내부 관계자들 사이에선 이전에 윤슬기가 미니시리즈 주연으로 발탁 돼 대본리딩까지 갔다가 작가에게 까였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드라마쪽 최고 작가라서 그런지 윤슬기를 까고 나서도 WAS엔터에서 찍소리도 못했다고 하던가?
기자들은 윤슬기의 건강이 안 좋아 피치 못하게 하차하게 됐다고 기사를 썼지만 이미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내용이었다.
“두고 보면 알겠죠.”
유 팀장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화제를 돌렸다.
“아, 대표님께서 감독님한테 러닝게런티 못 드려서 죄송하다고 보너스 책정하셨어요. 내일 중으로 입금될 거예요.”
어제까지 ‘6급 공무원’의 관객수는 425만이었다고 전해들었다.
손익분기점을 한참이나 넘었기에 제작사는 투자자에게 이익을 돌려주고도 상당한 이익을 남겼을 거다.
“와... 생각지도 못했는데, 고맙다고 전해주세요.”
이곳은 김영웅 감독이 있던 차원의 일본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감독에 대한 처우가 좋은 편은 아니다.
러닝게런티 계약을 한다고 해도 감독이 가져가는 지분은 오히려 주연배우보다 낮은 경우도 많았다.
반면 애니메이션이 잘 나가다보니 애니메이션 감독은 영화감독보다 더 많은 수익을 가져갈 수 있게끔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제 신인감독이 아니게 되서 다음 영화에는 러닝게런티를 받는 계약으로 바뀌었지만 그래도 김영웅 감독이 있던 곳에 비하면 적은 비율이긴 했다.
저쪽 차원의 재밌는 이야기들을 이곳에 많이 보여주게 된다면 그때는 영화시장이 애니메이션 시장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넘으면 좋고 아니라도 상관없었다.
그저 더 많은 이야기들을 보여주고 거기에 더해 자신도 부자가 되면 그걸로 만족할 뿐이다.
“고맙기는 저희가 더 고맙죠. 회사가 어려웠는데 감독님이 도와주신거나 마찬가지니까요. 그런데 계속 인터뷰는 미루실 거예요?”
신인감독이 예상치 못한 성적으로 데뷔에 성공했으니 영화전문 기자나 TV프로그램쪽에서 인터뷰가 물밀 듯이 밀려들었다.
“전 그런거 싫어요. 영화감독이 영화로 보여주는 거지. 단독 인터뷰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앞으로도 없을 겁니다.”
김영웅 감독이 있던 차원의 이야기를 이곳에 가져와 푸는 걸 표절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표절의 대상 자체가 이곳에 없으니까.
하지만 기자를 만나서 뭐라고 말할 것인가?
기자들과 만나 잘난 척하고 싶지는 않았다.
잘난 척은 나중에 누구나 인정할만한 감독이 되었을 때, 진짜 나만의 이야기를 영상으로 구현한 이후에나 할 생각이었다.
“알겠어요. 그래도 시사회에 나가주는 것만으로도 저희는 만족합니다.”
*
드디어 오디션 당일.
서울 소재의 한 대학 강당을 빌린 오디션에는 수백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지금 시작할까요?”
조금 긴장된 얼굴의 경수가 물었다.
오늘 오디션을 준비하느라 잠을 세시간도 못 잤다는 녀석의 명단에는 몇 군데마다 빨간색 형광펜이 덧칠해져 있었다.
저 덧칠해진 이름은 유명 소속사 배우나 주목해야 할 배우였다.
“그래, 미리 말했던대로 선우 역부터 가자.”
주인공을 돕는 여자 비밀경찰인 선우는 비중이 그렇게 크지 않았다.
분량도 적고 존재감도 작은데다가 나중에 비참하게 죽는 역이었으니까.
기존에 존재했던 영화 새로운 세계는 홍콩영화 무간도에서 핵심 플롯을 따온 작품인데 무간도에서 주인공을 도와주는 정신과 의사 역할이 똑같이 비중은 작아도 훨씬 더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선우라는 배역은 비밀경찰에서 정신과 의사 역으로 바꾸고 분량을 아주 조금 늘렸다.
분량 자체는 많지 않지만 극의 흐름상 주인공의 정신적 휴식처가 되는 씬들이었기에 결코 작지 않은 역이라고 할 수 있었다.
“시작합니다! 1번부터 들어오세요.”
이어진 오디션,
“잠을 못 자나요? 왜 잠이 들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그냥 잠이 오지 않아요. 답답하고 가슴이 조여와서 잠을 들수가 없어요.”
조감독인 경수가 지원자들의 연기에 주인공을 대역해서 대사를 맞춰주었다.
누군가는 눈에 띄는 연기를 했고 누군가는 왜 이 자리에 나왔는지 의문스러울 정도의 수준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안녕하세요. 47번 신은정입니다.”
오디션에 참가한다고 전문직 여성처럼 하얀 블라우스, 타이트한 검은색 H라인 스커트에 옅은 화장을 하고 나타난 은정은 눈부시게 예뻤다.
순간적으로 말이 안 나온 그때,
“난 합격.”
옆자리에 앉아 있던 유지은 팀장이 동훈에게만 들릴 만큼 조그마한 목소리로 합격이라고 말했다.
연기도 보기 전에 말이다.
동훈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나도 합격’이라는 말을 가까스로 누르고 말했다.
“크흠... 반가워요. 준비된 연기 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