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
오디션(2)
시나리오를 개발한 감독이 그 다음으로 해야 하는 업무는 바로 연출부를 구성하는 일이다.
주연배우를 캐스팅하는 건 감독의 의중이 가장 많이 반영되는 거지만 기본적으로 조·단역 배우 캐스팅은 조감독이 하는 게 일반적이다.
오디션의 준비와 진행도 조감독이 하고 감독은 심사역만 맡는다.
결론적으로 연출부를 구성하지 않고서는 조·단역 캐스팅은 물론이고 오디션도 진행할 수 없다는 말이다.
전에는 안철호 감독이 구성한 연출부를 그대로 승계해서 했다면 지금은 처음으로 동훈이 스스로 구성한 연출부를 꾸려야 했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자기와 친한 후배를 조감독으로 채용하고는 하는데 동훈 같은 경우는 마땅히 친하다고 여길만한 후배가 없었다.
결국 어쩔수 없이 안철호 감독 밑에서 일했던 이경수 조감독을 다시 한번 불러들일 수밖에 없었다.
“일정이랑 대본 공지했는데 지금까지 접수한 인원이 153명입니다.”
이경수 조감독으로서는 아직도 잠수를 타서 모습을 내비치지 않는 안철호 감독 라인을 타느니 충무로의 떠오르는 신예인 장동훈 감독과 함께하는 게 누가 보더라도 훨씬 이득이었다.
그래서 동훈이 자신을 다시 찾아준 것에 감격스러워하고 있었다.
계약하는 내내 동훈에게 절하듯 인사하며 충성(?)을 다짐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더 올 거 같아?”
“최소한 이것보다 두 배는 더 오지 않을까 싶은데요? 전에 안 감독님이 한 조연 오디션도 3백 명 정도 왔었거든요. 이번에는 주연급도 같이 오디션 보니까 더 오면 더 왔지 덜 오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힘들겠네.”
당연히 동훈도 조감독으로 일하면서 오디션 준비와 진행을 안 해본 건 아니었다.
다만 학벌과 인맥이 부족했던 동훈으로썬 속칭 1티어급으로 분류되는 상업영화 감독과 같이 일하지 못했기에 오디션을 봐도 기껏해야 50명에서 많으면 백명 정도였다.
전에 같이 일했던 강석호 감독은 조연 오디션에 유명 소속 배우들이 하나도 참가하지 않았다며 동훈을 들들 볶았었는데 그때는 정말 이 바닥을 때려 칠까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었다.
“아마 아침부터 밤까지 계속 진행해도 하루 안에는 안 끝날 겁니다.”
“지원한 인원수 봐서 일정 나누든지 해.”
“아, 그리고 소속사에서 지원한 배우들은 따로 심사할 겁니까?”
“아니. 그냥 같이 봐.”
“돈 물고 들어오는 애들은요?”
경수가 말한 돈 물고 오는 애들은 간혹 작품에 출연할 때 소속사 등에서 투자를 추가적으로 할 수 있는 애들을 말했다.
대표적으로 아이돌을 들 수 있는데 그런 아이돌을 조연 등에 합류시키면 소속사나 해당 아이돌이 맡은 광고회사에서 투자가 들어오기도 한다.
임현주의 경우처럼 배우가 투자자를 물고 들어오는 경우도 있지만 그건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기에 논외로 하고 말이다.
“받아야지. 준다는 돈 굳이 거절할 필요 있나? 대신 연기가 봐줄 수 없는 발연기면 못쓰는 거고.”
“그쪽에서 싸인을 보내면 일단 받고 보라는 거네요?”
“응, 내가 보고 결정하도록 할테니까 미리 짜를 필요 없다.”
“알겠습니다.”
*
WAS엔터테인먼트 대표실,
“봤어? 봤지? 나 어땠어? 은근 괜찮지 않아? 배워보니까 나도 춤에 재능이 있는 것 같더라구”
현주는 고은숙 대표 앞에서 30분째 자랑질이었다.
동영상 스트리밍 사이트인 요튜브에 근 보름 가까이 연습한 걸그룹 댄스를 올려놓고 자신의 춤선이 얼마나 예쁜지에 대해 자랑하느라 고 대표의 표정이 안 좋아지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좋니? 좋아?”
“대표님, 여기 댓글 봤어요? 요새 걸그룹 센터에 내놔도 꿀리지가 않는대. 나도 처음엔 괜히 했다 싶었는데 이제는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
“좋겠다. 영화 대박나서.”
“꼴랑 4백만 돌파한 거 가지고 대박은 무슨... 결국 만화영화도 못 이겼는데.”
“러닝게런티로 5억도 넘게 땡길 거면서 표정관리 하기는... 너 지금 내 속 박박 긁으러 왔지?”
“내가 대표님 속을 왜 긁어요? 내가 대표님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르시나보다?”
고 대표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현주 옆에 좌불안석으로 앉아 있는 매니저 석태에게 말했다.
“대본리딩 언제부터한대?”
“11월 초에 잡혔다고 합니다. 정확한 일정은 제작사에서 통보해주기로 했습니다.”
고 대표는 석태에게서 시선을 떼고 현주에게 고개를 돌렸다.
“박현영 작가가 숙제 줬다며? 잘 할 수 있겠어?”
“그냥 하는 거지, 뭐...”
고 대표는 말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해도 한순간에 표정이 굳어진 현주를 보며 그녀가 내심 불편해하고 있음을 알았다.
평소 로맨틱코메디로 잘나가는 박현영 작가가 이번엔 뜬금없이 정통 멜로 드라마로 돌아왔다.
이전 작품에서 번번히 박현영 작가와 뜻이 맞지 않았던, 속칭 까였던 현주는 평소 깊이있는 연기를 보여줘야 하는 정통 멜로 드라마를 싫어함에도 이번 작품에 선뜻 손을 내밀었고 결국 캐스팅을 확정했다.
이에 박현영 작가는 현주에게 은근히 대본리딩을 기다린다고 전했다고 했는데 고 대표나 현주나 둘 다 박 작가의 말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고 대표가 말한 숙제, 그건 현주를 향한 시험이었다.
물론 대본리딩때 못한다고 해도 감히 현주를 까지는 못할 거지만 그래도 대본리딩에서 작가가 원하는 수준의 연기를 보여주지 못하면 박 작가 특유의 꼬장이 촬영 내내 현주를 괴롭힐 것임을 알고 있었다.
추가로 그 입이 휴지장처럼 가벼운 박 작가가 얼마나 이 바닥에 현주 뒷담화를 하고 다닐지 안 봐도 비디오였다.
“뭐, 그거야 네가 알아서 잘 하겠지.”
“내 걱정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진혁이 똥이나 안 싸게 관리하세요. 내가 어디 가서 쪽팔려서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다니까?”
고 대표는 어이없어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네가 진혁이 엄마니? 쪽팔리면 내가 더 쪽팔렸지 왜 네가 쪽팔려?”
“어딜 갈때마다 소문이 진짜냐고 물어보는데 내가 안 쪽팔리게 생겼어요? 하여튼 그 새끼는 얼굴 조금 반반한거 믿고 들이댈 때, 아닐 때를 몰라.”
“지는...”
고 대표의 힐난에도 현주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난 톱스타잖아. 걘 아니고.”
할 말이 없는 대답이다.
“그 얘긴 됐고, 너 이제 볼일 없으면 빨리 나가. 너랑 얘기하고 있으면 나 너무 지쳐.”
“너무한다. 내가 사무실 자주 오는 것도 아닌데...”
“사또 행차했니? 지 자랑이나 하려고 왔으면서? 나 바뻐.”
“뭐가 그렇게 바쁜데요?”
“미팅 있어. 장동훈 감독이랑.”
“장 감독? 아... 이번에 영화 들어가는 거 캐스팅 때문에 만나는 거구나? 누구 꽂으실건데?”
고 대표는 벽걸이 시계를 흘깃 바라보고는 허리를 뒤에 누이며 물었다.
“네가 그걸 왜 궁금해해?”
“그냥...”
“솔직히 후회되지? 박현영 작가꺼 꼭 잡아야 한다고 석태를 사흘 밤낮동안 들들 볶아놓고 이제와 후회되지?”
“아닌데요? 전혀 아닌데?”
“아니긴 이년아, 귀신을 속여라. 내가 널 몇 년을 봤는대 내 앞에서 구라를 까니? 어차피 탑급 여배우는 캐스팅에서 논외야. 관심가지지 마.”
“칫... 관심없었다니까.”
고 대표는 삐진 게 확실한 현주를 빤히 보다가 물었다.
“근처 고깃집에서 식사할건데 같이 갈래?”
“고기?”
“투플러스 꽃등심으로.”
“하... 다이어트해야 하는데...”
“그럼 가지 말던가.”
“그런데 내가 요즘 춤을 많이 춰서 고기가 필요하긴 해. 석태가 어제부터 계속 이러다 쓰러지는 거 아니냐고 걱정했다니까. 석태야, 너도 배고팠지? 가자. 넌 누나 잘 만난거야, 인마.”
현주는 고 대표가 일어나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석태를 데리고 쏙 나가버렸다.
*
먼저 나와서 기다리고 있던 동훈과 유지은 팀장은 문을 열고 들어서는 고은숙 대표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WAS엔터 고은숙 대표에요. 만나서 반가워요.”
“네, 안녕하세요. 장동훈입니다. 그런데 현주 씨가 여기 어쩐 일로...”
고 대표 뒤를 이어 들어온 현주를 보고 의아한 찰나 그녀 뒤로 또 한 사람이 들어섰다.
동훈도 익히 알고 있는 걸그룹 출신 신인연기자 윤슬기였다.
“대표님이랑 감독님이랑 고기 먹는다고 해서 끼어 봤어요. 며칠 전에 회식에서 봤다고 싫은 건 아니죠?”
“아닙니다. 제가 사는 것도 아닌데요, 하하. 여기는 윤슬기 씨?”
“안녕하세요. 윤슬기입니다.”
이 자리는 고은숙 대표가 마련한 자리로 소속 연기자인 윤슬기를 푸시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
그렇기에 윤슬기가 자리에 나올 줄은 알고 있었다.
“평소에 팬이었습니다. 반가워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윤슬기가 있었던 그룹인 ‘러브 바이러스’라는 걸그룹은 어두웠던 동훈의 과거를 이겨내게 해준 일등공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특히 러브 바이러스의 윤슬기는 걸그룹 활동 중에도 애니메이션 여주인공으로 종종 등장했을 정도로 목소리도 좋아 상당한 수의 팬덤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녀를 캐스팅한다는 건 그만한 팬덤을 관객으로 흡수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또 하나가 더 있었다.
바로 그녀의 뒤에 있는 광고회사들.
조연 캐스팅 하나에 자리까지 마련한 이유였다.
처음에는 의례 하는 인사말과 덕담이 오갔고 고기를 먹은 후 후식을 들기 시작한 이후부터 본격적인 대화가 시작됐다.
“아시겠지만 슬기가 작년부터 본격적으로 연기를 시작했어요. 부족한 점도 많지만 장동훈 감독님께서 잘 이끌어 주시면 좋은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 싶은데 어떠세요?”
“윤슬기 씨가 작품에 합류한다면 당연히 좋죠. 다만, 제가 아직 슬기 씨가 무거운 역할을 어떻게 수행할 지에 대해선 확신이 안 섭니다. 서운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솔직한 말로 전 슬기 씨가 평균 이상의 연기력만 보여준다면 제작사가 싫다고 해도 꼭 캐스팅하고 싶을 정도에요. 다른 걸 떠나서 흥행 보증수표잖아요?”
김영웅 감독이 있던 차원에서는 보이그룹팬이 걸그룹팬보다 압도적으로 구매지수가 높았다.
아무리 걸그룹을 잘 키워봐야 같은 급의 보이그룹이 벌어들이는 돈의 절반도 벌지 못하는 경우가 수두룩 했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곳은 달랐다.
조금 잘나간다 싶은 걸그룹은 각종 애니메이션에 성우로 참여해서 애니메이션 팬까지 끌어모은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눈앞에 조신하게 앉아 고 대표와 동훈의 눈치를 보는 윤슬기다.
사실 갖춰진 조건이 너무 좋아서 마음만 먹으면 미니 주연급으로 바로 데뷔할 수도 있는데 그러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그녀의 연기 실력 때문이라는 소문이 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오디션을 보라고 하는 거였다.
“호호호, 우리 슬기 팬이 많긴 해요. 그런데 감독님 역시 들었던대로 일을 확실하게 하는 스타일이시네요.”
뼈가 있는 말이지만 동훈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감사합니다. 어쨌거나 그래서 전 윤슬기 씨가 오디션에 한번 와주시면 어떨까 생각하는데... 너무 무리한 부탁인가요?”
고 대표는 말을 하려다가 옆에 앉아만 있는 현주에게 시선을 돌렸다.
고기 먹었으면 먹은 값을 하라는 눈빛이다.
사실 고 대표는 장동훈 감독이 처음이라 만약 어려운 상황이 생긴다면 중간에서 잘 조절하라는 의미로 현주를 이 자리에 데려온 것도 있었다.
현주도 그걸 아는지 입맛을 다시며 나섰다.
“그냥 해요, 감독님. 우리 대표님 신세 한번 지면 절대 그냥 입닦는 분 아니니까.”
장난인 듯 아닌 듯 한 말에 고 대표는 눈을 부라렸지만 현주는 할만큼 했다는 듯 눈을 내리깔며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동훈의 대답이 예상을 뛰어넘었다.
“좋습니다. 믿어보죠.”
“네? 정말인가요?”
오죽했으면 고은숙 대표가 되물어볼 정도였다.
“네. 대신 오고가는게 확실하다고 하셨으니까 이왕이면 받을 걸 미리 정해드리겠습니다.”
“말씀하세요.”
“첫 째, 분량 가지고 항의하는 것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둘째, 크랭크인까지 연기연습에 매진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원하는 수준의 연기를 보여주지 못하면 캐스팅에서 제외할 수 있습니다.”
“장 감독님.”
동훈은 고은숙 대표의 말을 끊었다.
“하나 더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향후 영화 홍보 일정에 적극 협조하셔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원하는 모든 활동을 빠짐없이요. 이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