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
업보(4)
일단 차기작인 ‘새로운 세계’ 제작이 확정된 이후 동훈은 ‘영화 세상’과 기존에 맺었던 계약을 새로운 조건으로 갱신했다.
기존 계약은 신인감독의 신분이었지만 이제는 신인도 아니고 감독 자체의 역량을 보여준 만큼 제작사에서 기존 계약이 불합리하다고 여기곤 새로운 조건으로 계약을 다시 진행한 거였다.
확실히 규모는 작다고 해도 박삼구 대표의 경영은 동훈의 마음에 쏙 들었다.
기존에 만들어 놓은 시나리오가 이미 있었기에 제작피디인 유지은 팀장이 제작기획서를 만들어 온 것은 사무실에서 작은 파티가 있은 후 단 하루만이었다.
그 제작기획서에는 제작진 소개와 캐릭터 및 캐스팅 계획이 포함되어 있었고 향후 제작 일정과 예산, 광고 및 마케팅에 관한 내용까지 들어 있었다.
이 제작기획서와 확정된 캐스팅을 가지고 투자자에게 투자를 받아와야 하는 것이니 이제 동훈이 해야 할 일은 주연급 캐스팅을 마무리 해야 했다.
“이 사람은요?”
동훈이 한 사람을 찍자 유지은 팀장이 곤혹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흔든다.
“양원석 씨요? 우리 회사 캐스팅디렉터도 우선적으로 알아본 배우인데 내년 6월까지 스케줄 꽉 잡혀 있어요. 힘들어요.”
“양원석 씨가 딱이긴 한데...”
“아무렴요. 감칠맛 나는 연기 하면 양원석 씨 빠지지 않죠. 그런데 탑급 배우면 오히려 스케줄이 띄엄띄엄 있을지 몰라도 저렇게 연기 잘하는 조연은 정말 잡기 힘들어요. 다들 그 사람만 찾으니까.”
“후... 그럼 ‘펀 에이블’의 최승준은요?”
“최승준도 안 되요. 이미...”
“알아봤다는 거죠?”
“네.”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이게 팀장님의 잘못은 아니지 않습니까? 스케줄이 있다는 데 어쩌겠어요? 하... 그런데 마땅한 배우가 없네.”
“배우 급을 조금 낮출까요?”
잠시 고민을 해봤지만 그건 아니다 싶었다.
“아뇨, 이 배역도 거의 주인공이나 다름 없는데 그럼 안 맞죠.”
“하긴, 주인공은 탑급 배우로 진행중이니 그렇겠네요.”
“소속사에서는 반응이 어때요?”
“확실히 이번 영화 보고 감독님 실력에 믿음이 가는지 다들 자기네 소속 배우를 어필하고 있어요. 그래서 말인데 감독님이 정리를 좀 해주시면 좋을 것 같은데.”
“선별을 해달라는 뜻인가요?”
“선별이라기보단 우선적으로 원하는 배우가 있으면 우선 그쪽하고 먼저 컨택하는게 일이 쉬우니까요. 서로 오해하지도 않고.”
처음에는 저쪽 차원에서도 스타고 이쪽에서도 스타인 이현재를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꼭 그가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었다.
가장 우선시 되는 건 이름값 플러스 연기력이라 탑급 배우 중에 연기력이 되는 배우여야만 가능했는데 그런 배우가 아주 보기 힘든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천천히 여유를 가지며 더 좋은 배우를 찾아보자 했는데 아무래도 유 팀장이 힘든가 보다.
“그럼 이현재 어때요?”
“이현재 좋죠. 음... 그럼 그쪽에 캐스팅 제안 넣어 볼게요. 이미 시나리오 돌린 소속사에는 그럼 뭐라고 할까요?”
“주연 말고 적당한 조연으로 바꾸죠.”
“알겠어요. 그럼 중국인 조폭 배역은...?”
조금 더 찾아보고 싶었지만 깔끔하게 포기하기로 했다.
다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차라리 이전까지 없었던 새로운 얼굴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하는 게 어때요? 어차피 조·단역으로 몇 개 배역은 오디션 볼 꺼잖아요? 거기에 이것도 중국 조폭 역도 집어 넣어 보죠.”
“괜찮을까요? 너무 신인이면 주연급한테 기가 죽어서 제대로 된 연기가 안 나올 수 있는데.”
“오디션을 보고 정 안되면 다시 연예 기획사 쪽에서 골라보도록 해요.”
그렇게 정리하려고 하는데 유 팀장이 자신의 핸드폰으로 온 문자를 확인하더니 묘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회사에 WAS엔터에서 캐스팅 제안이 들어왔대요.”
“WAS? 거기에 누가 있었죠?”
“현주 씨요.”
“아... 현주 씨는 아닐테고.”
“맞아요. 이진혁 씨를 주연으로 계약하고 싶다고 하네요.”
“누구요? 이진혁?”
“네. 왜요?”
뭐 이런 황당한 일이 다 있나?
그 난리를 피워놓고 어떻게 자신의 영화에 함께 하겠다고 제안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동훈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 그럴 리가 없는데? 잘못 안 거 아니에요?”
“문자에는 분명히 WAS엔터 이진혁이라고 왔는데요?”
“아니에요. 잘못 안 걸 거예요.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리가 있나?”
유 팀장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도대체 왜 그러시는데요? 이진혁이 너무 떨어져서 그러세요?”
“아니, 급이고 뭐고 그런 것 때문이 아니라...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사람 애간장 태우지 마시고 말씀 좀 해보세요.”
아무리 자신이 잘못한 게 없다고 해도 없는 자리에서 뒷다마를 한다는 게 꺼려졌다.
특히 이 바닥은 비밀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입이 싼 사람들이 많은 곳이라 어지간해서는 남의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팔짱을 끼고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유 팀장을 보고 있으니 계속 입을 다물 수만은 없었다.
“실은 며칠 전에 제 은사님이라고도 할 수 있는 한범석 감독님이 부르셔서 술자리에 나간적이 있었는데 그 때 이진혁이 있더라구요.”
“그래서요?”
“서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저한테 자기 친구한테 보내줄 시나리오 없냐고 물어보는 거예요?”
“친구한테 보내줄 시나리오요? 이게 무슨 경우래요?”
“내말이... 하여튼 그래서 서로 언성이 올라가다 주먹이 오가기 전에 가게를 나왔어요. 그런 상황인데 이진혁이 내 작품에 참여할 리가 없잖아요? 안 그래요?”
“어? 그러게요? 이상하네?”
“만약 진짜 이진혁이면 완전 싸이코인데?”
“에이, 그렇지는 않을 것 같고, 아마 소속사에서 감독님하고 이진혁 사이에 있었던 일을 몰랐던 것 같아요. 제가 잘 이야기 할게요.”
“네. 좀 웃기긴 한데 잘 이야기 해주세요.”
*
“양 비서! 박 상무 빨리 불러와!”
비서는 평소보다 더 화가 난 고은숙 대표를 보고 서둘러 박대진 상무에게 연락을 취했다.
“상무님, 빨리 올라오셔야 할 것 같은데요?”
“왜? 나 지금 사우나에 있으니까 1시간 뒤에 올라간다고 해.”
비서는 박 상무의 느긋한 목소리에 답답해하며 말했다.
“상무님, 늦으시면 대표님께 혼날 것 같아요. 화 많이 나셨거든요.”
“아, 또 왜 화나셨대? 집에 뭐 안 좋은 일 있으셨어?”
“그건 모르겠구요. 빨리 들어오셔야 할 것 같아요, 전 분명히 전해 드렸습니다.”
사우나 수면방에서 느긋하게 한숨 때리려던 박대진 상무는 짜증섞인 얼굴로 중얼거리며 일어섰다.
“이 누님이 또 뭐 때문에 날 괴롭히려고 이래? 이래서 상사가 여자면 남자가 고달픈 법인데...”
어젯밤까지 호텔에서 버티는 우진이를 달래느라 박 상무는 피곤에 쩔어 있었다.
물론 달래는 방법은 여자가 나오는 술집에서 술을 먹이며 같이 노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박 상무는 밤새 일을 했다는 생각에 지금 자신을 부르는 고 대표가 야속하기만 했다.
그래서 고 대표의 문을 여는 박 상무의 손길은 분명 평소 거친 느낌이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뭐야? 지금 내가 사우나에 있는거 불렀다고 화났어?”
박 상무는 고대로 일러바친 비서를 속으로 욕하며 자리에 앉았다.
“아니 뭐 그런건 아니구요.”
“박 상무, 내가 지금 무슨 연락을 받았는지 알아?”
그제야 처음으로 고은숙 대표의 얼굴을 살펴본 박 상무는 뭔가 굉장히 안 좋은 상황이 벌어졌다는 걸 알았다.
고 대표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한쪽 눈꼬리를 파르르 떨고 있을 땐 정말 화가 났다는 걸 수년간의 경험으로 익히 체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슨 연락을 받으셨길래 그렇게 화가 나셨습니까?”
“내가 방금 전에 ‘영화 세상’ 제작피디한테 직접 연락을 받았어.”
“네? 고작 제작 피디 주제에 대표님께 직접 연락을 했다구요? 허허... 이거 완전히 개념을 상실한 놈이네?”
“웃기지? 나도 처음엔 웃겼지. 그런데 그 친구가 그러더라구. 직원들한테 전달하게 하면 말이 돌 수도 있어서 직접 연락했다는 거야.”
박 상무는 심장이 내려앉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대표에게 직접 연락을 해 올 정도의 사안이라면 분명 심각한 내용일 것이고 하필 그 내용이 자신과 연관된 것이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뭐라고 합니까?”
“이진혁이가 장동훈 감독하고 싸웠다고 하던데? 그래서 진혁이 캐스팅 못하겠대. 당시에 얼마나 진혁이가 무례하게 굴었는지는 말하지 않겠지만 앞으로 장 감독과 같이 일하기 힘들 거라네?”
x됐음을 느낀 박 상무는 그래도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하려고 했다.
수십년 간의 경험으로 같이 흥분하면 큰 죄도 더 크게 만들어 질 수 있음을 아는 까닭이다.
“아...”
“아? 아? 야 이 새끼야, 내가 코딱지만한 제작사 팀장한테 이딴 소리나 듣고 있어야겠니?”
“제가 그 얘긴 들은 적이 없어서... 죄송합니다.”
박 상무는 억울했다.
어느 누가 장 감독이랑 이진혁이랑 사적으로 안 좋은 감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겠는가?
그래도 이 정도 사안은 적당히 어르고 달래면 쉽게 넘어갈 문제라고 생각해 그저 고 대표의 마음이 달래지기를 기다렸다.
평소처럼 고개를 숙이고 반성하는 척하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정말 쪽팔려서 진짜... 도대체 배우 관리를 어떻게 하길래...”
고 대표가 일장 연설을 늘어놓기 시작했을때 비서가 문을 열고 황급히 들어왔다.
“대표님, 저기... 지금 밖에 이진혁 씨 오셨는데요?”
고 대표가 미처 대답도하기 전에 들이닥친 이진혁은 얼굴이 벌게진 채로 고함을 질렀다.
“아,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저지르고 그래요? 쪽팔리게 진짜 이게 뭐야!”
고 대표는 다시 한번 머리를 감싸쥐며 중얼거렸다.
“내가 시팔 회사까지 와서 애를 키우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