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
업보(3)
배우 캐스팅은 감독의 의견이 가장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캐스팅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우선 배우의 스케줄 상 참여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경우도 있으며 제작사에서 배우의 출연료를 감당하지 못 할 수도 있다.
유지은 팀장이 팍팍 밀어드린다는 말은 돈에 밀려서 캐스팅을 포기하는 일은 없을 거라는 말이었고 이건 중·소형 규모의 제작사가 감독에게 또 한번 모든걸 쏟아 붓겠다는 걸 의미했다.
“그래주면야 감사하죠.”
김영웅 감독이 있던 곳에서 만들어진 ‘새로운 세계’는 조폭들이 중심이 된 느와르 장르고 조직에 숨어든 경찰 스파이의 존재로 인해 긴장감을 중첩시키지만 극의 분위기가 아주 무겁기만 한 건 아니다.
그건 화교 조폭 보스를 맡은 배우가 코믹스럽고 맛깔나게 연기하며 관객의 긴장을 풀어주었기에 가능했다.
어쩌면 주인공보다 더 중요한 캐릭터라고 할 수 있었기에 이 배역의 캐스팅이 가장 중요했다.
“혹시 황정훈이라는 배우 아세요?”
“황정훈이요? 글쎄요, 못 들어봤는데. 보조출연자 업체 쪽에 한번 그런 배우가 있는지 알아봐 드릴게요.”
안타깝지만 여기에는 황정훈이라는 배우는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조연이나 단역으로 일하는 중이라면 섭외는 쉬울 것 같은데 만약 세연처럼 아예 다른 분야에서 일하는 중이라면 포기해야 할 듯 싶었다.
“다른 배역은 전에 드렸던 시나리오 보시고 적당한 배우들로 추려주세요. 추려준 배우들 중에 마음에 드는 분으로 캐스팅하기로 하죠.”
“알겠어요.”
“아, 음... 거기 주인공의 뒤를 보조해주는 여배우 하나가 나오는데 그건 미뤄두세요.”
동훈의 의도를 눈치챘는지 유 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알겠어요. 그런데 혹시 세연 씨한테 먼저 물어보시려는 건가요?”
“맞아요.”
“그럼 저희 쪽에서 연락해볼까요?”
동훈은 잠시 생각해보다가 유 팀장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이번에도 개인적으로 연락한다면 상대방쪽에서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 있고 남자친구도 있다고 하니 정식으로 캐스팅 제의를 하는 게 훨씬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낫겠네요. 세연 씨가 거절 할 수도 있는데 만약 그러면 저한테 연락 주시구요.”
“거절할 수도 있다구요? 설마요?”
지금 전국 상영관에서 흥행 2위를 달리고 있는 감독의 차기작을 조연배우가 거절한다는 게 유 팀장은 이해가 가지 않는가 보다.
“직업이 따로 있는 친구에요. 그래서 경험 삼아 한번 해보자고 해서 출연한 거라 이번에도 한다고 할지...”
“그런 사람이 얼마 전에 기자랑 인터뷰를 했어요?”
“네? 인터뷰요?”
갑자기 무슨 뜬금없는 인터뷰란 말인가?
“지금 SNS에서 세연 씨 이야기 종종 올라오는 거 모르셨어요? 신선한 얼굴인데다가 연기도 나쁘지 않고 무엇보다 존재감이 있었잖아요. 이 정도인데 기자가 연락하지 않는게 더 이상한거죠.”
“아... 그랬구나.”
영화 개봉 전에는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기사나 SNS 반응을 직접 체크했지만 점차 시간이 흐르고 흥행이 안정세에 접어들자 다음 작품을 위해 집에서 작업을 하거나 근처 헬스장에서 몸을 만들었다.
어차피 중요 기사나 박스오피스 순위 및 당일 관객수는 유 팀장이 계속 문자로 보내줬기에 따로 기사를 찾아보지 않아도 되었다.
“임현주 쪽에서 별 말은 없었어요?”
“에이... 설마 신세연이 너무 예쁘게 나왔다고 항의할까봐 그래요? 임현주가 좀 싸가지 없기는 해도 그렇게 대놓고 뻔뻔하지는 않아요.”
“그럼 다행이지만... 어쨌거나 기자랑 무슨 인터뷰를 했대요?”
“연기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고 이번 영화에 어떻게 합류했는지,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는지, 등등요.”
“뭐라고 답하던가요?”
“아주 전형적인 신인 연기자의 자세로 인터뷰 하던데요? 본래 하던 직업이 있지만 운 좋게 연기를 시작하게 됐고 너무 좋은 경험이 돼서 앞으로 기회만 된다면 더 하고 싶다고 했어요. 그런데 소속사도 없고 경험이 너무 없어서 연기연습에 매진하겠다는 말로 끝내더라구요.”
“흐음... 상어떼 앞에서 피를 뿌렸네.”
“후후, 그렇죠? 아마 지금쯤 걸려오는 전화 때문에 부모님하고도 통화가 어려울걸요?”
신세연 정도의 존재감을 지닌 여배우가 세상물정 모르고 FA시장에 나와 있으니 온갖 벌레들이 꼬이는 게 당연했다.
혹시 이럴지도 몰라서 그 때 소속사를 연결시켜주겠다고 한 건데...
“일단 연락해보세요.”
“네, 사실 저도 그 배역에 신세연 씨를 생각하고 있었어요.”
*
국내 최대의 대형매니지먼트사인 WAS엔터테인먼트의 대표실.
상석에 앉은 40대 중반의 여성인 고은숙 대표는 어딘가 모르게 불편해보이는 얼굴로 옆자리의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망한 거네? 그렇지?”
“네.”
“우진이는? 아직도 연락 없어?”
“네.”
고은숙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장년의 남자를 한심스럽게 보며 나무랐다.
“도대체 이게 뭐야? 영화 무조건 대박 날 거라고 우진이 설득해서 ‘태양의 남자’ 대신에 ‘역적’ 들어가게 해놓고 이게 다 뭐냐고?”
“죄송합니다. 시나리오도 좋고 캐스팅도 좋았는데 아무래도 중간에 감독이 원하는대로 잘 안 나온거...”
“야! 내가 지금 평론가한테 영화 평론 듣고 있는 거니?”
“죄, 죄송합니다.”
“배급사에서 뭐래?”
“아무래도 말이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광주랑 부산에서 계획한 현장 관람 이벤트에도 안 나오고 해서 지금 배급사에서 정식으로 항의한다고 기사까지 내보낸다는 걸 억지로 막긴 했는데...”
“하... 이 새끼 언제 정신 차리지?”
고은숙 대표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 쥐고 괴로워했다.
남자는 고 대표의 눈치만 보며 입을 다문채 고개만 숙이고 있는데 그녀가 불쑥 입을 열었다.
“임현주는?”
그나마 나쁘지 않은 화제로 넘어갔는지 남자가 표정을 풀며 고개를 들었다.
“영화 홍보 때문에 느긋하게 전국투어 다니는 중입니다. 조만간 공약 이벤트 때문에 걸그룹 댄스도 배워야 되는 거 아니냐고 학원을 알아보기도 하구요.”
“미친년, 공약을 걸어도 하필 되도 않는걸 걸고 있어.”
“하하, 설마 4백만 돌파할까 싶었겠죠.”
“그 장동훈인가 장독대인가 하는 감독, 시나리오 온 거 봤어?”
“장 감독이 시나리오를 보냈다구요? 벌써요? 아니 개봉한 영화가 아직 스크린에서 내려가지도 않았는데 벌써 새 작품 시나리오를 돌렸대요?”
“그래, 그 새끼도 천재과인가봐. 현주한테 들었지? 안 감독이 만들어 놓은 각본 싹 다 갈아엎고 완전히 새로운 내용으로 만들어서 지금 성적 나온 거. 미친놈인거지.”
“미친놈 맞습니다. 프리 프로덕션 기간도 없이 기존에 준비해 놓은 인력과 소품으로 어떻게 저런 완성도를 만들었는지...”
“하여튼 그 미친놈이 새로운 시나리오를 보내 왔는데 이게 또 걸물이네?”
“괜찮던가요?”
“어. 많이.”
남자는 머리를 긁적이며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필 다들 스케줄이 있는 상태라 애매한데요? 포지션이 어떻게 됩니까?”
“탑급 하나. 남자로.”
“임현주급으로요?”
“어. 우진이는 안 되겠지?”
“이번에 ‘역적’ 밟은 감독 작품인데 그 놈 자존심상 안 하려고 할 것 같은데요? 누가 보더라도 완전히 발린 상황이라...”
“그럼 이거 놓쳐?”
“우진이 말고 진혁이는 안 될까요?”
“진혁이? 음... 될까?”
의심쩍어하는 고 대표에게 남자는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
“솔직히 이진혁 정도면 감지덕지 아닙니까? 입봉작이야 안철호 감독이 싼 똥으로 받았다고 하지만 이제 진짜 지 이름으로 캐스팅 해야 하는데 이진혁 정도면...”
“모자라지, 지금 관객수가 얼만데? 회식 자리에서 술이 떡이 되도 노래 한 번 안 부르는 현주 고년이 걸그룹 댄스 추게 생겼어. 박 상무, 너 또 그렇게 막무가내로 또 큰소리 칠 거야?”
“크흠... 아닙니다. 진짜 진혁이 정도면 충분히 밀어붙일 수 있습니다.”
“하... 진짜 가능하겠어?”
“그럼요.”
“후, 알았어. 그럼 네가 책임지고 진혁이 밀어 붙여 봐.”
“그런데 진혁이한테 안 물어봐도 될까요?”
“물어보든가. 박 상무 알아서 해.”
박 상무는 잠시 고 대표 눈치를 보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하나하나 보고하면서 일할 필요가 없죠. 그 새끼 성격 상 이 감독은 어쩌네, 뭐를 못하네, 또 하나하나 지적질하면서 토론할 거 생각하면 지금부터 피곤해지네요.”
“이제 알았어? 걔는 어릴 때 공부 못한게 한이 됐는지 나이 서른 다 돼서 분석질을 하려고 한다니까? 머리 나빠서 분석도 못 하는게... 하여튼 이번에는 실수하지 마.”
“그럼요. 걱정하지 마십쇼, 누님. 헤헤...”
“바보 같이 웃지 말고 가서 일해. 에휴... 내가 믿고 맡길 사람이 너밖에 없는 게 한이다.”
고 대표는 미심쩍어 하면서도 한 번 더 믿어보기로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