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흥행의 신-18화 (18/116)

# 18

업보(2)

친구에게 시나리오를 넘겨주고 싶다는 말에 열이 확 올라왔지만 그래도 혹시 스타 친구를 장난삼아 저렇게 말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 여전히 웃는 표정을 유지했다.

“혹시 그 친구가...?”

“정경재라고 얼마 전에 ‘너를 사랑할 시간’에 나온 남자배우 있는데 혹시 보셨어요?”

우선 이진혁이 말한 ‘너를 사랑할 시간’이라는 드라마는 지상파 미니시리즈인 것으로 알고 있다.

중요한 건 평균 시청률이 3%도 안 되는 폭망작이었고 평소 드라마를 좋아하는 자신도 1회 초반부만 보고 꺼버렸을 정도로 형편없는 작품이었다.

그런 드라마의 주연도 아니고 조연으로 나온 친구라면 시나리오를 달라고 할 게 아니라 제작사에 찾아가 프로필을 돌리며 자신을 어필해야 하는 게 맞다.

어쨌거나 중요한 건 정경재인지 청경채인지 하는 놈에 대해선 전혀 알고 있지 못한다는 거다.

“아... 제가 한번 찾아보고 연락 드려볼게요.”

보통 이렇게 말하면 적당히 알아서 알아듣곤 화제를 돌릴텐데 이진혁은 집요한건지 눈치가 없는 건지 재차 입을 놀리기 시작했다.

“정말 연락 주실거죠? 아우 난 말로만 약속하는 사람 너무 싫어해서... 언제 같이 밥먹자, 술 마시자, 이런 말들 너무 짜증나지 않아요? 한국사람들 그게 문제야. 외국에서는 밥먹자고 하면 당장 약속을 딱 잡는다니까? 언제, 어디서, 뭘 먹을지 다 정해놓고 딱 먹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냥 흘리듯이 약속하고 그냥 잊어버려. 난 그게 너무 싫더라구요.”

“아... 그러시구나.”

이걸 어떻게 받아야 할까?

쓰레기 차 피하면 똥차에 치인다더니 딱 이런 상황이다 싶다.

생각지도 못한 이진혁의 진상짓에 순간 할 말을 잊어버렸다.

반면 송수연은 불안한 눈동자로 동훈을 바라보았다.

그녀로써는 장동훈 감독이 화를 못 참고 싸움이 날까봐 조마조마 했던 거다.

“약속하시는 거죠?”

재차 물어보는 진혁에게 동훈은 마음을 정하고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제가 찾아보고 괜찮은 배우다 싶으면 보내겠습니다. 그러니 혹시라도 친구분한테 미리 말하지는 마세요. 실망하실 수도 있으니까.”

시종일관 미소를 짓고 있던 진혁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버렸다.

그 변화는 모든 이들이 쉽게 알아차릴 정도여서 술자리의 분위기가 갑자기 가라앉아 다들 진혁의 입만 바라보았다.

“섭섭하네요, 장 감독님. 제가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아주 개쪽을 주고 그러세요?”

“내가 묻고 싶은 말이에요, 이진혁 씨. 설마 지금 주연 자리를 청탁하는 겁니까?”

청탁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그가 당황한다.

“아니, 감독님. 청탁이 아니라 시나리오 좀 달라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내가 배우 보고 줄지 말지 판단하겠다구요. 내가 당신이 꽂아주는 배우는 다 받아야 하는 거예요?”

이진혁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저 못 뜨는 친구가 안쓰러워 작품 하나 꽂아주고 싶었을 뿐인데 궁지에 몰렸다고 생각했을 거다.

감독입장에서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일 뿐이지만 흥행 이력이 없거나 이름 없는 감독의 경우 스타의 이런 제안을 받아들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

만약 자신도 김영웅 감독의 지식이 아니었다면 이진혁의 이런 아니꼬운 제안도 못 이기는 척 받아들였을 거였다.

어딜가나 마찬가지지만 하나를 주고 하나를 받는 것이기에 일단 그에게 받아야 할 빚 하나를 지워놓은 셈이기 때문이다.

이런 부탁이 쌓이고 쌓여 결국 자신의 작품에 주연으로 캐스팅 되기도 하니 스타의 이런 제안이 꼭 나쁘다고만은 볼 수 없기도 했다.

어쨌거나 이진혁의 입장에서보면 꽂아달라는게 아니라 시나리오 좀 달라는 거였지만 사실 그 말이 그 말이다.

다만 기분이 나쁜건 정중하게 요청해 온 게 아니라 주머니에서 물건 꺼내듯 당연하게 요구한 저 태도였다.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오해에요. 제가 말을 잘 못 한거 같은데, 아... 정말, 시나리오 미리 주는 거 가지고 되게 까탈스럽게 구시네.”

결국 진혁은 잘못을 인정했다가 끓어오르는 화를 못 누르고 폭발했다.

“까탈스럽게 굴어? 이거 웃긴 양반이네?”

“뭐? 웃긴 양반?”

급기야 이진혁이 자신이 먹던 맥주잔을 탁자에 쾅 내려놓았다.

누구 하나 입도 뻥끗 못할 만큼 무거워진 분위기에 더이상 이 자리에 있을 이유를 못 느낀 동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즐겁게 노세요. 전 이만 갑니다. 그리고 이진혁 씨, 이 바닥 천년만년 오래가는 스타는 거의 없어요. 지가 무슨 임현주 급도 아니고...”

“뭐, 인마!”

“그만해, 그만해.”

“진혁씨가 참아. 응?”

“이러다 기자 뜨면 큰일나잖아, 안 그래?”

이진혁이 자리에서 튕기듯 일어나 동훈에게 달려들 듯 움직이자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일제히 진혁을 말렸다.

동훈은 그러거나 말거나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는 수연에게 눈인사를 하곤 가게를 빠져나왔다.

“미친놈... 하여간 또라이들이 너무 많아.”

동훈은 찝찝한 마음으로 집으로 들어간 사이 송수연은 아직도 흥분해서 화를 못 가라앉히는 진혁을 달랬다.

“진정해요. 왜 그렇게 흥분하고 그래요?”

“내가 흥분 안 하게 됐어?”

“솔직히 장동훈 감독 입장에서 기분 나쁠만 하잖아요?”

“아니, 난 그냥 경재한테 배역 하나 주고 싶었을 뿐이었다고. 솔직히 경재 마스크 괜찮고 연기 그 정도면 빠지지 않잖아?”

“누가 그걸 몰라서 그래요? 말하는 투가 장 감독을 아래로 보면서 말했잖아요?”

“그래서 그놈 편 드는거야?”

“누구 편을 드는게 아니라 좀 진정을 하라구요. 여기 사람들 다 있잖아요? 내일 연예면에 A군 술집 난동으로 기사 난 거 보고 싶어요?”

수연의 목소리가 점점 올라가고 난 다음에야 진혁이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진혁의 맞은편에 앉아서 주변 사람들이 물러간 다음에야 조용히 입을 열었다.

“솔직히 선배가 무리했다는 거 알죠?”

“내가 뭘 무리해?”

“장동훈 감독, 아무리 신인이고 별다른 경력 없다고 해도 현주 언니 데리고 입봉했어요. 이번 영화 폭망하지 않는 이상 제작비 최소 50억 정도는 무리 없이 따낼 수 있게 됐는데 그런 감독한테 시나리오 가져 오라는 말이 나와요?”

“흥! 엎어진 영화 각본 갈아엎고 만들었는데 폭망하지 않는게 이상한 거 아니야?”

“언론 시사회에 다녀온 기자들 하나같이 생각보다 잘 나왔다는 말 밖에 없어요. 그만큼 능력 있다는 말도 되구요. 선배가 친구 생각해서 말 꺼냈다는 거 아는데 너무 나가셨어요.”

“그래서 아까 그렇게 빨아주셨어?”

“뭐요? 내가 뭘 해줘요?”

“아주 그냥 열사 나셨던데? 난 강석호 감독이 친일파라도 되는 줄 알았잖아.”

송수연은 입을 꾹 다물고 살기가 가득한 눈빛으로 진혁과 눈싸움을 벌였다.

그리고 감정하나 담기지 않은 건조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까 내가 강 감독이랑 무슨 사연이 있었던 건지 못 들었었니?”

“뭐? 무슨 사연?”

“하... 됐고, 넌 진짜 쓰레기다.”

수연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자 그제야 진혁의 눈빛에 당황함이 어렸다.

“너, 너! 말하는 게 그게 뭐야?”

“꺼져. 병신같은게...”

진혁은 멍하니 서서 그녀가 매니저의 차를 타고 사라지는 걸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 씨발놈... 내가 매장 시켜 버린다.”

안타깝게도 그의 혼잣말을 들은 몇몇 사람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수근댔다.

또 저 지랄한다고 말이다.

*

[‘6급 공무원’과 ‘역적’ 정면승부, ‘6급 공무원’의 한판승?]

[예매율 상승중인 ‘6급 공무원’, 추석시즌 1위 달성할까?]

[생각보다 못한 ‘역적’, 생각보다 좋은 ‘6급 공무원’]

“나이스!”

“나이스!”

“우리 장 감독이 가장 고생 많았어. 자, 한 잔 받아.”

충무로 으슥한 골목에 위치한 중소규모 영화 제작사인 ‘영화 세상’에 오랜만에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특히 박삼구 대표는 빨간 눈으로 샴페인을 터뜨리곤 동훈에게 가장 먼저 잔을 채워주었다.

“대표님께서 기회를 주셔서 이렇게 된 거죠.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 장 감독, 실력도 출중한데 겸손하기까지 하네. 응? 이런 사람이 인재야. 충무로에 아주 대형신인이 떴다고! 이건 완전 국가적으로 축하를 해야하는데 말이야. 하하하!”

말로만 겸양을 떤 게 아니라 실제 박 대표가 신인감독의 제안을 이렇게까지 전폭적으로 밀어줄지 몰랐다.

이름있는 감독이 영화 하나를 제작해도 수많은 훈수와 태클이 들어오는데 이제 입봉하는 감독이 영화 중간에 각본을 싹 다 바꾼다고 하는데도 끝까지 밀어줬으니 고맙지 않을 수 없었던 거다.

물론 박삼구 대표는 그 나름대로의 고충 때문에 밀어줄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지만, 어쨌거나 결과가 그렇게 됐으니 서로간에 합이 잘 맞았다는 건 사실이었다.

“아직 조금 더 결과를 기다려봐야죠.”

동훈의 겸양에 유 팀장이 케잌을 한 입에 털어넣고는 양 볼을 크게 부풀린 상태에서 오물거리며 말했다.

“으음... 벌써 내일이면 손익분기점이에요. 이틀 뒤 추석이면 2백만 돌파 확실시되구요. 쩝쩝... 역적은 확실히 밟았고 예매율 계속 올라가는 중이니까 그놈의 애니메이션만 잡으면 몇 년만인지 모르지만 추석시즌에 영화가 애니매이션 누르고 박스오피스 1위 찍는거예요. 그럼 진짜 대박!”

“크... 우리 장 감독이 화려하게 데뷔하는 구만.”

띄워줘도 적당히 해야지 박 대표처럼 저렇게 띄우면 민망해서 장단을 맞추기도 힘들다.

사실 ‘6급 공무원’ 정도의 영화는 아주 초대박을 칠 정도로 완벽한 작품도 아니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냥 조용히 샴페인과 과자를 먹으며 소소한 파티를 즐기려하는데 박 대표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전에 장 감독이 들고 왔었던 첫 시나리오 있잖아?”

“아, 네.”

“이제부터 천천히 준비해야 하지 않겠어?”

이를 말이겠는가?

“저야 빨리 준비할수록 좋죠.”

“그래, 그럼 트리트먼트 다듬어서 소속사에 뿌려 보자고. 장 감독은 유 팀장이랑 상의해서 스탭 꾸리고.”

그러자 곧바로 유 팀장이 소속사 프로필 파일을 산더미처럼 들고와서 말했다.

“원하는 배우 있어요? 이번에 팍팍 밀어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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