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
업보(1)
지금까지 송수연과 같이 일을 한 적도 없고 그녀의 스타일에 대해서도 들은 바가 없다.
그녀가 영화를 몇 편 안 찍고 드라마에 주력한 것도 있고 그 몇 편 안 한 영화조차 자신과 전혀 연관 없는 사람들과 같이 한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가 이 자리에 있는 이유도 잘 몰랐고 경력이 적지 않은 감독을 향해 저렇게 도발하는 이유도 알지 못했다.
“말이 4백만이지 그게 쉽겠어요? 임현주 씨가 기자들에게 기삿거리 하나 던져준다 생각하고 말한 겁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적당히 덮으려는데 한범석 감독이 등을 탁 치며 나무랐다.
“이거이거 또 간이 작아져서는... 감독이 말이야 눈빛만으로 현장 인원들 싹다 죽여버릴 수 있어야 한다고 했어? 안 했어?”
“아이고 감독님, 그게 아니라...”
“할 수 있지?”
한 감독님이 대놓고 물어보니 어쩔 수 없었다.
“그럼요, 할 수 있죠. 할 수 있습니다.”
“그래, 그래. 그래야지.”
한 감독은 동훈의 어깨를 툭툭 치다가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키고는 옛 생각이 나는지 말을 이었다.
“내가 이 자식 단편을 딱 보는데 뒤통수를 딱 한 대 맞는 것 같았어. 편집도 거칠고 어디서 봤는지 개똥철학을 근본도 없이 버무려놔서 이게 뭔가 싶었는데, 이게 재밌는 거야. 골 때리더라고. 영화 구성이 엉망인데 재밌어. 내가 그걸 보고 곰곰이 생각을 해봤는데 말이야...”
“어땠는데요?”
송수연이 한범석 감독의 말에 장단을 맞춰준다.
“생각을 해보니까 얘가 배운 게 없는 것 같더라고. 이건 험담하는게 아니라 보니까 그래. 지 마음대로야. 그래서 한번 회사로 와서 만나봤는데 내 생각이 맞았더라고. 그냥 본능적으로 관객이 뭘 재밌어 하는지 아는 거였어. 대단하지 않아?”
“진짜 대단하다. 그럼 재능이 있는 거잖아요.”
아예 눈빛을 반짝이며 맞장구를 쳐주는데 흘긋 강석호 감독의 안색을 살피는 걸 놓치지 않았다.
분명 송수연과 강석호 감독 사이에 뭔가 있는 것 같았다.
“재능이 있었지. 재능 없이 내가 왜 우리 동훈이를 뽑았겠어? 그런데 솔직히 처음 데리고 쓸 땐 무지하게 실수 많이 했지. 나한테 엄청 혼났어. 하하하!”
“아하하!”
아주 그냥 둘이 죽이 척척 맞는다.
그걸 보는 강 감독의 표정은 더욱 썩어 문드러지고 있었다.
그렇게 누구에겐 가시방석 같고 누구에겐 고문과도 같던 술자리는 세 시간을 넘게 이어지다 한 감독이 사모님에게 등짝을 맞고 나서야 끝나고 말았다.
“들어가십쇼. 감독님.”
“어, 그래그래, 강 감독도 좋은 기회 올테니까 기다려 보라고. 응? 조심해서 들어가.”
벌겋게 술이 달아오른 한 감독이 떠나자 강석호 감독은 이제 자리를 떠나려는 동훈의 어깨를 틀어쥐고 말했다.
“건방떨지 마, 이 새끼야.”
술냄새가 확 풍기고 눈이 게슴츠레하게 풀린게 아주 제대로 취했다.
“취했으니까 들어가세요.”
“나 안 취했어, 인마. 나 몰라? 나랑 술 처음 마셔?”
하긴... 이 새끼는 아무리 술에 쩔어도 절대 필름이 끊긴 적이 없다.
그래서 술자리에서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전부 기억해서 나중에 꼭 돌려주기도 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요?”
“너 배급사 어떻게 잡았어?”
“어떻게 잡긴요? 제작사에서 잡은 거지.”
“까고 있네. x만한 ‘영화 세상’이 어떻게 SE엔터테인먼트를 잡아? 니네 대표가 엉덩이라도 대줬대?”
이 바닥이 원래 입이 걸레 같은 인간들이 좀 많은데 강 감독도 그 인간들에 당당히 포함될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제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내가 대표도 아니고, 영화 후반기 작업하느라 똥싸는 시간도 없었는데...”
이때 가만히 보고 있던 송수연이 나섰다.
“어머, 모르셨구나? 이번에 장동훈 감독님께서 만든 영화 개봉 못했으면 ‘영화 세상’ 망했을 거라는데요? 그래서 SE엔터 쪽에서 박 대표님 얼굴 보고 맡아줬다는데? 물론 다른 이유가 더 컸지만...”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박 대표님을 아세요?”
강 감독보다 오히려 동훈이 더 궁금해서 물었다.
“현주 언니한테 들었어요.”
“아... 친하신가봐요?”
“언니랑 친한 여배우가 몇 없는데 그중에 하나가 저에요. 모르셨구나?”
“네, 몰랐어요.”
“강 감독님도 오해하지 마세요. 감독님 배급 까인 거 장동훈 감독님 때문이 아니니까.”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자신이 모르는 뭔가가 있었던 게 그거였나보다.
강석호 감독은 술이 확 깨는지 눈을 똑바로 떠서 송수연을 쳐다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감독님 SE엔터한테 까인거 감독님 잘못으로 그렇게 된 거예요.”
“뭐?”
“감독님 연출부 중에 한 명이 SE엔터 임원 조카였거든요. 그런데 그 조카가 감독님한테 엄청... 음... 하여튼 악심을 품었더래요.”
강 감독은 대답도 못하고 멍하니 빈 술잔을 바라보았다.
송수연은 그런 강 감독에게 비웃는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그러게 밑에 스태프한테 잘 좀 해주지 그랬어요? 그 조카 다시는 영화판에 안 들어갈 작정하고 앞으로 감독님 작품 다 밀어낼 거래요.”
“그게 누군데?”
“저도 몰라요. 그리고 알아도 말씀 못 드리죠. 하여튼 그런 상황이니까 애먼 장동훈 감독님 잡지 마세요.”
“후... 시팔 인생 x같네. 하하, 시팔...”
강석호 감독은 충격이 컸을 텐데도 자리에서 일어나 뚜벅뚜벅 가게를 걸어나갔다.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말없이 소주잔을 든 송수연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거 흑기사한테 도움 받는 기분입니다.”
“제가 좀 의협심이 넘쳐서요.”
“강석호 감독을 좀 아십니까?”
“내가 첫 영화 오디션을 본 감독이 강석호 감독이었어요.”
“어? 강석호 감독 영화에 송수연 씨가 캐스팅 된 적이...”
강 감독의 밑에 있을 때 그의 영화는 하기 싫어도 억지로 봐야만 했기에 그의 영화에 누가 캐스팅이 됐는지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송수연이 그의 작품에 나온 적은 없었다.
“캐스팅 안 됐었어요.”
“그랬어요? 왜 그랬을까?”
농담이 아니라 진심으로 궁금해서 그렇게 물어본 거였다.
임현주에 비해 조금 급이 떨어진다고 했지만, 스타급 여배우의 미모는 어지간한 남자들은 말도 걸어보기 힘들 정도로 아름답다.
감독의 신분이 아닌 일반인이었다면 동훈 역시 지금 대화도 제대로 못할 게 분명할 만큼 수연은 그녀만의 청초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강 감독 첫 작품 기억나죠?”
“그럼요, ‘흔적도 없이’ 아닙니까?”
“거기 여주인공 친구가 강간을 당해 죽잖아요?”
“설마...?”
“네. 전 주연 오디션을 봤는데 그 친구역을 권하더라구요. 당시엔 드라마 조연으로 처음 얼굴을 알린 다음이라서 바로 주연이 안 될수도 있다는 생각에 오케이를 했는데 계약을 하고 나서 촬영장에서 갑자기 각본을 바꾸더라구요.”
“허... 그 인간 그때도 그랬나보네요.”
“알고 계시는구나? 그때는 더 심했죠.”
말 안해도 어떤 상황이었는지 알만했다.
아마 처음 계약했을 땐 노출을 안하는 걸로 계약했다가 촬영하는 날 노출을 하는 장면으로 촬영하려고 했을거다.
이게 당하는 입장에서는 거부하기가 힘든 것이 자연스러운 씬을 연출하기 위해 노출할 뿐이지 노출된 장면은 무조건 편집해서 나갈 거라고 설득하기 때문이다.
여배우가 절대 안 된다고 우긴다면 결국 계약을 취소하거나 감독이 물러서야 하는데 감독이 여배우에게 밀려 노출을 취소하는 순간 그 감독은 바보되는 거다.
송수연이 당시 영화에 출연하지 않았다는 건 그녀가 촬영 중 계약을 깨고 나갔다는 말이 된다.
신인이나 마찬가지였을텐데...
그녀 역시 한 성격 한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강 감독을 싫어하는 군요?”
“강 감독이라고 하기도 싫어요. 그 개새끼...”
“아...”
속으로는 충분히 그녀의 욕에 동감했다.
강 감독과 작업하는 내내 하루에도 열두번 넘게 그를 씹어댔기 때문에 그가 얼마나 개새끼인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나저나 영화 잘 나왔다는 거 축하드려요. 아까는 그 새끼 때문에 진심으로 한 축하가 아니었지만 지금은 진심이에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왜 현주 언니가 뿔났는지 알아요?”
“임현주 씨가 뿔이 났다구요?”
“그렇던데? 언론시사회 끝나고 나랑 와인 한 잔 했거든요. 그런데 기분이 많이 안 좋던데?”
“어... 글쎄요? 왜 그랬을까요?”
사실을 알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엔딩이 끝나고 쿠키영상에 나온 단역 배우 신세연이 너무 예쁘게 나와서 빡친 것 같다고 차마 말해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장면에서 현주가 책상에 맞아 엎어진 세연에게 총을 쏘고 끝나는 장면이라 내용상으로만 보면 세연이 당하는 거지만 문제는 세연이 현주에 밀리지 않을만큼 예쁘게 나왔다는 거다.
특히 단 둘이 대화를 나누는 짧은 씬에서 보인 세연의 매력은 관객의 눈길을 잡아 끌기에 충분했다.
본래 사람은 가장 마지막에 본 것을 오래 기억하는 법이라 현주는 더욱 기분이 나빴을 거다.
어쨌든 시치미 뚝 떼고 모른척 하자 송수연도 더 이상 그 문제를 가지고 캐묻진 않았다.
그런데 수연의 옆에 무명의 조감독 한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배우 이진혁이 동훈에게 말을 걸었다.
“장동훈 감독님, 혹시 괜찮은 시나리오 있으세요?”
아니 이게 왠 떡인가? 안 그래도 스타급 배우를 어떻게 모셔오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스스로 미끼에 몸을 던질 줄이야.
“아, 그럼요. 마침 준비하고 있는게...”
“잘 됐네요. 사실 제 친구가 괜찮은 작품을 찾고 있었거든요. 연기력 좋고 마스크도 좋은데 운이 너무 없어서 기회를 못 받고 있거든요.”
친구? 이 새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