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흥행의 신-14화 (14/116)

# 14

준비된 스타(4)

강대호는 단역배우라길래 그저 놀려줄 마음 반, 자신의 인상을 강하게 인식시킬 생각 반으로 제법 힘주고 리허설 상대를 해준 거였다.

그런데 막상 그녀의 입에서 대사가 나온 순간 멍하니 그녀의 입을 보다가 동훈이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대본 있어야 할 것 같은데요?”

동훈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대본은 됐어요. 스태프들은 계속 쉬셔도 됩니다. 세연 씨는 이리로 와서 잠깐 저 좀 볼까요?”

“네.”

아주 잠깐이었지만 연기를 처음하게 되면 민망하고 부끄럽기 마련이다.

세연 역시 다르지 않아서 새빨개진 얼굴로 총총 달려와 동훈의 옆에 앉았다.

누가 볼까 싶어 빨개진 얼굴을 감싸는 모습이 어찌나 예쁜지 과연 저쪽 차원에서 톱스타로 인기를 구가하던 그녀 다웠다.

“처음인데 예상 밖으로 잘했네요.”

“정말 괜찮았어요?”

“네. 잘할 거라고 믿고 있긴 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잘했어요. 스탭들 반응도 좋았고 카메라도 잘 받았어요. 모니터에 본인 모습 보이죠? 여기서 조금만 더 강한 모습을 보여주면 좋겠어요. 조금만 연습하고 오시면 촬영 당일에 더 괜찮은 모습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는 그녀에게 촬영 일정표를 건넸다.

“일정은 17일인데 아마 일주일 정도 빨라질 수 있어요. 그럼... 5일정도?”

“정확하게 나온건 아닌가봐요?”

“촬영이라는게 언제 변수가 생길지 모르거든요. 최대한 빨리 찍고 있어서 일정이 더 빨라질 수 있기는 해요. 그래도 세연 씨 준비할 시간은 있어야 하니까 일정이 당겨지더라도 세연 씨가 촬영할 씬은 최대한 맞추려고 할 겁니다. 그러니 다음 달 5일까지는 준비를 잘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준비라는게 연기같은 것만 연습하면 되는 건가요? 뭐... 다른 건...?”

그녀는 자신의 머리와 옷 같은 걸 손으로 쓸어내렸다.

“아뇨, 헤어, 메이크업, 의상 전부 손대지 않으셔도 돼요. 촬영장에 오시면 분장팀에서 다 손봐줄 겁니다.”

“그렇구나... 알겠어요.”

“그럼 그날 뵐게요. 오늘이나 내일 제작사에서 단역 출연계약서 때문에 연락 한 번 갈 거예요. 돈은 그리 많지 않지만 일단 스크린에 얼굴 도장 한번 찍으면 그 이후부터는 세연씨의 노력 여하에 따라 달라질 거예요.”

“음... 알겠어요. 그럼 그 때 뵙겠습니다.”

세연은 아직도 긴장이 가시지 않는지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도망치듯 촬영장을 빠져나갔다.

세연이 나가고 난 뒤 조감독인 경수가 쪼르르 달려와 물어본다.

“강은채가 맡았던 배역으로 확정난 겁니까?”

“어. 카메라 앞에서 달달 떨면 다른 배우 찾아보려고 했는데 꽤 강심장이었잖아? 그렇지?”

경수는 엄지를 치켜들었다.

“대박이던데요? 그런데 솔직히 걱정인게 현주 누님이 싫어할 것 같은데...”

“인마, 언제부터 임현주가 네 누님이냐? 촬영장에 형님 동생 하면서 살살거리면 현장이 제대로 돌아가겠어?”

“죄송합니다. 그래도...”

“감독 한 번 갈았으면 아무리 톱스타라도 할 만큼 한 거야. 여기서 더하면 제작사에서 가만 있지 못하지. 지 배우 인생 걸지 않을 거면 적당히 을러대다 그만할 거야.”

“알겠습니다.”

이후 촬영은 다시 순조롭게 진행됐다.

오히려 너무 빠른 템포에 스탭들은 물론이고 배우들까지 적응하기 힘들어할 정도였다.

중간에 임현주가 세연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지 은근히 어떻게 알게 됐냐고 물었지만, 우연히 알게 됐다며 구렁이 담 넘어가듯 넘어갔다.

결국 일정상 6월 말까지 아슬아슬 끝내야 할 촬영은 6월 첫째주가 되자 거의 모든 촬영은 마무리하게 됐다.

스태프와 배우들은 물론이고 제작사까지 믿을 수 없는 속도라며 동훈의 결과물을 의심할 정도였다.

6월 5일.

현장편집본을 다시 전문편집실에 넘기고 난 다음 마지막 씬인 쿠키영상 촬영을 위해 모였다.

스탭들은 마지막 촬영이라 그런지 다들 표정이 좋아 보였다.

어쩌면 당연한 것이 짜여진 일정에 비해 무려 3주나 빠르게 촬영이 종료되어 다들 생각지도 못한 휴가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특히 동훈과 마찰이 있었던 촬영 감독이나 조명, 미술 감독도 대놓고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촬영 내내 동훈의 의견에 토씨 하나 달지 않았으며 마지막에 가서는 평소 볼 수 없었던 미소로 가족들과 여행을 가니 마니 하며 기쁨을 드러냈다.

물론 그들은 이 영화가 절대 좋은 성적을 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말이다.

동훈도 스탭들이 영화 성적을 비관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오직 단 한 명, 현장에서 편집을 도와준 곽은정 실장만이 영화가 의외로 잘 나올 수도 있음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그녀도 어디 가서 영화가 잘 나올 것 같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현장 편집 경력만 10년이 넘은 그녀는 현장에서 편집한 영상으로 개봉 후 관객수를 예측한다는 게 얼마나 무의미한 짓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항상 촬영장에 가장 늦게 나오던 임현주가 오늘 촬영은 배우들 중 가장 빨리 나왔다.

콜타임보다 무려 한 시간이나 이른 시간대에 나와 스탭들을 놀라게 했지만 동훈은 그녀가 왜 빨리 왔는지 알 것 같았다.

“여기가 말로만 듣던 그 친구?”

현주는 세연이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쪼르르 다가와 관심을 표했다.

“아, 현주씨는 처음 보죠? 여기 신세연 씨. 세연 씨야 당연히 현주 씨 잘 알죠?”

“물론이에요. 안녕하세요. 신세연입니다. 언니 너무 팬이었어요. 언니 나오는 영화랑 드라마 다 봤어요. 이 자리에서 뵐 줄은 정말 몰랐는데... 너무 영광이에요.”

“영광은 무슨... 그런데 너~무 예쁘다.”

“아니에요, 언니가 훨씬 더 예쁜데요?”

현주의 칭찬에 담긴 살기를 세연은 느끼지 못했나 보다.

눈과 입은 웃고 있음에도 기묘하게 풍기는 이 살기에 동훈은 절로 몸이 떨릴 지경이었다.

“감독님은 어디서 이런 배우를 구하셨어요?”

갑자기 화살이 자신에게 날아오자 동훈은 시선을 피하며 화제를 돌렸다.

“운이 좋았죠. 어쨌든 리허설 준비 하시고 오늘도 빠르게 갑시다. 소품팀 권총 확인하시고 카메라 동선 체크할게요. 세연 씨는 대호 씨랑 대사 좀 맞춰보시구요.”

현주도 여기서 더 말을 이어갈 수 없는지 애써 웃음지으며 세연에게 잘 해보자는 마음에 없는 당부를 하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모두 스탠바이 할게요. 오늘 마지막 촬영입니다. 잘 마무리하고 회식 맛있게 합시다!”

경수가 분위기를 돋구며 스탠바이를 외치자 다시 스탭들의 눈에 마지막 긴장이 서렸다.

그리고 대호와 세연이 붙는 씬이 시작됐다.

“네가 이기면 내가 여길 떠나고, 내가 이기면 넌 죽는 거야.”

대호의 진지하면서도 우스꽝스러운 표정에 세연이 코웃음을 치며 노려본다.

전에 한번 연기했을 때도 그랬지만 오늘은 그때보다 더 표정이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세연이 대호를 제압하는 아주 짧은 액션, 세연은 이 짧은 액션을 위해 약 일주일 간 액션스쿨에 다녔었다.

“컷! 사이드로 한 컷 더 갈게요.”

“연기를 배운 적이 없다고 했죠? 그럼 끼가 대단한 거 같은데?”

동훈의 뒤에서 모니터를 바라보던 송병호 미술감독도 감탄했다.

“쑥쓰러워 하면서도 막상 카메라가 돌면 할 수 있는 연기는 다 하네요. 끼도 있지만 일단 배짱이 있어요.”

“흠... 그래, 그렇게 들으니까 맞는 것 같네. 연기를 배운 적이 없는 친구가 카메라 앞에서 쫄지를 않아.”

미술감독 뿐만 아니라 다른 스태프들도 세연의 연기력을 인정했다.

엄청난 연기력을 보여서 그런 게 아니라 연기를 배운적이 없는 것치고는 NG를 내지 않고 본인이 보여줄 수 있는 걸 다 보여준다는 것만으로도 인정하는 거였다.

그래서인지 두 번째 컷을 촬영하는데 저 멀리 긴장하며 바라보는 현주의 모습이 보였다.

“경수야, 너 가서 현주 표정 좀 풀라고 매니저한테 가서 말해.”

“제가요?”

“직접 말하지 말고 매니저한테 슬쩍 이야기하라고. 얼굴 굳은 것 같다고.”

“감독님께서 말씀하시면...”

“이 새끼가...”

동훈이 노려보자 경수가 움찔하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내가 가서 말하면 더 역효과 날 것 같아서 그래. 돌아가는 상황 모르겠으면 그냥 가서 말하고 와.”

“알겠습니다.”

지금 현주는 극도로 예민한 상태일 게 분명했다.

그런데 후배 앞에서 감독한테 표정이 굳었다는 둥 하는 지적을 당하면 어떤 반응이 나올지 몰라 매니저를 통해 전달하려는 거였다.

“컷! 그럼 43-2 가겠습니다.”

대호와 세연이 붙는 씬 촬영이 끝나고 이번엔 대호와 현주, 그리고 세연 이렇게 셋이 붙는 마지막 씬이 남았다.

현주와 세연이 긴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앉아 있고 가운데 대호가 심판 역할을 한다.

“집중하고, 대호 씨 바스트에서 쭉 당기면서... 레디, 액션!”

대호가 탁자 가운데에 총을 내려놓으며 현주를 향해 불끈 주먹을 쥐어 보인다.

그다음 현주가 세연에게 대사를 친다.

“너 성격 있다?”

“고마워요, 언니.”

“누가 언니라고 부르래?”

“고마워요, 선배.”

“누가 선배라고 부르래?”

대사와 분위기 자체가 긴장감 있는 상황이긴 하지만 실제 도훈을 비롯한 스태프들은 보여지는 대사를 넘어 이상하게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뒤...

쾅!

현주가 친 책상이 세연의 배를 때렸다.

“컷! 좋았어!”

말로는 좋았다고는 하지만 세연이 걱정된 동훈은 재빨리 달려나갔다.

그런데 동훈이 채 달려가기도 전에 현주가 오버하며 달려갔다.

“어머머, 어떡해! 괜찮아? 어떡해. 많이 아프겠다.”

“아, 아니,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동훈은 현주를 제치고 세연에게 다가가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아요?”

세연은 배를 가리며 인상을 팍 찌푸렸다.

“괜찮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녀는 걱정하는 동훈의 팔을 잡고 일어났다.

현주는 괜찮니 어쩌니 세연을 잡고 호들갑을 떨다가 그녀가 진정된 듯 하자 스탭들을 향해 외쳤다.

“괜찮을 거야. 너무 아프면 병원 가보고... 응? 오늘 고생하셨어요. 회식은 제가 쏠게요! 소고기 콜?”

“와아!”

스탭들이 환호하는 사이 동훈은 세연을 끌고 모니터 있는 곳까지 데리고 왔다.

“진짜 괜찮은 거예요?”

잔뜩 아픈 얼굴을 하고 있길래 걱정스레 물어보니 그녀가 혀를 쏙 내밀고 귀엽게 미소지었다.

“저 괜찮게 나왔어요?”

“네?”

“사회생활에서 이 정도 눈치는 기본이죠. 아휴, 나 오늘 현주 언니 처음 보자마자 잡아 먹히는 줄 알았잖아요.”

그녀는 언제 아팠냐는 듯 배에 감추어둔 얇은 잡지책을 쏙 뽑아들며 흔들고는 생긋 웃었다.

“그런데 나 정말 잘 나왔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