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
준비된 스타(3)
촬영장에 도착해 메이크업을 받고 리허설 준비를 하던 강대호는 멀리 촬영장 입구에 처음 보는 미녀가 연출부 막내와 이야기를 나누는 걸 목격했다.
글래머러스한 몸매에 베이비페이스인 그녀는 어딘가 모르게 고급스러운 아름다움이 내재되어 있었다.
한마디로 자신의 스타일이었다는 이야기.
조금 더 가까이 가서 보고 싶은 마음을 참고 서둘러 매니저를 불렀다.
“야, 쟤 누구냐?”
대호의 매니저는 저 멀리 보이는 미녀를 보곤 눈을 번쩍 떴다.
“어? 누굽니까?”
“그걸 모르니까 내가 물어본 거 아냐?”
“아, 그렇죠. 그런데 아까 조감독이 하는 말 잠깐 들었는데 오늘 새로 단역배우 하나 온다고 하던데 바로 쟤 아닐까요?”
“단역배우라고? 비주얼이 단역배우가 아닌데?”
“그렇긴 하죠?”
대호는 매니저의 얼빵한 표정을 보고 머리를 한 대 후려쳤다.
딱!
“악!”
“아프냐? 난 마음이 아프다. 내 마음을 몰라주는 너를 보면 참 마음이 아파.”
“죄, 죄송합니다.”
“나 촬영할 동안 신상명세서 쫙 뽑아가지고 와라.”
“알겠습니다.”
*
세연은 그저 당황스럽기만 한 동훈의 대답에 손에 든 대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세히 보니 대사는 몇 마디 되지 않았고 전부 지문으로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묘사되어 있었다.
“대사가 많지는 않으니까 그렇게 부담스럽진 않을 거예요.”
대사가 단 한 줄만 있어도 연기가 달라지니 크게 도움 되는 말은 아니다.
사실 강은채가 받았던 대본은 이것과 비슷하지만 대사가 조금 더 많은 것이었는데 세연에게 주기로 마음 먹으면서 상당부분의 대사를 날렸다.
안 그래도 첫 연기라 어려울 텐데 대사까지 많으면 아무것도 못하고 덜덜 떨다 끝나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긴 한데...”
“그리고 미술팀이 손댈 필요가 없을 정도로 너무 예쁘게 하고 오셔서 뭐라도 하나 시키고 싶은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세연이 황급히 두 손을 저었다.
“아니요, 아니요. 괜찮아요. 뭘 아는 것도 없는데 바로 시작한다는 것도 우습고 그러니까 일단 가져가서 한번 볼게요.”
아마 처음에 올 때는 기죽지 않으려고 최대한 예쁘게 하고 왔는데 막상 촬영장에 오니 떨리나 보다.
“그럼 일단 촬영하는 거 보고 가요. 카메라 앞에서 어떻게 연기하는지, 리허설은 어떻게 하는지 봐야 하니까.”
“네. 그렇게 할게요.”
동훈은 리허설 준비중인 대호를 향해 외쳤다.
“강대호 씨, 리허설하고 바로 들어갈게요. 준비되셨죠?”
강대호는 안 그래도 새롭게 나타난 여배우 때문에 온 신경을 감독이 있는 자리로 향하고 있었다.
“아, 네! 1분만 기다려주세요.”
대호는 자신의 매니저를 향해 고개를 홱 돌리며 물었다.
“뽑아왔어?”
“제가 가서 연출부 막내한테 들었는데요. 단역배우 맞답니다.”
“맞다고? 무슨 소리야? 단역배우가 왜 감독 옆에서 모니터를 보고 있어?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있네? 제대로 알아 온 거 맞아?”
대호 매니저는 자기가 생각해도 이상한지 감독 옆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세연을 보고 고개를 갸웃한다.
“맞는데? 은선 씨가 전달받기로 단역 배우라고...”
“단역배우가 맞다는 거지?”
“확실해요. 단역배우 맞대요.”
“그럼 신인배우라는 건데... 소속사는?”
“소속사도 없답니다. 감독님이 직접 캐스팅했대요.”
“오호... 저번에 강은챈가 머시긴가 하는 걔가 때려치고 나가서 직접 구해왔다는 거지? 장 감독 능력 있네?”
대호는 턱을 쓰다듬으며 세연을 흘깃 보고는 헛기침을 하며 매니저에게 말했다.
“크흠... 일단 이 오빠의 섹시함을 보여줘 볼까? 으흥...”
대호는 콧노래를 부르며 중견배우와 함께 리허설을 준비했다.
*
동훈은 옆에 앉은 세연에게 말했다.
“잘 봐요. 일단 카메라로 연기를 담기 위해선 일종의 연습이 필요한데 그게 바로 리허설이거든요. 잘 보고 어떤 준비를 해야 할지 스스로 생각해봐요.”
“네.”
“대호씨, 리허설 시작할게요.”
세연은 모니터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대호의 연기를 주시했다.
평소 TV를 통해서만 연기하는 걸 봐왔는데 실제 현장에서 배우들이 연기하는 모습을 보니 놀랍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할 거다.
여기서 연기에 재능이 있는 친구라면 스타의 연기를 보고 주눅이 들기 보다는 도전 욕구가 샘솟기 마련이다.
역시나 세연의 손가락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지만 두 눈은 모니터에 고정된 듯 떼지 않았다.
반면 대호는 자신의 연기를 모니터를 통해 바라보고 있을 세연을 의식하며 평소보다 강하게 대사를 토해냈다.
“저 하리마오 할 수 있습니다!”
“네까짓 게 무슨 하리마오야? 하리마오가 아무나 되는 줄 알아?”
동훈은 고개를 갸웃했다.
평소 연기를 저렇게 진하게 할 사람이 아닌데 오늘 이상하게 전체적으로 힘이 들어가 있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그냥 두고 여러 컷을 잡아가면서 흐름을 맞췄을텐데 이제 원하는 장면을 두고 한 컷만 찍어가는 상황이었기에 그냥 둘 수 없어 한마디 했다.
“대호씨, 너무 잡아먹을 듯 하지 말고 힘 좀 빼보죠.”
순간 대호는 멈칫하며 헛기침을 했다.
“크흠... 제가 너무 몰입했나요?”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동훈은 그의 눈길이 세연의 얼굴을 스치듯 지나간 걸 놓치지 않았다.
‘이 새끼... 촬영장에서 한 눈 팔기는...’
평소 강대호가 사생활이 문란하든 말든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
그 나름대로의 사생활이 있는 것이고 어차피 여자도 좋으니 서로 사귀고 물고 빨고 할 것이 아닌가?
하지만 세연은 이제 막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을 준비된 스타다.
괜히 나쁜 물 들어 스타가 될 재목이 안 좋은 일에 휘말리게 되면 그건 안타까운 일이다.
“몰입했다기 보다 전체적으로 힘이 많이 들어갔어요. 목소리톤도 조금 낮추고 눈도 너무 부릅떴으니까 전체적으로 안면근육 좀 풀어봅시다. 남주인공 캐릭터가 그런 캐릭터는 아니잖아요?”
“아니, 큼큼... 네. 알겠습니다.”
대호는 뭐라 반박하려다 그냥 알겠다고 넘어갔다.
동훈이 촬영감독을 비롯한 스탭들과의 힘싸움에서 보여주듯 한 성깔 하는 걸 알기 때문이다.
“대호 씨 연기 좋아요. 힘만 조금 빼고 갑시다. 한 번만 더 볼게요.”
재차 한 리허설은 동훈의 당부가 통했는지 한결 자연스러워졌다.
세연은 그걸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어떤 차이가 있었는지 알아차렸는데 그걸 본 동훈도 그녀가 재능이 있는 친구였음을 알아차렸다.
평소 연기력이 상당한 친구여서 이후 실제 촬영시 NG없이 한 번에 오케이 됐고 이후 몇 번의 촬영도 무사히 진행됐다.
“컷! 수고하셨습니다. 잠깐 쉬고 씬 21-3 가겠습니다.”
동훈은 조감독인 경수에게 전파한 후 세연에게 고개를 돌렸다.
“어때요?”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뭔가 느끼는 게 있지 않아요?”
“그냥 뭐랄까... 대단한 것 같아요. 이렇게 힘들게 촬영하면서 그렇게 멋진 작품이 나오다니 다들 정말 고생하시네요. 그리고 강대호 씨도 너무 멋있고... 만약에 임현주 언니를 보게 되면 진짜 놀라 환호성을 지를 것 같아요.”
아마 만나게 되면 현주의 거친 성격에 다른 의미로 놀랄 수 있지만 그건 말하지 않기로 했다.
“일단 이렇게 예쁘게 차려입고 왔으니까 한번 연습해볼까요?”
세연은 화들짝 놀랐다.
“네? 지금요?”
“네. 연기한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그냥 부담없이... 어차피 세연씨 촬영할 세트가 저거라서 미리 연습한다 생각하시고 그냥 가서 앉아보세요. 어서요.”
세연은 더 이상 사양하지 못하고 주춤주춤 일어나 세트장에 꾸며진 회의실 의자에 앉았다.
반대편 1번 카메라를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던 동훈이 외쳤다.
“조금 클로즈업 해볼게요.”
점차 긴장한 그녀의 얼굴이 확대된다.
상기된 얼굴과 쉬지 않고 가늘게 떨리는 가느다란 손가락.
“시선 카메라 정면 보세요. 카메라 피하지 말아요. 정면!”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피하던 그녀의 눈길이 카메라에 맞춰지는 순간 오동철 카메라 감독이 자신도 모르게 나직한 감탄을 내뱉었다.
“야... 마스크 죽이는데?”
동훈은 여전히 긴장한 그녀에게 소리쳤다.
“대본 아까 읽었죠? 한 줄 기억나요? 기억 안나면 보고 읽어도 되요.”
“기억나요.”
동훈은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어느새 옆으로 다가와 같이 모니터를 보고있는 대호에게 말했다.
“가서 상대 좀 해줄래요?”
“좋죠.”
이걸 기다렸다는 듯 대호가 종종거리며 그녀의 맞은편으로 걸어갔다.
“대사 딱 한 줄만 해볼게요. 어차피 정식으로 촬영하는 거 아니라 느낌만 보는 거니까 긴장하지 말아요. 그냥 느낌만 보는 거예요. 느낌만...”
세연은 긴장한 채 대답도 못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이때 세연의 앞에 놓인 대본을 슬쩍 본 대호가 탁자를 ‘탕’ 치며 소리쳤다.
“이 총을 빨리 집는 사람이 이기는 거야. 괜찮지? 늦으면 죽어.”
화들짝 놀란 세연이 두 눈만 껌뻑이며 당황할 찰나 동훈이 소리쳤다.
“몰입해요! 그리고 대사 쳐봐요! 그리고 상대방 연기에 주눅들지 말아요! 다시 한번 해볼게요.”
10초의 시간이 지난 후 대호가 다시 한번 소리쳤다.
“이 총을 빨리 집는 사람이 이기는 거야. 괜찮지? 늦으면 죽어.”
동훈을 비롯한 모든 스탭이 자신도 모르게 일제히 숨을 죽인 그 순간,
세연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으며 다리를 꼬았다.
그리고 팔짱을 끼며 대호를 향해 비웃었다.
“흥, 그러시던가.”
팔에 두드러기가 올라오듯 소름이 확 돋았다.
그리고 그때 언제 다가왔는지 조명감독의 기대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조명을 좀 더 올려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