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흥행의 신-12화 (12/116)

# 12

준비된 스타(2)

생전 처음 보는 번호였지만 이상하게 느낌이 왔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저기... 장동훈 감독님 맞으신가요?”

그날 짧은 만남 이후 헤어져서 한동안 만나지 못했지만, 목소리는 잊지 않고 있었다.

잊을 수가 없다. 그녀가 출연했던 많은 작품들이 전부 기억나니까.

“네. 누구시죠?”

괜히 먼저 아는 척하고 싶지 않아 일부러 모르는 척 의뭉을 떨었다.

“저... 전에 저에게 명함 주고 가셨는데... 밤에 괴롭힘당하던 여자애 도와줬었던...”

“아! 기억나요. 그때 어두웠지만, 얼굴 잊어먹지 않고 있어요.”

“그런가요? 하하.”

어색한 웃음이지만 분명 자신을 기억한다는 데서 안도감을 느꼈음이 확실했다.

“그때 보조 출연으로 한번 와보시라고 제안 드렸었는데 그것 때문에 연락하신 건가요?”

“네. 아직 배우가 되겠다고 마음 먹은 건 아닌데요. 동생이 경험해봐서 나쁠 것 같지 않다고 하고, 저도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서 연락 드렸어요.”

“그럼요. 다양한 경험을 해서 나쁠 것 없습니다. 설사 배우를 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 경험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많은 도움을 줄 겁니다.”

솔직히 아무 없이 아무말이나 지껄인 말이다.

보조 출연 경험이 인생에 얼마나 도움이 되겠는가?

“그렇겠죠?”

“그럼요. 물론입니다.”

인생의 경험 때문에 보조 출연을 선택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부분 일당으로 주는 급여, 그리고 스타를 눈앞에서 볼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며 아주 가끔 배우를 꿈꾸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다.

그녀는 분명 배우에 대한 강한 호기심 때문에 연락을 했다고 확신했지만 모른 척 그녀에게 아무 부담 없이 촬영장에 올 수 있도록 핑계를 만들어 주었다.

“그럼 언제쯤 가면 될까요?”

“언제 시간 되시는데요?”

“회사에 오늘부터 일주일간 휴가 냈어요. 미리 휴가 내지 않으면 비행 스케줄 때문에 마음대로 휴가 낼 수 없거든요.”

무려 일주일간이나 휴가라니 잘 됐다.

“그럼 제가 주소를 문자로 찍어 드릴테니까 한번 오실래요?”

“지금요?”

“네. 올 수 있다면 오셔서 분위기도 보시는 게 낫죠. 혹시 강대호 아세요?”

임현주만큼은 아니지만 강대호는 요새 꽤 잘나가는 남자배우다.

서글서글한 성격에 능청스러운 연기도 잘해 영화판에서도 인정받고 있다.

다만 워낙 강한 성격의 현주와 작업하고 있어 그의 존재가 별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실제 현주가 그보다 훨씬 선배이기도 해 그는 현장에서 현주와 대화 할때마다 ‘선배님’, ‘선배님’ 하면서 잘 따랐다.

“강대호요? 당연히 알죠.”

“제가 전에 임현주 씨가 우리 영화 주인공이라고 말씀드렸죠? 남자 주인공은 강대호에요. 마침 오늘 강대호 씨 촬영날이라서 오시면 가까운데서 볼 수 있을 겁니다.”

굳이 오늘로 이야기 한 건 딱 오늘과 내일이 현주의 촬영이 없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임현주가 신세연을 봐서 큰일 난다는 건 아니지만 괜히 세연을 보고 신경쓰이게 해서 좋을리 없다.

아무리 지금까지 배우급 관리를 받아오지 않았다고 해도 신세연의 미모는 앞서 방문했던 강은채의 미모와 비교를 불허하니까.

분명 보자마자 왜 이 자리에 있는지부터 꼬치꼬치 캐물을 게 분명했다.

“와 진짜요? 그럼 오늘 갈게요.”

아싸!

“네, 그럼 주소 찍어드릴께요, 여기가 남양주인데 대충 어느 정도나 걸릴 것 같으세요?”

“어...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2시간 정도는 걸릴 것 같은데...”

“알겠습니다. 그럼 오시면 연락주세요.”

전화를 끊은 동훈은 허공을 향해 몇 번 주먹질로 침묵의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 모습을 조감독인 경수가 보고 다가와 물었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습니까?”

“어? 어. 이따가 보조 출연자 하나 올거야.”

“보조 출연자요? ‘좋은 친구들’에서 추가로 부른 건가요? 조필연 실장한테서 연락 못 받았는데?”

경수가 말한 ‘좋은 친구들’은 단역배우 전문 인력업체로 이번 영화 제작에 필요한 단역배우를 제공하기로 계약한 곳이다.

그리고 조필연 실장은 그 ‘좋은 친구들’의 계약 담당자다.

“아니, 내가 따로 불렀어.”

“감독님께서 따로 불렀다구요? 친척이에요?”

“아니.”

경수가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감독 개인 자격으로 단역배우를 부르는 경우는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간혹 감독의 가족이나 친척을 단역배우로 쓰는 경우는 있다.

스타를 눈앞에서 볼 수 있는 기회를 주려고 일부러 부르는 건데 그 외에는 대부분 제작사나 인력업체를 통해 배우를 섭외한다.

“그럼...?”

“그냥 아는 사람. 단역으로 보면 되긴 하는데... 잘하면 조연으로 쓸 수도 있어.”

“그럼 어떤 역할까지 생각하고 있는데요?”

“강은채가 맡으려던 거.”

“와... 굉장한 미녀인가 봐요? 연기는 거의 초보일테고.”

“왜 그렇게 생각했어?”

“이름값 떨어지면서 미인에 연기력이 괜찮은 사람이 있으면 회사에서 데리고 오지 않았겠어요?”

역시 경수가 센스가 있다는게 여기에서도 드러난다.

“오! 생각 좀 하는데? 맞아. 일종의 길거리 캐스팅이긴 한데 배우에 대해 아직 잘 몰라. 가능성은 있는데 말이야.”

“알겠습니다. 그럼 분장팀한테 미리 한 사람 더 올 수 있다고 말해둘게요.”

오늘 촬영을 안 할 가능성이 커서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려 했지만 그만두었다.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만진 마스크를 카메라에 담아보는 것만으로도 괜찮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전 촬영을 마치고 도시락으로 점심을 때운 후 한창 졸음이 몰려오는 1시가 될 무렵 경수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감독님, 말씀하셨던 그분이 오신 것 같은데요?”

어떻게 생겼고 이름이 뭔지도 말하지 않았지만 단박에 그녀라고 확신하면서 입가에 미소가 한그득 하다.

“그래?”

“네. 어디선 저런 분을 만나셨대요?”

“운이 좋았어.”

맞다. 운이 좋았다. 그것도 아주 많이...

“일단 막내가 잡아두고 있는데 가서 모셔오라고 할까요?”

“아니야. 내가 갈게.”

세트장 입구로 이동하니 연출부 막내 은선이와 대화를 나누는 세연을 볼 수 있었다.

은선이는 동훈을 보자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곤 쌩하니 달려 스탭들 사이로 사라졌다.

아마 갑자기 등장은 세연의 존재를 가지고 미주알고주알 얘기하고 다닐게 분명했다.

반면 동훈은 화사한 쉬폰 원피스를 입고 온 그녀를 본 순간 웃음이 튀어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참았다.

흰티에 청바지만 입고 와도 되는데 맞선보러 나가는 아가씨처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힘을 꽉 준 것을 보면 얼마나 빡세게 준비했을지 눈에 선했다.

“오셨어요?”

“안녕하세요.”

현장에서 직접 마주하니 더 실감나는지 조금 상기된 얼굴로 주변을 돌아본다.

“여기가 말로만 듣던 촬영장인가 봐요? 되게 신기하다.”

그녀는 신기한 듯 두리번거리면서도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가볍운 일로 흥분하지 않는다는 건 연기를 함에 있어 중요한 부분이라 연기를 하기 전부터도 마음에 들었다.

어쩌면 눈앞에 자신이 스타인 줄도 모르는 스타를 영접한 기분일지도 몰랐다.

“그때 이름을 안 물어봤는데, 이름 좀 알려줄래요?”

“아, 저 신세연이에요.”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했었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확인하니 안심이 됐다.

“좋은 이름이네요. 일단 가시죠.”

“네.”

동훈은 모니터 앞에 미리 가져다 놓은 한 페이지짜리 대본을 들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이건...?”

“두 가지 선택이 있어요. 그냥 분위기만 보고 앞모습이 나오지 않는 정말 순수 단역으로 경험만 하고 가는 경우. 그리고 대사가 있는 단역배우.”

“두 가지 중에 선택하면 된다는 거죠?”

“맞아요.”

“근데 왜 앞모습이 나오면 안 되는 건가요?”

“단역배우는 너무 잘생겨도 안 돼요. 짧은 순간이지만 관객의 시선을 빼앗거든요. 그게 주인공이면 괜찮은데 대사 하나 없는 단역이면 관객이 흐름을 놓치게 되죠. ‘저 여자가 분명 무슨 역할이 있을 텐데...’ 하면서.”

“아... 이해가 돼요. 그런데 전 연기 공부도 안 해봤고 경험도 없는데 대사 있는 걸 바로 할 수 있는 건가요?”

그녀는 자신의 손에 들린 한 페이지 대본을 아주 부담스럽게 들고 있었다.

그게 당연한 거다.

처음부터 잘 할 수 있다고 나서는 게 더 이상하다.

오히려 이상한건 감독이 되야 맞다.

아마 연기 한번 해본적 없는 친구한테 다섯 줄 이상의 대사를 내뱉는 배역을 줬다고 하면 그걸 더 의아해할 거다.

“할 수 있을 겁니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세요? 외모와 연기는 다른 거 아니에요?”

본인이 본인 입으로 예쁘다는 말이 부끄러운지 얼굴이 빨개진다.

“당연히 다르죠. 그런데 그냥 감이 그래요.”

“감이요?”

“네. 세연씨가 아주 대단한 배우가 될 것 같은 감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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