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흥행의 신-7화 (7/116)

# 7

배우 할 생각 없으세요?(1)

영화도 드라마도 마찬가지지만 얼마나 사전준비를 탄탄히 했느냐에 따라 들어가는 돈이 천차만별로 달라지곤 한다.

간혹 수십, 수백억 원이 들어갔지만 형편없는 퀄리티를 보이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도대체 그 돈이 다 어디로 간 건지 의구심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을 거다.

그런 작품들은 대부분 사전준비를 개떡같이 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들이다.

어떤 장면에 어떤 CG를, 어떤 장비를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감독이나 작가의 머릿속에 없었기에 촬영이 딜레이 되고 생각지도 못한 소품이 들어가며 제작비가 눈덩이처럼 커지는 거다.

그렇기에 프리 프로덕션을 충실하게 해야 하는데 이렇게 촬영 중간에 각본을 확 바꿔버리면 대게 경우 영화는 죽도밥도 되지 않는다.

“허... 묘하네.”

박만구 대표는 담배 하나를 꼬나물고 오 상무와 유 팀장을 향해 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유 팀장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죠? 솔직히 말하면 귀신이 썼나 했다니까요. 어떻게 이렇게 우리가 딱 원하는 걸 가지고 왔는지...”

“그래서 제작비는?”

“미술팀하고 의상팀 준비한거, 놀이공원 현장이랑 그 외 현장 몇 군데 섭외비용으로 꽤 나가긴 했는데 자동차액션씬을 날려서 제작비 세이브한게 더 큽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제작비는 많이 줄어들었어요.”

“얼마나?”

“대략 2억 정도? 자세한 건 정리해서 올리겠습니다.”

“흠... 좋네. 오 상무 생각은 어때?”

오 상무는 테이블 위에 서류를 꺼내 내밀곤 말했다.

“중반까지 정리해 놓은 콘티도 다 봤는데 정말 예상 밖인데요? 중간에 바꾼 각본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완벽하게 준비돼 있습니다. 퀄리티만 보면 최소 석달에서 반년 정도 고심했어야 하지 않나 싶은데... 장동훈 감독이 미리 준비했던 작품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래? 잘됐네. 투자자들도 여기서 엎어지는 것보다 장동훈 감독이 바뀐 각본으로 가는 걸 오케이 했으니까 잘 밀어주라고.”

“네, 그런데 안 감독은...”

오 상무의 물음에 박 대표가 손가락을 책상에 탁탁 부딪치며 기분이 몹시 안 좋음을 드러냈다.

“얼마나 나갔지?”

“계약금이랑 중도금해서 1억 4천 나갔습니다.”

“많이도 받아 처먹었네. 그쪽에선 뭐래?”

“안 감독이야 계약서상에서 자신의 귀책사유는 없으니 절대 돌려줄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아 물론 안 감독님한테 들은 얘기가 아니라 감독님 가족분들한테 전해들은 말입니다.”

“그거나 그거나... 와이프한테 그렇게 말하라고 시켰겠지. 젠장할... 대원 애송이가 지랄지랄 하겠네?”

“아무래도 그렇죠.”

“좆또, 지가 만든 아사리 판이니 지가 책임져야지. 안 감독한테 준 돈은 우리가 건들 수 없다고 해. 제작비에서 쌩돈 나간셈 쳐야지.”

“알겠습니다. 대표님도 너무 아까워하지 마십쇼. 어쩌면 안 감독 이상으로 대박 신인 감독 하나 물었다고 생각하면 제작비 1억 4천은 뭐...”

“그러자고. 그것도 우리 돈도 아니고 남의 돈으로 하나 물었으니 꽤나 남는 장사지?”

“이제 시작이라 결과가 나와야 확실해지겠지만 지금까지 이렇게 완벽한 준비를 보여준 신인 감독이 없어서 기대가 안 될 수가 없네요.”

“흐흐... 시팔, 이거 망하면 너랑 나랑 한강물 들어가는 건데 인생 참 알 수 없다니까. 나 진짜 안철호 감독이 잠수타버렸을 때 눈앞이 노랬다. 내가 중학교 다닐 때 우리학교 통한테 한 대 얻어맞을 때 딱 그 느낌이었다니까. 진짜 노랬어.”

오 상무는 조금은 초췌해진 얼굴로 목소리를 낮췄다.

“어쨌든 대원에서 장 감독을 좋게 본게 다행입니다. 투자금 뺀다고 했으면 정말 인건비 때문에 회사가 어떻게 됐을지...”

“어떻게 되긴, 우리도 죽고 지들도 돈 날리는 거지. 대원의 그 애송이도 어쩔 수 없었을 거야. 아무리 지가 대표라고 해도 돈 30억을 허공에 날리는 게 쉽겠어? 장동훈이 자리에 앉혀놓고 뭐라도 나오길 기도하는 수밖에 없지.”

박 대표는 자신의 앞에 놓인 커피를 단숨에 들이키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어디로요?”

“돈 빌리러 가야지. 직원들 임금만 주면 땡이냐? 회사도 굴러가야 할 거 아냐? 인감 챙겨서 따라 나와.”

*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심란한 마음에 고개를 들어보니 벌써 밤 11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촬영이 끝났다고 집에서 마냥 쉰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특히 지금처럼 프리프로덕션 기간 없이 중간에 들어와서 모든 걸 처리해야 하는 상황에선 촬영 후 향후 일정과 다음날 촬영 소품 등을 꼼꼼히 체크해야 한다.

촬영이 하루 펑크나면 제작비는 최소 천만원이 공중으로 날아간다고 보면 되고 이렇게 어영부영 2, 3일이 넘어가는 순간 돈 2, 3천만원이 훅 날아가버리는 거다.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이유다.

하지만 긴장은 긴장이고 배고픈건 배고픈거다.

아직 일이 끝나지 않았기에 이대로 버티는 건 몸을 축내는 일이라 대충 옷을 갖춰입고 코딱지만한 옥탑방을 나섰다.

집 근처 24시간 순대국집에서 한그릇 뚝딱하고 슈퍼에 들러 간식거리를 비닐봉투에 담아 덜렁거리며 거리를 걷는데 어두컴컴한 골목길에서 제법 사나운 소리가 들려왔다.

“뭘 꼴아봐? 눈깔을 확 파버릴라.”

“죽고싶냐? 어?”

만약 저 목소리의 주인이 남자였다면 동훈은 뒤도 안 돌아보고 아주 조용히 집으로 들어갔을 거다.

자신의 몸은 소중한 거니까.

그런데 웃기게도 목소리의 주인공이 여자라 호기심이 돌았다.

잠시 머뭇거리다 결국 못참고 발걸음을 돌려 목소리가 들린 근원지를 향해 다가갔다.

“지랄하네. 내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

“이게 진짜 죽고 싶어서...”

가까이 다가가니 대여섯명의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이 누군가를 하나 둘러싸고 위협하고 있었다.

동훈은 혹시 주변이 남학생이 있는지 잠시 살펴보다가 이내 헛기침을 하며 나서려는 순간,

“이런 씨... 어린 것들이 지금 뭐하는 거야? 어?”

어떤 여자가 후다닥 달려와 무리들 사이에 뛰어들었다.

그리곤 무리에 둘러쌓여있는 여자애의 앞을 가리며 큰소리를 쳤다.

“어린 것들이 나쁜것만 배워가지고는, 어! 빨리 꺼져.”

“아이씨... 짜증나게.”

“너희 학교 어디야? 선생님한테 연락드려야겠네. 너희 이름 뭐야?”

그녀가 그래도 학교를 건드려서일까? 처음에는 기세등등하던 여학생들이 움찔하며 물러선다.

“동... 명 여고? 이 근처에 있는 학교네. 그치? 3학년...”

“아 재수없어. 야, 너 한번만 우리 오빠한테 꼬리치면 그땐 정말 죽여버릴거야. 명심해. 가자.”

정의감이 대단한 그녀는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가슴이 붙은 명찰을 자세히 살펴보며 중얼거렸고 결국 여학생들은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동훈은 멀어져가는 여학생 무리들을 보다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무슨 남자가 거기서 쳐다보고만 있어요?”

“어? 아니... 나서려고 했는데 당신이 나서길래...”

말을 하면서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두 손을 옆구리에 올리고 불평을 내뱉는 그녀는 상당히 예뻤다.

동훈은 몇 십년 간 수많은 여배우들과 같이 작업을 했기에 얼굴이 예쁘다고 해서 확 마음이 쏠린다거나 흔들리지 않았다.

단지 누굴 보게되면 남자나 여자의 외모가 화면에 어떻게 나오게 될지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버릇, 일종의 직업병이다.

화면으로 보는 외모와 실물은 상당히 다른데 실물로 아무리 잘 생기고 예쁘다고 해도 카메라로 봤을 때 아름다움을 잘 모르는 경우도 많다.

반대로 카메라로 보면 여신이나 다름 없는데 실제로 보면 너무 말라서 아름다움을 느끼기 보다는 안쓰러움을 느끼게 되는 경우도 많다.

또한, 직업적으로 본다는 건 이 외모가 카메라에 잡혔을 때, 어떤 감정표현이나 어떤 연기에서 어느 정도로 나올지 무의식중에 평가하는 것도 포함된다.

그렇기에 조금 더 자세히 보고 싶었지만 어두운 밤길의 골목에서 있어서 그런지 아름답다는 느낌은 확실히 받았지만 더 가까이 볼 수 없어 내심 안타까웠다.

이때,

“누가 도와 달라고 했어요?”

학교 가방을 멘 여학생이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여자를 향해 날을 세웠다.

길거리에 지나다니는 들고양이가 이럴까?

그녀는 동훈과 여자를 보면서도 날카로운 발톱을 보이며 경계했다.

그저 말뿐이 아니라 묘하게 서글퍼 보이는 저 눈으로 눈꼬리를 한껏 치켜뜨고 있어 조금이라도 다가오면 거시기를 한 대 걷어차 주겠다고 결심한 것처럼 보였다.

교복에 가방을 멘 그 여학생도 분명 굉장히 예뻐 친구들로부터 질투를 받을만 했다.

다만 아직 어렸고 동훈은 저렇게 어린 여자는 여배우로 생각하지 않았기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여자도 굳이 설득할 생각이 없는지 한 걸음 물러서며 쿨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 난 도와달라는 줄 알았지. 날 빤히 보고 있었잖아.”

“아닌데요?”

순간 목소리가 떨린 걸 보니 동훈의 넘겨짚은 게 맞았다.

“아니면 말고... 깡이 제법이니 집까지 같이 안 가줘도 되지?”

“언니가 왜 우리집까지 같이 가요? 필요 없어요.”

“그래, 그럼 잘가.”

쿨하게 여학생을 보내준 여자는 동훈을 돌아보더니 싱긋 웃었다.

그 웃음이 어찌나 맑고 예쁜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정도였다.

“그래도 세상 살만한가 봐요. 정의의 사도도 있고.”

“정의의 사도가 입도 떼기 전에 먼저 나섰으면서.”

“내가 성격이 좀 급해서요.”

“아...”

나이는 이십대 초반에서 중반으로 보였다.

낮이었으면 더 정확하게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럼...”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몸을 돌렸다.

동훈을 그녀에게 이름을 물어볼까 했지만, 어느새 그녀는 골목을 돌아 사라지고 말았다.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한숨.

“후... 어? 그런데...”

처음엔 그냥 예쁘게 생긴 여자라고 생각했는데 고개를 돌리고 나니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봤는데... 누구지? 어디서 봤더라...”

한참을 고개를 갸웃거리며 걸어가던 동훈은 순간 머리에 벼락을 맞은 것처럼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 거, 거기에 나왔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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