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흥행의 신-6화 (6/116)

# 6

난관... 아니면 기회(3)

동훈은 그 말을 듣자마자 뒤를 홱 돌아보며 유 팀장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녀는 미처 말해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눈빛을 보냈고 동훈은 일단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하곤 표정을 관리했지만 임현주는 달랐다.

“누구?”

한순간에 달라진 그녀의 어투에 분위기가 싸늘히 식었다.

스태프들은 다들 자신의 자리로 뿔뿔히 흩어졌고 유 팀장은 매섭게 노려보는 현주에게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주연은 절대 아니에요. 그냥 조연이고... 아니, 그 정도면 아예 단역 수준이다. 대사 몇 마디 나올까?”

“분량이 어느 정도인지는 유 팀장님이 아니라 감독님이 말해주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렇기는 한데 나도 모르는 배우를 어느 배역에 어느 정도 분량이 나올 거라고 어떻게 말해줄 수 있을까?

하지만 이 자리에서 ‘난 모르는 일인데?’라고 생까버리면서 제작사와 갈등할 필요는 없다.

솔직히 단역 여배우 하나 꽂아주는 거야 아무 문제도 아니거니와 이번 일을 빌미로 제작피디에게 많은 걸(?)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별거 아닙니다. 마지막 장면 엔딩크레딧 올라갈 때 잠깐 나오는 거예요. 현주씨랑 정면으로 붙긴 하는데 현주씨한테 완전히 당하는 역이죠.”

“당해요?”

“네, 제대로 쥐어 터지거든요.”

그제야 만족했는지 현주가 다시 표정을 온화하게 되돌리며 배시시 웃음짓는다.

“난 또... 그런데 벌써 엔딩크레딧에 올라갈 최종 각본이 다 나온거예요? 이거 원래 준비하던 작품이었나?”

“맞아요. 원래 준비하던 작품이라 콘티까지 완벽히 준비돼있으니까 연출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말았으면 좋겠네요.”

은근히 뼈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는지 임현주는 살짝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감독님의 연출을 의심한 적은 없어요. 오해하지 말아주세요. 그럼 저 준비할게요.”

현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자리로 가 앉으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눈을 감았다.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붓이 빠르게 그녀의 얼굴을 누비는 걸 보고 동훈은 한숨을 내쉬며 유 팀장에게 인상을 긁었다.

“뭡니까?”

“죄송해요. 오늘 아침에 결정된 거라...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감독님께서 스크립터랑 계속 콘티 관련해서 대화 나누시느라 바쁘셔서 타이밍을 못 잡았어요.”

“그건 됐고, 갑자기 어디서 날아들었는데요? 예정에 없던 거였잖아요?”

아주아주 다행인 건 엔딩크레딧에 올라갈 단역 배우까지는 생각해둔게 없었다.

더 정확하게는 생각해두지 않았다기보단 아예 그 부분은 머릿속에 없었다고 보는 게 맞았다.

억지로 끼워맞춰주긴 했지만, 기분이 좋을 리는 없었다.

“아... 죄송한데 이건 투자자쪽에서 요청한 건 아니구요. 안 감독님께서 부탁한 거예요.”

“네? 안 감독님이요?”

“네. 현주 씨랑 안 감독님이 마찰이 있기 전에 안 감독님이 각본을 약간 수정하면서 조연 여배우 하나를 뽑아달라고 하셨거든요. 그래서 오디션을 간략하게 봤었어요.”

“그걸 임현주가 몰랐다구요?”

“안 감독님이 조연하나 뽑는데 굳이 주연배우들한테 보고할 필요는 없잖아요?”

생각해보니 그건 맞는 말이다.

“그렇긴 하죠.”

“그런데 갑자기 안 감독님이랑 현주씨랑 부딪치면서 은채씨가 붕 뜨게 된거죠.”

“은채?”

“이름이 강은채예요.”

“아...”

“처음에는 사장님이 잘 얘기하고 계약 취소하자고 했거든요. 그래서 그렇게 하려고 했는데 은채씨가 생각지도 못하게 강하게 나왔어요. 일방적으로 계약을 해지하면 노동청에 고발하겠다고 나왔거든요.”

“하하...”

이거 완전히 제작사에서 잘못한거라 섣불리 유지은 팀장을 원망한 게 미안해질 지경이었다.

“그 강은채라는 배우 강단 있네. 다들 억울해도 그냥 넘어가는데...”

“겉으로 보기엔 세상 순하게 생겼는데 깡이 있던데요? 그런데 정말 엔딩크레딧에 올릴 쿠키영상 각본까지 만들었어요?”

“아... 생각해둔게 있긴 했어요. 어쨌든 알겠습니다. 조감독한테 소속사 연락처 주고 가세요.”

“소속사는 없어요. 아직 필모 하나 없는 쌩신인이거든요,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촬영 전부터 기빨리는 소동(?)을 벌이고 나서야 촬영준비에 들어갈 수 있었다.

*

“이거 정말 되겠니? 제목도 뭔가 마음에 안 드는데? 6급 공무원이 뭐야. 촌스럽게...”

임현주는 새로 만들어진 촬영스케줄과 각본을 자신의 매니저인 석태에게 던지듯 간이탁자에 내려놓았다.

이미 5년 넘게 그녀를 보좌해온 석태는 전혀 기분 나쁜티 없이 새 각본을 집어 들었다.

“좀 불안하긴 하죠?”

“내가 괜히 일 저질렀나? 아휴 씨... 그 꼬장이 저렇게까지 나올 줄 누가 알았어? 설마 감독이 바뀔줄은 몰랐는데...”

“그 영감탱이 한 성격 하잖아요. 그래도 스타일이랑 메이크업 방향까지 싹다 바꿔야 하지 않는게 어디에요? 평소 하던 연기 그대로 하면 된다고 들었는데...”

“시끄러! 그리고, 너! 안 감독 다시 돌아올 거라며?”

임현주의 서슬 퍼런 눈빛에 석태는 움찔했다.

키가 180이 넘고 덩치도 산만한 그였지만 이미 연예계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현주의 포스는 어지간한 남자도 기죽게 만들었다.

“저도 그런 줄 알았는데... 죄송합니다.”

“그놈의 죄송은... 넌 왜 이렇게 덩치값을 못하니? 에휴, 됐고. 일단 봐봐. 너 감 좋잖아.”

현주는 다리를 꼬고 팔짱 낀채 턱끝으로 각본을 가리켰다.

“하하, 그쵸? 제가 다른건 몰라도 확실히 이런 쪽에는 감이 좋더라니까요. 전에 누나한테 잘 될거라고 했던 작품이...”

현주는 지친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시끄럽고 보기나 해. 얼른!”

“크흠... 알겠습니다.”

이후 임현주가 메이크업을 다시 고치는 사이 새로 만든 각본을 찬찬히 읽어가던 석태는 5분도 채 지나기 전에 ‘오..., 음..., 오호 여기서?’ 따위의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왜? 괜찮아?”

당연히 석태의 반응이 신경쓰인 현주가 미심쩍은 눈빛으로 물을 수밖에...

“오, 괜찮은데요? 누나가 원하는 적당히 재미있고 적당히 가벼운 로맨스가 들어있어서 연기하기 쉽겠어요.”

“네가 내 연기 선생님이야? 뭘 안다고... 그래서 결론이 뭐야? 되겠어? 안 되겠어?”

석태는 분명 현주가 가장 신경쓰는게 무겁지 않은 연기란 걸 알기에 먼저 말했던 것이지만 자신이 실수했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머쓱하게 웃었다.

“미안해요. 그런데 이거 괜찮아요. 전 재밌는데요?”

“그래? 진짜로?”

“네. 확실히 괜찮은 거 같은...”

“알겠으니까 가서 물이나 떠와. 그리고 해성 오빠한테 몰디브 호텔 예약해놨는지나 확인해봐.”

“언제요?”

“언제긴? 7월에 간다고 한 거 몰라?”

“그럼 촬영 일정이 간당간당한데...”

“일찍 끝내게 해야지. 아... 정말, 내가 지금 애 키우니? 하나하나 설명해줘야 해? 너 자꾸 이럴거야?”

현주가 쌍심지를 치켜뜨며 허리를 세우자 석태는 황급히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아니요, 그냥 괜찮으신가 해서... 바로 확인하겠습니다.”

“일 똑바로 해. 아... 짜증나.”

그녀가 다시 눈을 감자 석태는 얼른 자신의 차로 돌아갔다.

그래도 석태는 눈을 지긋이 감는 현주의 표정에서 한줄기 미소가 지나가는 걸 보면서 마음을 놓았다.

영화가 괜찮다는 말이 먹힌게 틀림 없다.

석태는 메이크업을 하고 있는 현주를 멀리서 바라보며 전화를 걸었다.

“네, 실장님. 첫 촬영 무사히 진행될 것 같습니다. 누나도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아요. 네. 이번에는 사고 없이 잘 진행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넵, 충성!”

석태는 이번 영화촬영은 무사히 잘 진행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한 시간 뒤,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오히려 너무도 순조로워서 약간의 트러블을 대비해 마음의 준비를 했던 동훈이 당황할 정도였다.

현장의 분위기도 너무 좋아 오늘 바뀐 감독의 첫 촬영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만큼 화기애애했다.

당연히 동훈은 자신의 디렉팅에 자신감이 생겨 말에 힘이 붙었고 그렇게 되니 배우들도 감독의 디렉팅을 믿고 연기를 했다.

“컷! 수고하셨습니다.”

모니터를 바라보며 동훈이 힘차게 촬영종료를 외치자 다들 박수를 치며 수고했노라 말했다.

동훈은 불안한 마음에 촬영내내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고 있던 제작피디에게 다가갔다.

“지켜보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했는데 고생은요, 저말고 다른 분들이 고생 다 하셨죠. 그런데 첫 연출인데 떨리지 않으셨어요?”

“예전에 단편영화 찍어봤으니까요.”

“그거야 짧은데다가 톱배우도 없었으니까 비교하긴 그렇죠. 첫 상업영화인 것도 떨릴텐데 임현주씨를 앞에 두고 디렉팅 하는데 거침이 없던데요?”

확실히 완전히 달라진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김영웅 감독의 지식을 가졌지만 그의 노련한 경험까지 같이 받아들인 것처럼 배우들의 동선과 연기 지시 등 현장을 완벽하게 통제했던 거다.

비록 오늘 첫날이라 몇 씬 못찍었음에도 놀라울만큼 짜릿한 경험이었다.

“제가 원래 강심장인가 봅니다. 하하!”

“그러게요. 타고난 연출가인가 봐요. 다행이네요. 새로 온 감독님한테 다들 신뢰를 보내고 있는 것 같으니까. 전 대표님께 좋은 소식 전해드릴 수 있어서 다행이고... 고마워요. 아, 통장에 돈 들어온 거 확인하셨나요?”

보통 감독에게 지급되는 보수는 계약후 2주 내에 계약금(대략 30% 정도)이 지급되고 촬영 시작 2주내에 중도급(40%)이 지급된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계약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첫 촬영에 들어갔기에 계약금과 중도금이 같이 들어오는 것으로 계약했다.

“아직 확인해보지는 않았어요. 정신이 없어서...”

“확인해보시고 이상 있으면 연락 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뭐, 제가 돈 드리나요?”

유 팀장이 자리를 떠나자 이번에는 임현주가 아직 촬영 의상을 그대로 입은 채 다가왔다.

늘씬하게 잘빠진 몸매로 화장실 청소를 하는 인부옷을 입고 있는 그녀였지만 그녀의 도도한 매력이 전혀 죽지 않아 내심 대단한 스타가 분명하다고 느꼈다.

“제대로 인사도 못 드렸네요. 정식으로 인사할게요. 임현주예요.”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촬영을 다 하고나서야 악수를 내미는 이 상황이 조금 웃기긴 했지만 평소에 얼마나 도도하고 성격이 안 좋은지 아는 동훈으로서는 디렉팅을 잘 따라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다.

“장동훈입니다. 평소 팬이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네요.”

“박 대표님한테 제 욕 많이 들으셨죠?”

“네?”

이렇게 훅 치고 들어올지 몰랐던 동훈은 순간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하는데 그녀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뻔하지 뭐. 그런데 틀린 말도 아닐거고... 나 그렇게 성격 더럽지만은 않아요.”

“아, 네...”

“감독님 각본 좋고 디렉팅 좋아서 이번 작품 왠지 기대가 된다고 할까? 예감이 나쁘지 않네요.”

활짝 웃는 그녀의 웃음이 왠지 불길하게 느껴지는 건 무슨 이유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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