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프롤로그
1980년대에 흥하기 시작하던 만화시장이 어느새 커져 옆나라 일본을 넘어선 게 이십년도 더 됐다.
한국의 애니메이션은 전 세계를 주도하고 있고 박스오피스에서도 국내 애니메이션 작품이 종종 1위를 차지하곤 했다.
특히 코어 팬층이 두터운 애니메이션은 초기 흥행수익을 예상하기 쉬워 투자받기도 쉽고 개봉 초기 상영관을 확보하는데 상당한 유리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 반해 영화는 몇몇 흥행영화감독과 배우가 끼어있지 않으면 신인감독이 데뷔하기 극히 힘든 구조였다.
특히 아무런 학연, 지연도 없는 조감독이라면 더욱...
[폐업 처분]
언젠가 폐업할거라 생각했던 비디오 가게가 드디어 문을 닫았다.
예전과는 달리 이제는 영화를 보고 싶으면 인터넷을 통해 다운받는 게 일상화 되어있어 비디오 대여점이 망하는 건 시간문제였었다.
변화하는 시장에 맞춰간다고 DVD도 상당히 들여와 어느 정도 유지하는 듯 했지만 결국 현실을 이겨내지 못한 것이다.
그래도 아쉬움을 감출 수 없었다.
불우했던 유년시절을 영화가 없었다면 아마 견딜 수 없었을 것이기에...
“동훈이 왔어?”
“안녕하세요. 이제 못 보겠네요. 여기가 동네 마지막인 비디오 대여점인데 이제 다 사라졌네요.”
“다 그런거지 뭐...”
아저씨의 주름진 눈가에 씁쓸함이 가득하다.
“하나에 얼마씩 처분하세요?”
“2천원. 넌 내가 싸게 줄게.”
“2천원이면 엄청 싼거죠. 괜찮아요.”
안 그래도 폐업하느라 힘드셨을텐데 굳이 더 싸게 주고 싶진 않았다.
아니, 그걸 떠나 이 영화들을 더 싸게 주고 사면 그건 영화감독을 꿈꾸는 사람으로 해서는 안 될 짓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왠지 감독으로 성공하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할까?
아무 근거도 없고 의미도 없지만 사람들마다 그런 게 있지 않은가.
“저기서부터 여기까지 살게요.”
“그렇게나 많이? 봤던 것도 상당히 많은데?”
“영화는 한번 볼 때랑 두 번째 볼 때랑 또 달라요. 보고 또 보는 재미죠.”
“흐흐, 그래. 나야 좋지. 어디보자... 하나, 둘, 셋... 여든 다섯, 여든 여섯. 여든 여섯 개네. 그럼 172,000원이다.”
“계좌번호 불러주시면 바로 보내드릴게요.”
“그래. 응? 그런데 이런 영화도 있었네? 나도 못 봤던 건데 이건 뭐지?”
계좌번호를 찍어주려던 주인 아저씨가 DVD 한 장을 들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 가게에 있는 영화 중 상당히 많은 작품을 보았던 동훈도 고개를 삐쭉 내밀어 살펴보니 역시나 처음 보는 작품이었다.
“영화감독 김영웅의 일생? 이런 영화가 있었나?”
“무슨 제목이 그렇대요? 감독이 누구예요?”
“감독도 주연배우 이름도 없어. 내가 언제 이런 작품을 들여왔었지? 기억에 없는데... 이건 빼줄까?”
동훈은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이내 어떤 작품인지 궁금해 손을 저었다.
“아뇨. 그것도 포함해서 보낼게요.”
“재미없을 것 같은데? B급도 안 되는 것 같아.”
“괜찮아요. 그런 삼류 영화도 도움이 안 되는 건 아니거든요.”
“아... 영감 같은 게 딱 오는건가?”
동훈이 영화판에서 조감독을 하고 있는 걸 알고 있기에 저렇게 물을 수 있었다.
“하하, 뭐 그런거죠. 역시 아저씨가 뭘 아셔.”
“알긴 개뿔이... 어쨌든 고마워.”
동훈은 주인 아저씨가 두 개의 큰 비닐봉투에 바리바리 싸 준 DVD를 양 손 무겁게 들고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어둡고 조용한 골목길을 걸어오면서 흘러간 세월의 기억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영화감독이 되겠다며 무작정 서울로 상경해서 처음 지금의 옥탑방을 계약하고 기대에 부풀어 있을 때가 바로 5년 전.
이후 연출부 밑바닥부터 소처럼 일하며 어떡해서든 연줄을 만들고 실력을 키워왔지만 아직 입봉은 저 멀리 보이는 흐릿한 달처럼 멀리 있을 뿐이었다.
그사이 사귀었던 여자친구는 떠나갔고 이제 남은 건 오백만 원의 사금융 대출과 월세가 두 달 밀린 보증금 천만 원짜리 방 하나뿐이었다.
하나가 더 있다면 영화편집이 가능할만큼 최신형에 가까운 컴퓨터와 수많은 영화 관련 자료들.
방금 17만 원이나 되는 거금도 오늘 입금된 연출부 추가 수당 30만 원 중에 쓴 거지만 아깝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영화는 자신을 버티게 해주는 영혼의 안식처와 같았으니까.
끼이익...
오래된 녹슨 철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마치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옥탑방에 오른 동훈은 한숨을 내쉬며 양손에 들린 DVD꾸러미를 내려놓았다.
혹시 주인 아주머니와 마주치면 어쩌나 하는 염려 때문에 들어올 때는 항상 이렇게 마음을 졸였다.
그래도 아직까지 나가라는 말을 하지 않아주는 게 어찌나 고마운지 모른다.
차가운 물로 대충 샤워를 마치고 누리끼리한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나온 동훈은 컴퓨터 앞에 앉으며 문제의 DVD를 꺼내 들었다.
“배급사도, 제작사도 안 적혀있네. 뭐지? 대학 졸업작품이 하나 딸려 들어왔었던건가?”
아무렴 어떤가.
대학 졸업 작품이면 어떤 수준일지 대략 짐작이 됐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로 졸작일까 기대하며 동영상을 재생했다.
그런데...
“어? 뭐야... 뭔데 재생시간이 1만 시간이 넘어.”
순간 잘 못 본 줄 알고 동영상 재생을 정지시킨 후 얼굴을 모니터에 가까이 들이댔다.
하지만 아무리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재생 시간은 13,534:42:24에서 바뀌지 않았다.
세상에 DVD 한 장에 어떻게 이런 양이 담길 수 있는 건지...
헛웃음을 지으며 일단 영화를 다시 재생시켰다.
괜히 컴퓨터에 바이러스가 걸리는 건 아닌지 걱정하면서...
그 때...
피쉬식...
모니터 뒤에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런 시팔! x됐다!”
속으로 이딴 DVD 괜히 재생시켰다고 욕하며 얼른 전원 코드를 뽑는 찰나 손을 타고 오르는 전류가 몸을 관통했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