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
잠든 동욱은 꿈속에서 몽롱한 주변을 본다. 지금은 한국에 가도 보기 힘든, 어린 시절 뛰어 놀았던 골목길이 보인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몸은 지금 성인이 된 모습 그대로였다. 그래서 동욱은 알아차렸다.
'꿈? 자각몽인가?'
꿈인 것을 인지해도 꿈을 벗어날 방법을 알 수 없었다. 혼자서 정이 들었던, 하지만 이제 세상에 없는 길을 가던 중 그늘이 있는 정자가 보였다. 그 정자에선 젊은 여성과 남성이 같이 앉아 있었다.
'누구? 본 적이 있는 얼굴 같기도 한데…….'
분명한 것은 지금 자신의 주변에 있는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하지만 두 남녀는 동욱을 보자 환하게 웃더니 손을 흔들었다.
자신의 의지는 없었다. 동욱은 두 사람이 손을 흔들자 바로 뛰어갔다.
'어?'
그리고 어느새 자신의 몸은 어린 아이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동욱은 두 사람의 앞으로 빠르게 도착했다. 젊은 여성이 말했다.
"우리 아들, 엄마가 그렇게 보고 싶었어?"
"엄… 마?"
자신의 엄마가 이런 모습이었던가? 가만히 보니 엄마와 닮은 모습이 많았다. 옆에 있던 남자가 말했다.
"당신 젊었을 적 예쁜 모습을 처음 보니까 우리 동욱이가 놀랐잖아."
"당신도 참……."
두 사람의 말에 동욱은 저 멀리 있었던, 부모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맞아. 분명히 어렸을 적에 봤던 그 얼굴…….'
하지만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젊어서도 고생을 하는 바람에 일찍 생겼던 주름이 보이지 않았다.
마치 지금의 젊은 대학생처럼 두 사람은 젊고, 아름다웠고, 멋있었다.
"우리 동욱이 한 번 안아보자. 이리 오렴."
꿈속에서 엄마의 말에 어려진 동욱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대로 엄마의 품에 안겼다. 분명히 꿈속이었지만, 실제로 과거에 돌아간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다.
"우리 동욱이 울어? 왜?"
엄마의 말에 동욱은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동욱은 엄마에게 안긴 채로 말했다.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월드시리즈에 나가서 우승하는 것을 꼭 보여주고 싶었는데……."
이 말을 하면서 동욱은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 싶었다. 여긴 꿈이다. 그리고 지금은 과거의 순간에 돌아온 것과 같았다. 하지만 두 분의 반응은 무슨 소리냐며, 어린 네가 어떻게 월드시리즈에 갈 수 있냐면서 놀리지 않았다.
"그렇구나… 우리 동욱이 열심히 했는데. 그렇지?"
"걱정하지 마렴. 이미 우리는 항상 보고 있었단다."
두 사람의 말에 동욱은 의아했다.
"네?"
정말 이 분들이 과거의 부모님일까? 그렇다면 이런 반응이 나올 수 없다. 그러는 사이 엄마는 동욱에게 말했다.
"동욱아, 엄마가 말했지? 엄마는 동욱이가 세상에 태어나준 것만으로도 이미 자랑스럽다는 것을……."
"네……."
"월드시리즈 우승에 너의 모든 것을 쏟아 붇지 않아도 돼. 그것보다 엄마는 우리 동욱이가 더 자랑스러우니까. 그러니까…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필요도 없단다."
엄마의 말에 동욱은 여기 오기 전, 동료들에게 폭언을 했던 것이 떠올랐다.
"죄송해요……."
"죄송하긴… 나한에 미안해하는 것보다 네가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지? 잘못을 했다면 잘못한 사람에게 어떻게 해야 하지?"
엄마의 말에 동욱은 주저하다가 말했다.
"사과… 요."
동욱의 말에 엄마는 동욱을 더 안아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한다.
"그렇지. 역시 우리 아들."
동욱은 꿈인 것을 알아도, 이 꿈에서 나가고 싶지 않았다. 꿈이지만 적어도 여기엔 엄마가. 그리고 많이 이야기를 하지 못했지만 아빠도 있었다. 그러나 동욱의 바람과 달리 엄마는 동욱을 떼어 놓으며 말했다.
"이제 가봐야겠구나. 동욱이는 아직 우리랑 같이 있을 필요가 없어. 나중에… 더 나중에 엄마랑 아빠랑 만나자?"
엄마의 말에 동욱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눈물이 나왔다. 엄마는, 그리고 아빠는 동욱의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며 말한다.
"항상 보고 있을게."
"그리고 그동안 네 엄마를 지켜줘서 고맙다. 이젠 다시 아빠 차례가 왔을 뿐이야."
두 사람은 그 말을 하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다시 떨어지기 싫은 동욱은 일어나 두 사람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처음 만났을 때, 한 걸음에 닿았던 것과 반대로 지금은 아무리 달려도 두 사람에게 닿지 않았다.
손을 뻗어 막 두 사람에게 닿으려 할 때, 동욱은 그만 꿈에서 깨어났다.
"엄마!!!"
어제 잠을 설쳤다는 증거로 이불은 어질러져 있었다. 그리고 손을 뻗은 동욱은 그 자세로 한 동안 가만히 있었다.
'꿈……?'
너무 생생한 꿈이었다. 지금도 엄마의 품에 안겨서 뺨에 느꼈던 체온과 따듯한 몸이 동욱의 마음을 다시 한 번 안정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엄마와 아빠가 눈물을 닦아준 감촉이 얼굴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설마 지금도 꿈인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동욱은 자신이 현실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햇빛이 창문을 통해 들어오고 있었고, 서늘한 이불의 감촉이 손을 통해 느껴졌다.
동욱은 눈을 돌려 자신의 핸드폰이 있는 곳을 봤다. 그리고 핸드폰이 있는 곳으로 가더니 잠깐 고민을 했다.
'할까? 말까?'
하지만 어젯밤과 달리 오늘 아침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동욱은 바로 여동생에게 전화를 했다. 그리고 어제 잠을 자지 못했는지 힘겨운 목소리로 여동생이 전화를 받았다.
-아, 오빠?
"응. 나야. 엄마는… 편히 가셨어?"
동욱의 말에 여동생은 깜짝 놀랐다.
-어? 알고 있었어?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아달라고 했는데…….
그 말을 듣자 동욱은 알았다. 이제 엄마는 없다. 꿈속에서처럼 이제 더 이상 현실에서 만날 수 없다. 그 와중에도 동욱은 가능한 침착하게 말하려고 했다.
"응… 들었어… 나… 이거 끝나면… 바로 갈 테니까… 미안하지만…준비… 부탁해."
그리곤 바로 통화를 끊었다. 마침내 참았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 결전의 날
다저스의 선수들은 처음부터 클럽하우스에 모여 있었다. 집합 시간은 앞으로 두 시간이 남았지만, 동욱을 제외한 모든 선수가 모여 있었다.
"하아……."
한 선수의 한숨에 다른 선수들도 한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 한 사람이 말했다.
"젠장… 단단히 따지려고 했는데…… 이런 X같은 상황이 다 있냐."
그 말에 다른 사람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들도 대부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하지? 어제 실책한 것에 미안하다고 말해야 하나?"
"솔직히 그건 아니지 싶다. 중요한 경기인건 여기 있는 모두가 알겠지만 그래도 실책이 완전히 없을 수는 없잖아. 그것도 결국 경기의 일부라고."
"하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잖아."
어제 우승을 했다면, 어쩌면 동욱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우승 장면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실책으로 그 기회를 날렸다 생각하니 동욱의 공을 받지 못한 선수는 더욱 죄책감이 밀려왔다.
"차라리 그때, 동욱의 말대로 내가 제대로 정신을 집중했더라면……."
"그래도 우승한다는 보장은 없어. 어디까지나 그건 가능성이야. 크든 작든, 그 경기에선 우리가 무너졌을 가능성이 높아. 그렇지 않아도 수비하는 시간은 양키즈보다 우리가 더 길었으니까."
아무리 축구에 비해 시간당 강도가 약하다지만,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약한 건 아니다. 특히 중요한 경기에선 어느 선수나 신경이 날카롭게 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날카로운 칼이 쉽게 망가지듯, 그 상태를 오래 지속하면 역시 집중이 더 쉽게 사라진다.
"어쩔 수 없지. 지금은 오늘 경기에서 이기는 걸 생각하자. 그러기 위해선 동욱이 먼저 컨디션을 회복해야 하는 거고. 사실 우리 팀의 타점 중 절반 이상이 그 친구한테 나온 것도 사실이니까."
그렇지 않아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어 제일 큰 충격에 빠졌을 사람이 동욱이다. 그에 대한 배려를 생각하고 있을 때, 클럽하우스의 문이 열리며 동욱이 들어왔다.
"……?"
평상시엔 자신이 항상 제일 먼저 왔지만, 오늘은 제일 늦게 왔다. 그들이 왜 자신보다 빨리 모였는지 몰라 의아해하던 중, 어제 첫 실책을 한 선수가 다가왔다.
"저기… 동욱. 어제 일 말인데… 미안……."
"아니. 내가 어제 화내서 미안해."
"응?"
의외로 동욱이 먼저 사과를 하자 놀랐다. 동욱의 말이 이어졌다.
"어젠 내가 말이 심했어. 실책도 경기의 일부인데 그걸 받아들이지 못했으니까. 그러니까… 미안해."
"아니… 그게… 괜찮아. 중요한 경기잖아. 네가 아니라도 다저스 사람이라면 화가 났을 실책이었어."
예상치 못한 상황에 사람들은 영문을 모르고 동욱을 보았다. 그러다 한 사람이 말했다.
"동욱아, 너 뭐 잘못 먹었어? 갑자기 왜 이래?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갑자기 변한다더니……."
그 말에 다른 사람의 그의 입을 막았다. 그렇다고 이미 나온 말을 담을 순 없었다. 동욱은 매고 온 가방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지퍼를 열어 배트 하나를 꺼냈다.
그것은 얼마 전, 타자들이 장난으로 숨기려다 폭력사태까지 갈 뻔 했던 배트였다. 동욱은 그 배트를 꺼내며 말했다.
"알겠지만 엄마가 나한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선물해주신 거야. 프로에 처음 입단했을 때 받은 거고."
"그래……."
"그런데 어제 꿈에서 엄마가 나오셔서 말씀하셨어. 월드시리즈에 모든 것을 걸지 말라고.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면 안 된다는 말씀도……."
동욱의 말에 다른 사람들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설마…….'
'하늘로 가시기 전에 꿈에 나타나셨다고?'
사람들이 놀라는 사이 동욱의 말은 이어졌다.
"또 어머니께서 잘못한 사람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하셨어. 그리고 일어나서 보니 어제 내가 너무 심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지금 미안하다고 말하는 거야.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미안. 어젠 내가 너무 심하게 말했어."
그러던 중, 누군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다른 사람이 물었다.
"야, 우냐?"
"왜… 남자는 울면 안 되냐? 흑……."
그저 사과를 했을 뿐이다. 이전과 다른 행동이긴 하지만 울 정도의 일은 아니었다. 그러니 동욱은 생각했다.
'혹시…다 알고 있었나? 어제의 일을?'
그의 의문에 답을 해준 사람은 감독이었다.
"훌륭하신 어머님이시구나. 동욱의 어머니는……."
"네… 저의… 자랑입니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이제 다 끝났지만……."
동욱의 말에 흐느끼던 선수가 소리쳤다.
"아니! 아직 안 끝났어!!!"
그의 외침에 동욱을 포함해 모든 사람이 그를 보았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끝나긴 뭐가 끝나? 어머니 영전에 월드시리즈 우승 반지를 올려드려야 하잖아? 안 그래?"
그의 말에 감독은 동욱의 옆에 다가갔다. 그리고 말했다.
"그래, 아직 끝나지 않았어."
그리곤 동욱이 들고 있는, 엄마가 선물한 배트의 손잡이 끝을 동욱의 손에 쥐게 했다. 그리고 배트의 끝을 바닥에 두고 세웠다.
감독은 동욱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올려놓았다. 그러자 누가 어떻게 하자는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전부 동욱과 감독의 손 위로 손을 올려놓았다.
선수들과 코치들까지 손을 올려놓은 덕분에 그들이 서 있을 장소는 비좁았다. 하지만 아무도 그것에 불평하지 않았다.
더욱 강하게 느껴지는 서로의 존재감이 이들을 더욱 하나로 만들고 있었다.
"어차피 우리의 목표는 우승이다. 각자 우승을 바라는 이유는 다르겠지. 하지만 지금! 우리는 또 하나의 우승의 이유를 얻었다. 그렇지 않나!?"
감독의 물음에 선수들은 한 목소리로 답했다.
"네!!"
선수들의 목소리에 감독의 입가에는 절로 강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럼 우리의 목표는?"
"승리!!"
"그 이외의 것은?"
"필요 없습니다!!"
바로 어제만 해도 언제 깨질지 모르던, 이미 크게 깨져 어떻게 수습할지 모를 그들이었다. 그랬던 선수들의 단결된 모습과 행동을 보자 감독은 마지막으로 외쳤다.
"다른 것 보지 마. 오직 단 하나를 위해!! 그리고 동욱의 어머니를 위해!!"
"GO, go, 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