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7]
"가능한 네가 나와야 하는데."
"너도 마찬가지잖아."
동팔과 지완은 꽉 채운 관중석을 보며 말했다. 그러자 마침 듣고 있던 존 지라디 감독이 말했다.
"어차피 너희 둘 다 나와야 해. 그러니까 7이닝 되면 알아서 몸 풀어."
지금은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중요한 경기다. 당연히 팀의 모든 것을 쏟아 부어야 할 때. 승리를 하고 있다면 굳히기 위해서. 지고 있거나 비기고 있다면 끝까지 놓칠 수 없는 기회를 위해서 등판해야 한다.
"네."
"알겠습니다."
마침 둘 다 컨디션은 나쁘지 않았다. 동팔이 어제 선발로 나왔지만 좌완은 쓰지 않았기에 할 수 있는 선택이었다.
물론 무리하지 않도록 감독이 조종하겠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월드시리즈 우승이다.
그렇지 않으면 양키즈는 동팔과 한 재계약이 효력을 발휘할 수 없으니 필사적이었다.
감독이 떠나자 동팔과 지완은 한국어로 말했다.
"민희는 아직도 그래?"
"응… 속이 많이 상해서 말을 꺼내기도 힘들다."
"그래도 먼저 가서 말을 해야지.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정말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데."
동욱을 치료한 일로 인해 벌어진 여파는 생각보다 길었다. 하지만 지완의 말대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라 민희도 계속 야속한 감정을 붙잡을 수는 없었다.
최악의 상황이 되었을 때, 서로에게 남은 시간은 너무 부족하게 된다.
"마지막이 되게 할 생각은 없어. 무엇보다 동욱을 치료한 것을 떠나, 지금 이 경기를 이기지 못하면 전부 무용지물이야."
"그건 사실이긴 하지만……."
"그러니 지금은 이 순간에 집중해야지. 내가 선발이 아니라서 아쉽지만……."
"어제 승리한 걸로 네가 할 일은 다 했어. 남은 건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걸린 거지. 그리고… 정 안 되면 네가 타자로 나서면 되잖아. 그렇지 않아도 요즘 감각이 이상하다면서?"
지완의 말에 동팔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뭐랄까… 가끔 주변이 현실 같지 않다는 느낌? 민희에게 말을 하면 내가 떠날 것 같다는 말에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있지만."
"현실같지 않다? 어떻게?"
"말 그대로 세상과 내가 분리되는 느낌."
"그래서 그 인디언 아저씨는 뭐라고 그래? 경험이 많은 아저씨잖아."
"물어는 봤는데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어. 다만……."
"다만?"
"이번 경기에 타석으로 나서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하던데. 그래서 감독님께 말씀을 드리긴 했지만 과연 나를 타석에 넣을지. 아니면 불펜으로 넣을지 모르겠어."
동팔의 말에 지완이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지금으로선 불펜이 확정이지. 상황에 따라 변동 가능성은 있겠지만. 그래도 인터리그나 월드시리즈도 아닌데 널 타석에 세우실까?"
"그렇겠지……."
동팔은 어디까지나 투수로서 최강의 능력을 가졌다. 그런데 타석에 세우면 혹사논란과 동시에 타석을 허비하는 것이 된다.
"정규시즌에선 기회가 있었으니 타석에 설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주 많이 어렵고."
"한 타석도 그냥 쓸 수 없는 상태니까. 어쩔 수 있냐. 솔직히 네 타격 능력은 다른 타자들이랑 비슷하거나 조금 떨어지잖아."
"그래도 걸리면 날려버릴 힘은 있는데……."
"그건 다른 타자도 마찬가지야. 걸려서 안 넘어가는데 과연 메이저리그에 잘도 입성했겠다."
지금까지 동팔이 정규리그에서 타석에 선 것은 어디까지나 월드시리즈를 준비하기 위해서다. 특히 올스타전에서 내셔널리그가 이기는 바람에 일곱 경기 중 네 경기를 지명타자 없이 진행해야 한다.
모든 투수가 타석에 설 수 없겠지만, 적어도 동팔이 선발이라면 타석에서 활약이 가능하다. 특히나 배분되는 것을 보면 더 이상적이었다.
"일단 월드시리즈에 진출하면 지명타자 없이 1,2,6,7 번째 경기를 치러야 해. 그래도 다행인 건 네가 1, 6번째 경기에서 선발로 오른다는 거지."
"그건 진출했을 때의 이야기고. 지금은 시애틀부터 잡아야 한다니까."
"네가 감독님이라면 널 타석에 세우겠냐? 차라리 다른 타자를 대타로 쓰고 말지."
엄밀히 말하면 그것이 현실. 하지만 동팔은 여전히 많은 미련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어쩌면 그때처럼 모든 것이 느려지게 보일 수도 있는데…….'
혹시나 하며 생각했다. 지금 간간히 느껴지는 기묘한 느낌은 그 전조가 아닐까? 그렇다면 마침 타석에 서게 되었을 때, 모든 것이 느리게 보인다면 홈런도 충분히 가능했다.
그러나 이걸 말한다고 감독이 진지하게 받아들일지는 알 수 없었다. 미친 사람 취급하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일 것이다.
그래도 미련이 안 남는 것은 아니다. 동팔의 생각과 마음을 떠나서, 경기는 사실상 그의 손을 거의 떠나 있었다.
* * *
걱정이 태산인 동팔과 달리 오늘 선발투수인 카를은 여유가 넘쳤다.
"자~ 그럼 어디 첫 사냥을 시작해볼까?"
야구는 투수 놀음이라고 한다. 투수가 공을 어떻게 던지느냐에 따라 경기의 승패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타자가 뛰어나도 투수가 절묘한 컨트롤로 봉쇄하면 경기를 이길 수 없다.
카를은 한동욱처럼 아무리 빠른 공이라도 보고 칠 수 있는 타자가 아니라면, 어느 누구라도 요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뉴욕 양키즈에 한동욱이 없다는 것이다.
카를에게 데미안이 말했다.
"방심하지 마.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것이 야구야."
그의 말에 카를은 오히려 웃으며 말한다.
"방심은 안 해, 선배. 하지만 전력을 다하면 지금 내 공을 칠 수 있는 타자는 없어. 그리고 선배는 언제라도 홈런을 칠 수 있지. 그럼 이미 끝난 거잖아."
완벽한 수비. 그리고 상대의 마운드를 부술 수 있는 방망이. 그것만으로 충분히 승리를 예상할 수 있다.
카를의 말에 데미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여전히 갈등하고 있었다.
'정말 이대로 끝내는 것이 좋을까? 그럼 지금은 쓸모가 있으니 당장 죽이진 않겠지. 하지만 그러면 동팔이 죽어…….'
헤럴드와 달리 동팔이 좋은 사람이라는 건 루시의 일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그동안 계약자들의 행동을 보면 자신이 살기 위해서 주변을 돌아보지 않는다.
그러나 동팔은 달랐다.
'악마가 노리고 싶어 할 정도로 좋은 영혼이겠지. 계약의 서가 아니라면 강탈이 불가능하니까…….'
상대해야 할 사람이 경쟁자에 괴물처럼 자신만 생각하는 녀석이라면 몇 명이라도 죽게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착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여러 모로 양심에 가책이 밀려왔다.
그러니 지금 자신이 쓸모가 없다고 판단되면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임에도 데미안은 갈등하고 있었다.
그 사이, 경기가 진행되었고 각자 1이닝에선 별다른 소득이 없는 상태로 마무리되었다.
2회초가 되자 팀의 4번 타자인 데미안이 처음으로 타석에 나가게 되었다. 카를이 말했다.
"그냥 후딱 승패를 결정하고 갑시다, 선배."
카를의 말에 데미안은 따로 답하지 않았다. 타석에 선 데미안은 생각했다.
'상대는 뉴욕 양키즈의 2선발인 조나단 미첼. 분명히 다른 구단에서라면 당당히 1선발 급이지만 동팔에게 밀렸을 뿐이야. 2선발이라는 단어에 방심하면 당해. 보통 타자라면…….'
투수의 구위는 분명히 강하고 빠르다. 그건 자신을 제외한 타자에게 위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구위라도 미리 읽혀버리면 타격 연습용에 불과하다.
휙~ 퍽.
"스트~ 라이크!!"
지금 던진 공의 구속은 100마일에 달하는 빠르고 제구가 된 공이었다. 스트라이크존의 모서리에 절묘하게 걸리는 뛰어난 공이다. 그러나 데미안에겐 던지기 1초전에 이미 궤도가 눈에 보였다.
이미 궤도가 읽힌 공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지만 데미안은 뻔히 보이는 공을 치지 않았다.
한편, 데미안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던 조나단은 의아했다.
'초구를 노릴 줄 알았는데 아니야?'
어차피 데미안은 볼넷으로 보낼 각오를 하고 있었다. 돌려세우면 좋지만, 이번 경기에서 시애틀의 선발은 제일 상대하고 싶지 않은 카를이다.
그렇다고 작전이 없는 건 아니었다.
'카를이 한계까지 투구를 하게 한 다음, 다른 투수와 교체되었을 때부터가 진짜 승부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 제일 필요한 조건이 있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홈런만은 절대로 허용할 수 없어. 단 한점으로 게임이 끝나게 해선 안 돼.'
이제 2회초지만, 9회초인 것 같은 압박이 느껴졌다. 하지만 자신이 최대한 많은 이닝을 소화하지 않으면 이어지는 불펜에서 감당할 수 있는 이닝도 줄어들게 된다.
그만큼 책임감을 느끼며 조나단은 전력으로 데미안을 상대했다. 유인구로 헛스윙을 유도하려 했지만, 이미 궤도를 보고 있던 데미안은 배트를 휘두르지 않았다.
휙~ 툭.
결국 연속 볼넷으로 데미안을 보내고 말았지만, 조나다은 아쉬워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임무를 잘 숙지하고 있었다.
'넘긴다. 이 상황을 최대한 오래 유지하고 다음 투수에게 안전하게…….'
데미안이 볼넷으로 나가게 되자 카를은 식상했다.
"아…설마 데미안에게 일부러 볼넷을? 그럼 좀 재미없는데……."
지금 뉴욕 양키즈의 마운드와 수비를 뚫을 수 있는 유일한 타자가 데미안이다. 다른 타자들이 약한 것은 아니지만, 양키즈는 굳건한 마운드를 구축해 놓았다.
시애틀이 양키즈를 상대로 점수를 냈던 것은 상대적으로 약한 마운드와 수비의 실책으로 인한 것이 전부.
하지만 오늘은 강력한 2선발과 어제의 휴식으로 체력을 비축한 불펜이 버티고 있다. 이런 상황에 카를이 9이닝을 감당할 때까지 확실히 점수를 낼 수 있는 카드는 데미안 한 사람뿐.
그런데 지금 양키즈는 데미안을 상대로 정면승부보다 볼넷으로 보내는 것에 중점을 두는 것 같았다.
카를이 중얼거렸다.
"이거…좀 불안한데……."
후속타에서 병살타에 의해 아웃된 데미안은 더그아웃을 돌아왔다. 카를이 물었다.
"선배님. 선배님이라면 볼이라도 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런데 왜 치지 않으셨죠?"
카를의 물음에 데미안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야…처음부터 승부를 확정지으면 재미없잖아."
그리고 카를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언제 칠지는 내가 정해. 넌 그냥 무실점으로 막기만 하고 있어."
데미안의 위압적인 말투에 카를의 눈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자 바로 표정을 바꾸었다.
'아니지. 목적이 같다고 해도, 난 지금 해방된 건 아니잖아. 데미안의 도움이 없으면 계약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까 적어도 지금은…….'
서로의 입장이 다르고, 자신의 목숨은 데미안이 쥐고 있다는 생각에 카를은 알아서 꼬리를 내렸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뭘 해야 하는지는 알고 계시죠?"
그렇다고 무조건 복종하는 자세를 취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해방되기 위해서, 그리고 악마가 선택한 이유를 떠올리게 했다.
그러자 데미안의 표정이 약간 어두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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