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5]
무언의 압박 속에 동팔이 먼저 가볍게 손뼉을 치면서 주위를 환기시켰다.
짝, 짝, 짝!!
"자, 자. 왜 이래? 이러다가 경기 끝나고 진 줄 알겠다."
동팔의 말에 양키즈의 선수들이 하나 둘씩 말했다.
"이런 말하긴 그렇지만, 다른 팀이라면 몰라도 시애틀은 조금. 아니 많이 거슬려."
"정말로 우리의 천적으로 만든 건 아닌가 싶더라니까. 왜 우리만 만나면 더 강해지는 거지?"
"강해지는 건 아냐. 이상하게 운이 따르는 거지."
실력이 더 높다면 도전할 생각이 든다. 하지만 시애틀과 이길 수 없는 운명이라면 의욕이 밑바닥으로 떨어진다. 그러자 동팔이 말했다.
"그렇다고 미리 포기하는 건 말도 안 되잖아. 그렇지?"
그리고 지완을 보자 지완이 이어서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시애틀이 왜 운이 좋은지 분석을 마쳤어. 의외로 이유는 단순했더라고. 들어와."
지완의 말에 클럽하우스의 문이 열리며 혜진이 들어왔다.
"다들 죽을 상이네요. 분석을 한 결과 주의해야 할 선수가 있어요. 그 선수만 주의하면 전처럼 어이없이 지는 경우는 없을 거예요."
혜진의 말에 선수들은 두 눈이 크게 떠졌다.
"네? 그게 사실입니까?"
"누구를 조심해야 한다는 거죠? 전부 실력을 보면 그저 그런데."
선수들의 말에 혜진은 동팔을 본다. 자신이 지금 나온 이유를 떠올렸다. 바로 어제 동팔은 이렇게 말했다.
'시애틀이 양키즈를 상대로 왜 이기는지 몰라. 그래서 많이 의기소침해 있겠지. 그렇다고 악마와 계약한 사람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어. 그럼 방법을 바꾸면 돼. 분석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설명하면 계약을 말할 필요가 없고, 조금 더 보이는 것이 있으니 마냥 두려워하지 않을 거니까.'
그래서 혜진이 나서서 설명하기로 한 것이다.
"지금 선수들의 기록과 영상을 이전부터 보고 파악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왜 시애틀을 만날 때마다 경기 내용은 좋은 반면 결국 패한 이유를 파악할 수 있었죠. 의외로 간단했어요. 지금 제일 주의해야 할 선수는 바로 타자인 데미안, 투수로는 카를입니다."
혜진의 말에 다른 선수가 말했다.
"확실히 두 선수가 잘하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포스트 시즌에서의 기록. 그리고 후반기의 성적을 비교하면 놀랄 거예요. 적어도 그때만큼은 동팔이나 동욱의 기록에 범접하거나 어떤 부분에 있어선 더 뛰어나거든요."
혜진은 그 말을 하고 들고 있던 패드에 분석 자료를 보여주었다. 선수들은 다 같이 패드에 나온 자료를 봤다.
"어… 정말이네."
"후반부. 특히 뒤로 가면 갈수록 더 잘하잖아?"
그들의 말에 혜진이 말했다.
"그동안의 기록은 전반기와 후반기의 모든 기록을 합산하니 눈에 잘 띄지 않죠. 이른바 평균의 함정이에요. 물론 이걸 아는 사람이 있긴 하지만,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지요. 반면 이 두 선수를 제외하면 다른 선수는 전반기나 후반기나 포스트시즌에서 그저 그런 성적을 기록하고 있어요."
혜진은 이어서 시애틀 다른 선수들의 기록을 보여주었다. 그래프를 통해서 보니 더 이해하기 쉬웠다.
"그럼…카를을 공략하지 못하더라도 다른 투수를 공략하고, 데미안을 특히 더 조심하면 된다?"
"하긴 전에는 이 정도인줄 모르고 있다가 계속 얻어맞긴 했지. 비겁해도 정 안 되면 볼넷으로 보내면 될 일이고."
비록 그들이 왜 후반에 갈수록 강해지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그래도 시애틀이라는 팀을 공략할 방법이 저절로 떠올랐다.
막연한 불안감은 사라지고, 할 수 있다는 분위기가 생기자 마침 존 지라디 감독이 들어와서 말했다.
"어? 이미 설명을 들었나? 들었다면 더 간단하지. 동팔이 선발일 때, 반드시 승리를 잡아야 해. 그래야 카를이 선발로 나왔을 때 지더라도 그 다음으로 이어갈 수 있어. 그리고 데미안의 경우는 어쩔 수 없다면 최대한 넘어가. 후반 막판, 특히 포스트시즌에서 8할을 치는 타자를 어떻게 상대하려고 해."
이것으로 챔피언십에서 작전의 흐름은 정해졌다. 뉴욕 양키즈의 분위기는 방금 전과 완전히 달라졌다.
"아자!! 가자!!"
"월드시리즈로 가자!!"
이길 수 있을까 스스로 의심하던 것은 사라지고, 이젠 한 번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바뀐 분위기 속에 존 지라디 감독은 다 같이 더그아웃으로 가면서 동팔의 어깨를 툭 쳤다.
"고맙다. 오늘 경기 부탁하마."
신뢰가 어린 감독의 말에 동팔이 고개를 작지만 확실히 끄덕이며 답했다.
"알겠습니다. 반드시 승리하겠습니다."
동팔은 자신의 말대로 뉴욕 양키즈의 챔피언십 첫 경기를 완봉승으로 마무리했다. 하지만 두 번째 경기에선 카를의 지극히 효율적인 투구를 공략하지 못했다. 결국 양키즈는 영봉패를 당하여 경기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세 번째 경기를 치르기 위해 적지인 시애틀로 향했다.
* * *
한편, 챔피언십에서 LA 다저스의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시작과 동시에 3연패……."
"한동욱이 없다고 이렇게 밀려……?"
득점을 하지 못하는 팀은 잘 해야 무승부다. 하지만 전쟁이나 천재지변이 아닌 이상, 무승부를 인정하지 않는 메이저리그에서 점수가 없다는 것은 곧 패배를 의미했다.
아무리 뛰어난 마운드를 가지고 있어도, 점수를 얻지 못하니 결과는 뻔했다.
이제 남은 기회는 없다. 단 한 번의 패배가 월드시리즈 진출의 길을 막아버린다.
디비전 시리즈를 3승 1패로 올라온 기쁨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졌고, 지금은 패배의 분위기에 눌려 있었다.
"재수 없는 녀석이긴 했어도 실력은 있었지."
"타격만 아니라 나가서 흔드는 재주도 있었으니까. 수비도 좋고……."
"그게 아니었다면 진즉에 방출되었을 걸. 하긴 실력이 있으니 연봉이 1억 달러지."
들어온 사람은 몰라도 나온 사람의 자리는 안다고 했던가? 한동욱이 있을 때에는 몰랐지만, 그가 없자 추락하는 팀을 보니 모르려 해도 모를 수가 없었다.
이제 남은 네 경기에서 전부 승리하지 못하면 월드시리즈 진출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렇다고 동욱의 부상이 빠르게 회복되는 것도 아니라 적어도 월드시리즈에 진출하지 않으면 동욱이 경기에 나서는 걸 볼 수 없다.
"자자, 그래도 4연패로 챔피언십을 마무리 할 수는 없잖아. 안 그래? 진출한 것도 중요하지만, 적어도 1승이라도 해야 체면이 서지."
이젠 자존심을 위해서라도 싸워야 했다. 하지만 상대가 만만치 않으니 전의를 세우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그때, 클럽하우스의 문이 열리면서 한 사람이 들어왔다.
"어?"
"한…동욱?"
여기서 볼 수 없는, 부상자 명단에 있을 선수가 왜 여기 있단 말인가? 동욱이 말했다.
"다 나았어. 생각보다 빨리."
"그, 그래……."
확실히 동욱이 타선을 지원하면 그것만큼 듬직한 것이 없다. 또한 유격수로서 뛰어난 활약을 보여준다. 그래도 다리를 접질린 것을 생각하면 회복이 너무 빠른 것도 사실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빨리 회복할 수 있었어? 한국인은 다 그래?"
한 선수의 물음에 류현민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렇지 않아도 어깨의 부상으로 인해 재활하는 시간을 가졌던 그로선 몸의 회복이 얼마나 중요하며 힘든지 잘 알고 있었다.
이들의 의문에 동욱은 불과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 * *
구단의 지원을 받는 병원에서 재활에 집중하고 있는 동욱은 뉴욕 양키즈의 1승 1패. 그리고 LA 다저스의 2패 소식을 듣게 되었다.
다친 발목을 편하게 하면서 침대에 앉아 있는 동욱의 옆에 스크레이치도 앉아 있었다.
"이거 참 안 됐군. 타선이 막혀서 주자가 나가도 점수를 얻지도 못하고……."
"……."
"일주일이면 다 나아 월드시리즈엔 나갈 수 있겠지만, 과연 다저스가 너 없이 월드시리즈에 진출할 수 있을까?"
"……."
혼자 있는 병실에 있어 보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동욱은 스크레이치의 말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스크레이치의 속을 긁는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그렇다고 부상이 월드시리즈가 끝나도 안 낫는 것이 아니라 계약의 이행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어. 아쉽겠어. 발목을 접질리는 것이 아니라 뼈가 부러졌다면 또 모를 일이었는데."
누가 들어도 동욱이 당한 부상을 누가 계획했는지 알 수 있는 말이었다. 노골적인 말이었지만 동욱의 스크레이치에 대한 무시는 계속되었다.
계속 말을 해도 동욱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결국 먼저 지친 쪽은 스크레이치였다.
"보름 뒤에 보도록 하지. 그땐 무시하고 싶어도 무시할 수 없을 테니까."
그 말을 남기고 스크레이치는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자 동욱은 침대에 누우며 생각했다.
'웜우드의 말대로 악마는 자신을 무시하고 경멸하는 것을 제일 싫어한다고 하더니…….'
그래서 스크레이치를 보냈지만, 그렇다고 상태가 나아지는 건 아니었다.
'이제 어떻게 하지? 가능한 빨리 회복해서 복귀해야 하는데…….'
팀의 타선이 약한 건 아니다. 다만 터져야 할 때 터져야 하는데 위기가 되면 투수를 포함해 수비들도 신경이 민감해진다.
그러니 기회가 와도 번번이 좋은 수비에 막히는 것이다. 전에는 자신이 그 틈을 계속 뚫었지만, 지금 타자들 중에선 상대의 수비를 뚫을 타자가 거의 없었다.
특히 챔피언십에 올라온 팀이라면 공격은 물론 수비에도 뛰어난 팀. 그게 아니라면 어느 한 쪽이 극단적으로 강해야 하지만, 그럴 수 있는 팀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되었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냐. 동팔이 오면 가능하지만…….'
지금 동팔이 있는 뉴욕 양키즈는 마침 서부 지역인 시애틀로 원정을 온다. 시애틀과 LA의 거리가 가까운 건 아니지만, 비행기로 이동하면 두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
그 정도면 충분히 올 수 있지만, 동욱은 동팔이 오는 기대를 버렸다.
'굳이 나한테 올 리가 없지. 제일 큰 걸림돌이 알아서 사라졌는데 뭐하러…….'
하지만 본심을 숨기지 못하는 걸까. 갑자기 병실의 문이 열리자 동욱은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어 문을 봤다.
그러나 온 사람은 자신의 주치의였다.
"지금 상태는 어떤가요?"
"나쁘지 않습니다. 언제쯤 복귀할 수 있겠습니까?"
주치의를 만날 때마다 항상 하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상태를 본 그의 말은 항상 같았다.
"다저스가 월드시리즈에 진출하길 기도해야 할 겁니다. 그것도 빠른 거예요."
의사는 발목의 상태를 본 다음, 가져온 약을 바르고 다시 붕대로 감았다. 그리고 절대 무리하지 말라는 신신당부를 하고 간호사와 함께 병실을 나갔다.
끼익.
그런데 다시 병실의 문이 열리자 동욱이 말했다.
"어? 놓고 간 것 있었나요?"
그는 주치의가 차트를 놓고 갔는가 싶었다. 하지만 의사는 놓고 간 것이 없었다. 동욱의 예상과 달리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강동팔이었다.
"어… 네가 왜… 여기……?"
솔직히 말하면 제일 필요한 사람이 동팔이었다. 그런데 왜 동팔이 여기에 왔단 말인가? 동팔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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