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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시리즈 우승을 제일 많이 했던 구단이 뉴욕 양키즈였지만, 최근에는 없었다. 그러니 월드시리즈 우승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저절로 알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기회가 지금 이 순간이라는 것도.
그래서 뉴욕 양키즈는 가을에 특히 강해지는 시애틀이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하지만 그들의 바람과 달리, 승리를 차곡차곡 쌓아간 시애틀 매리너스는 반경기 차이로 서부 지역 우승을 했다.
그리고 와일드카드로 올라온 구단을 상대로 가볍게 승리를 거듭하며 챔피언십까지 치고 올라오고 말았다.
* * *
아메리칸리그의 디비전 일정과 동시에 내셔널리그에서도 디비전시리즈가 진행되었다.
강력한 리그 우승 후보인 LA 다저스는 단 한 번의 패배만 하고 3승을 거두어 가볍게 챔피언십으로 진출했다.
그 중에 정규시즌에서 6할에 가까운 타율을 기록하며 메이저리그 역사상 새로운 기록을 세워나가고 있는 동욱의 활약이 눈부셨다.
총 4번의 경기 중, 본인만 5개의 득점을 하였고, 타점은 10 점이었다. 홈런으로 인해 중복되는 것이 있지만, LA 다저스가 디비전시리즈에서 얻은 17점의 점수 중 13개에 관여를 하였다.
당연히 동욱은 디비전시리저의 MVP로 선정되었고, 인터뷰까지 받았다.
"또 MVP네."
"다 해먹어라, 다 해먹어."
동욱의 활약으로 디비전시리즈는 통과했지만, 그렇다고 질투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비단 질투만이 아니었다.
"사람 무시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어떻게 1년 동안 말도 거의 안 할 수 있어?"
동료들과 대화를 거의 하지 않았고, 심지어 같은 한국인 선수인 류현민 투수와도 대화를 하지 않고 혼자서 지냈다.
그래서 지금은 아무리 뛰어난 성적을 거두어도 기뻐하는 반응 보다 재수 없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그 와중에 분위기 메이커를 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
"자자, 그래도 이겼으니까 기분 좋잖아. 한 경기 덜 하고 챔피언십에 진출하게 되었으니 더 유리하게 준비할 수 있고, 체력도 비축하고. 안 그래?"
"그야 그렇지만……."
"그리고 속물 같은 이야기지만, 챔피언십에서 우승하고,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하면 상금도 두둑해 진다고. 명예도 따라오지.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월드시리즈 우승을 경험하는 것은 어렵다는 건 다들 알잖아. 동욱이 있으니 우린 운이 좋은 거야. 그러니 열심히 일해서 우리에게 돈을 벌어다 주는 사람에게 너무 박하게 대할 필요가 있겠어?"
분위기를 만들면서도 은근히 동욱을 내려 깎는 말을 했다. 다른 말보다 그 말에 LA 다저스의 선수들이 반응을 보였다.
"그렇지…나쁠 건 없지."
"그냥 굴러 들어오는 것을 찰 필요는 없는 거니까."
그렇게 말을 하곤 클럽하우스로 갔다. 동욱의 인터뷰가 끝났을 때, 더그아웃에서 그를 위해 기다리는 선수는 같은 한국인인 류현민이 유일했다.
"죄송합니다. 혹시 기다리셨습니까?"
"아냐. 많이 안 기다렸어."
말을 하지 않아도 동욱은 자신이 팀 내에서 어떤 상황인지 알고 있다. 뛰어난 득점기계. 그리고 승리를 얻게 해주는 도구.
처음에는 자신에게 다가와 주던 사람이 많았지만, 지금은 같은 국적의 형인 류현민만 자신을 챙겨주고 있었다.
"이러실 필요 없습니다. 형도 오늘 선발이라 많이 힘드시잖아요."
"하고 싶어서 하는 거야. 그리고 내가 아니면 널 누가 챙기냐?"
그렇게 대화를 하면서 그들도 클럽하우스로 갔다. 하지만 먼저 온 동료들은 이미 옷을 다 갈아입고 떠난 다음이었다.
무언가 허탈한 느낌이 드는 동욱이었다. 하지만 표현하지 않고 담담하게 옷을 갈아입었다.
'괜찮아… 어차피 내가 자초한 거니까…….'
오직 승리를 위해서 달려왔다.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 이번 시즌에 우승하지 못하면 모든 것이 끝나기 때문에 모든 것을 걸 수 있었다.
자신의 평판도 예외는 아니었다.
동욱의 모습에 현민은 고민이 되었다.
'정말 이대로 왕따를 시켜도 될까?'
곧 디비전시리즈 통과를 자축하는 모임이 있다. 그리고 지금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다만 알려줄 때 조건이 있었다.
동욱에게는 절대 말하지 말라는 조건. 처음에는 안쓰러운 마음에 지키지 않고 데려왔지만, 오히려 그 결정으로 인해 더 서먹해지고 말았었다.
그러니 지금같은 상황에 동료들이 말한 조건을 어길 자신이 없었다.
"동욱아 이제 어디로 갈 거야?"
"집으로 가서 쉴 겁니다. 마침 홈에서 경기가 열려서 가깝잖아요."
"그래……."
구단의 특색이 있지만, 대동소이하여 비슷한 것도 많다. 그 중 하나가 토너먼트를 통과하면 자체적으로 축하하는 자리를 만드는 것. 그런데 그 자리에 승리를 이끈 주역이 없다면 말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욱은 집으로 간다고 했다. 이 사실을 현민도 모르지 않았다.
"그래… 잘 쉬고… 그럼 내일 보자."
"네. 오늘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현민은 따로 클럽하우스를 나왔다. 그러는 사이, 그들도 모르는 은밀한 작업이 일어나고 있었다.
경기가 끝나고 모든 물품과 도구를 정리해야 한다. 야구공도 예외는 아니다. 메이저리그에서 쓰는 공이기 때문에 항상 최상의 품질을 충족시켜야 했다.
무조건 새로 만든 야구공만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재정적인 압박을 무시할 수 없으니 사용한 야구공 중에서 잘 닦으면 다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흠집이 있거나 심하게 상한 야구공을 제외하면 다시 닦아서 쓴다. 그러기 위해선 야구공을 정해진 곳으로 모으는 것이 당연한 일.
야구공을 담다가 어떤 사람이 하나를 놓치고 말았다.
툭, 데구르르…….
그런데 야구공이 굴러간 곳은 계단이었다.
"이런 젠장……."
한 번 굴러 떨어진 공은 저 아래를 향해 한도 끝도 없이 내려갔다. 이미 많은 야구공을 바구니에 담은 상태였고, 모아두고 닦는 곳은 지척이었다.
"쳇… 나중에 주워야지……. 어차피 이제 관중도 없고, 선수들도 다 나갔을 테니까."
바구니의 많은 공을 들고 내려가는 것보다 모아두는 곳에 둔 다음 가볍게 해서 내려가는 것이 체력적으로 효율적이다.
그 생각을 한 사람은 야구공을 가득 담은 바구니를 가지고 모아두는 곳에 두었다. 그리고 혹시라도 어떤 사람이 야구공을 밟아 다칠 것을 우려하여. 동시에 자신도 그 사고의 대상이 될 수 있으니 조심해서 계단을 내려갔다.
"이거… 왜 이렇게 어두워? 누가 불을 껐나?"
천천히 계단을 계속 내려갔다. 그러다 그는 한 사람의 비명소리를 듣게 되었다.
"억!!"
우당탕!!
이어지는 소리를 듣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았다. 바로 자신이 걱정했던 일이었다.
"대체 누가 밝고 넘어진 거야? 재수 오지게 없는 놈이네."
작게 말한 다음, 걱정되니 크게 소리치며 내려갔다. 적어도 저 아래에서 들렸다면 거기에 가는 사이에는 굴러간 야구공이 없다는 증거였으니까.
"괜찮으세요?!!"
그리고 재빨리 내려가자 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 어? 한동욱…선수?"
계단에 쓰러진 선수는 한동욱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허탈한 느낌에 클럽하우스에 남아 있다가 늦게 나왔다.
거기에 누가 껐는지 몰라도 어두운 계단이었고, 스위치를 찾아 내려가기엔 위에서 내리는 적당한 조명빛으로 어느 정도 구분이 가능했다.
또한 경기 때만 아니라 평상시에도 항상 오가던 계단이었으니 눈을 감고 내려가도 몸이 계단의 숫자와 높이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별다른 주의를 하지 않고 내려갔다. 그러다 계단의 그림자에 가려진 야구공을 보지 못해 밝고 말았다.
'젠장…계단에서 구른 것은 둘째 치고 발목이…….'
그런데 마침 자신이 넘어지자 위에서 듣고 사람이 내려오고 있었다. 별다른 구조요청을 할 필요가 없어서 다행이었지만, 자신을 보는 그의 표정이 창백하게 변하자 이상하게 생각했다.
'왜 저러지?'
그런데 사정을 알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젠장…내가 놓친 야구공에 설마…….'
자신의 실수로 연봉 1억 달러인 선수가 챔피언십에서 활약하지 못할 수 있었다.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자신은 해고되는 것은 물론 LA 다저스의 많은 팬들에게 비난을 듣게 될 것이다. 그 생각만으로 그의 의식은 점점 아득하게 멀어지기 직전이었다.
"저기요!! 먼저 911!!! 911 불러주세요!! 어서!!"
그나마 동욱이 외치지 않았다면 그대로 기절했을지도 몰랐다. 결국 구조요청을 하고, 다저스 스타디움에 아직 남아 있는 의사덕분에 빠른 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적어도 챔피언십에 선수로 나갈 생각은 안 하는 것이 좋을 겁니다. 제대로 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무리하면 더 이상 선수생활을 못할 수도 있어요."
제일 심각한 것은 야구공을 밟은 오른쪽 발목을 심하게 접질린 것이었다. 동욱의 부상 소식은 그 다음날 메인 토픽으로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이 모든 것을 지켜 본 스크레이치는 입가에 미소를 잔뜩 지었다.
"잘 됐군… 오만한 자식……."
* * *
동욱의 부상 소식이 알려지던 때.
파죽지세로 시즌 초반부터 끝까지 기세를 이어온 양키즈는 디비전에서 막혔던 설움을 풀듯 단번에 뚫고 챔피언십에 진출했다.
하지만 타이틀이 다를 뿐, 결국 월드시리즈로 가는 길목에서 시애틀과 다시 만나게 되자 분위기는 급격하게 가라앉았다.
"아…또 시애틀이네……."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팀이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야?"
그렇게 말해도 재작년 월드시리즈 우승팀이었고, 작년에는 준우승을 차지한 구단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강력한 선발이 있는 것도, 뛰어난 타자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수비 조직력이 좋으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모든 것이 평범한 수준이지만, 아슬아슬하게 승률이 조금 더 높다는 것뿐이다.
올해를 포함하여 지난 3년 동안 그러고도 포스트시즌에서 대활약을 하는 것을 보면 감독의 용병술인가 싶지만, 그렇게 보기에도 미심쩍었다.
그래서 오죽하면 메이저리그에선 이런 말이 돌아다녔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운 좋은 팀은 이길 수 없다.
하지만 이것은 운이 아니라, 철저히 계산된 사기극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그러나 그걸 모르는 사람들은 징크스에 얽매이기 마련이다. 시애틀의 팬이나 선수들은 역대 최고 승률을 기록한 뉴욕 양키즈를 상대로 해볼만 하다고 생각한다.
반면 양키즈는 특별이 잘하는 것이 없고, 만만한 시애틀을 상대하게 되었어도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쁨보다 걱정이 더 앞서고 있었다.
특히 징크스에 더 크게 영향을 받는 선수들의 심리적인 상태는 정규시즌에서 패했을 때보다 나빴다.
뉴욕에서 먼저 치르기 때문에 양키즈 선수들은 클럽하우스에서 다가올 경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
하지만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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