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
"살려주세요. 피가… 많이……."
헤럴드는 점점 멀어지는 의식을 붙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저항할 수 없는 힘에 끌려가듯 더 이상 의식을 유지하지 못했다.
-저기요, 지금 상태가 어떠신가요? 위치는요?
헤럴드가 들은 마지막 음성은 누구인지도 모를 자신을 위해 걱정하는 구급대원의 다급한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를 들으며 헤럴드는 자신에게 말했다.
'나… 그동안 무슨 짓을 하며 살아온 거지……?'
다음날, 헤럴드가 불운한 사고와 뒤늦은 신고로 인해 세상을 떠났음을 전 세계가 알게 되었다.
그리고 헤럴드에 대한 야구계의 애도는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스프링캠프가 마무리되었고, 야구팬들은 새로 시작될 시즌으로 헤럴드에 대한 기억을 날려 보냈다.
# 회복의 시구
메이저리그 개막전.
그 자체만으로 야구팬의 이목을 잡아 끌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부족하다 생각하는 사무국과 방송국은 또 다른 파이를 팬들에게 제공하기 위해 노력을 한다.
그것은 바로 라이벌. 연고지 라이벌도 좋지만, 오랜 시간 쌓아올린 라이벌 구도는 똑같은 레파토리라도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 유용한 수단이다.
그리고 그걸 자주 이용하다보니 뉴욕 양키즈 팬들은 절로 짜증이 튀어 나왔다.
"개막전 상대가 또 보스턴이냐!!!"
계속 맞붙으니 이젠 짜증이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안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양키즈 팬들은 보스턴 팬의 라이벌 의식에 큰 신경을 쓰지 않지만, 이렇게까지 계속 나오니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었다.
"저걸 그냥 확 완전히 뭉개버려야 하는데."
"월드시리즈 우승도 몇 번 못한 놈들이 무슨."
월드시리즈만 아니라 리그 우승도 뉴욕 양키즈가 보스턴 레드삭스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당연히 양키즈 팬들은 감히 자신들과 라이벌이라 자칭하는 보스턴이 좋게 보일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반응이야 말로 메이저리그 사무국과 광고로 먹고 사는 방송국이 좋아하는 패턴이었다.
그렇다고 라이벌 구도만 부각시키지는 않는다. 경쟁적인 부분만 아니라 화기애애하고 가슴이 뿌듯하며 감동을 줄 수 있는 이야기도 가능하면 추가해야 했다.
그리고 마침 이번 시구자가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었다.
작년과 달리 이젠 병원에서 나와도 될 정도로 회복을 한 루시는 시구 전에 양키즈 선수들과 만나고 있었다.
"많이 나아졌다고 들었는데 어떠니?"
"이젠 머리도 많이 자랐네. 다행이야."
이미 그들은 루시의 병문안을 종종 왔었기 때문에, 루시는 편하게 말할 수 있었다.
"다행히 골수 이식이 잘 되었다고 했어요. 이제 약만 꾸준히 먹으면 회복할 수 있다고 하셨어요."
루시의 이야기가 뉴스와 각종 언론 매체를 통해 알려진 이후, 미국 전역에서 조혈모세포 기증이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그리고 그 중, 루시와 맞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래서 지금은 보는 바와 같이 독한 약을 쓸 필요가 없는 단계까지 치료되었다.
그 증거로 루시는 이번 시구에 가발을 쓰지 않아도 되었다.
그래도 마른 몸은 여전해서 지금 들고 있는 야구공조차 무겁게 보였다.
그러던 중, 루시의 아빠인 제임스가 밝은 표정으로 들어왔다. 루시의 표정이 더 밝아졌다.
"아빠~!!"
"그래, 우리 공주님. 삼촌들이랑 재밌게 놀고 있었어?"
"응!!"
루시는 재빨리 제임스의 품에 안기더니 양팔로 아빠의 목을 끌어안았다. 심하지 않더라도 쓰레기 냄새가 났다. 그래서 제임스는 루시를 떼어놓으려 했지만, 의외로 루시는 끌어안은 팔을 풀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강하게 끌어안으려고 했다.
떼어놓으려면 힘으로 할 수 있겠지만, 제임스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오히려 이렇게 안으려 하는 딸이 고마웠다.
'내가 청소부인 것을 싫어할 줄 알았는데…….'
이전부터 자신이 어떤 일을 하는지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구를 하게 되니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임스는 혹시라도 딸이 실망하는 것은 아닌가 걱정했지만, 루시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었다.
그러던 중, 로날드가 루시에게 물었다.
"루시, 아빠가 청소부인 것을 알았어?"
"네."
"그래? 어떻게?"
"항상 만나러 오실 때마다 냄새가 나요. 처음에는 싫었지만, 그 냄새가 아빠가 왔다는 증거가 되니까 싫지 않았어요."
그 말을 하고 루시는 더 밝게 미소를 지었다.
루시의 말에 제임스는 가슴이 뭉클했다. 그리고 제임스만 아니라 사람들 전부 뭉클했다.
"그리고 동팔 아저씨가 말해줬어요. 청소부는 자기가 더러워져도 세상을 깨끗하게 해주는 사람이다. 그러니 존경해야 하는 사람들이라고요."
루시의 말에 양키즈 선수들이 말했다.
"그럼 당연하지."
"루시, 아빠와 함께 청소하시는 분들 덕분에 양키스타디움이 깨끗한 것 아니겠어?"
"여기 청소부 아저씨들만 아니라 매점 직원들이랑도 많이 친해."
그들의 말을 증명해주기 위해서인지 마침 청소도구들을 들고 다른 청소부가 나타났다.
"데니. 미안하지만 비켜줘."
청소부의 말에 데니는 따지지 않고 바로 자리를 비켰다. 그러자 청소부는 데니가 서 있던 곳에 떨어진 쓰레기를 재빨리 쓸어 담았다.
"그럼 오늘도 수고해. 안타랑 홈런 팍팍 치고."
"응원 감사합니다."
이전에는 말도 하지 않았었지만, 편하게 말을 섞는 사이가 된지는 꽤 되었다.
그러던 중 동팔이 들어왔다. 뉴욕 양키즈의 1선발이니 작년과 같이 개막전의 선발투수로 마운드에 오른다.
동팔은 루시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안녕, 루시. 몸은 어떠니?"
"좋아요. 얼마든지 던질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럼 다행이고. 한 번 던져볼까?"
"네!!"
실내였지만 루시는 몇 미터 떨어진 곳을 향해 공을 던졌다. 하지만 아직 어린 소녀이고 백혈병이 완치된 것은 아니라 멀리가지는 못했다. 그리고 처음에는 던지는 것이 어색해서 바닥에 패대기치듯 던졌었다.
하지만 전문가가 모인 이곳에서 그들의 조언대로 공을 던지자 처음보다 공이 멀리 날아갔다.
"실내해서 하는 건 이 정도로 하고, 이제 밖에서 한 번 던져보자."
"네!!"
체력과 근력이 약하니 연습도 많이 할 수 없었다. 그걸 감안하여 다 같이 밖으로 나와 더그아웃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루시는 동팔과 같이 마운드에 오른 다음 기다리고 있던 포수를 보았다.
"우와… 생각보다 머네요."
"TV에서 보는 것과 느낌이 다르지? 여성 시구자 중에서도 마운드에서 공을 던지는 경우는 거의 없어. 그보다 더 앞에서 던진다."
동팔의 말에 루시는 동팔과 함께 몇 걸음 더 걸어갔다. 생각보다 많이 앞으로 왔지만, 그것을 두고 뭐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세 번의 연습을 한 다음, 루시가 던질 수 있는 거리를 가늠했다. 이제 남은 것은 공식적인 시구. 그리고 그 이후에 있을 뉴욕 양키즈와 보스턴 레드삭스의 개막전이었다.
항상 그렇듯 시간이 되자 진행자의 소개로 시구가 시작되었다.
"오늘 시구자를 소개합니다. 뉴욕의 희망의 아이콘, 루시 스미스~!!"
루시가 아빠인 제임스와 함께 나오자 전광판에는 작년에 있었던 순간이 동영상으로 나왔다. 광고와 같이 짧았지만, 편집이 잘 되어 있어서 루시의 일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 순간을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진행자는 루시와 제임스에게 간단한 질문을 했다.
"안녕하세요. 미스터 스미스. 그리고 루시. 작년보다 건강해 보이는데 어때요?"
"네, 이젠 많이 안 아파요."
"그것 참 다행이에요. 미스터 스미스. 그때 이후 어떠셨나요?"
그의 물음은 이미 정해진 질문이라 제임스는 생각해 놓은 답을 술술 말했다.
"많은 분께서 알아봐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지금도 경기 중에 청소하면 루시의 안부를 물어봐 주시는 분들이 계세요. 그리고……."
그 이후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간략하게 말해주었다. 덤으로 루시의 병세가 많이 나아져서 시구를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는 것까지 말했다.
그러는 사이 관중들은 하나 둘 씩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제 루시 양이 시구를 합니다. 그럼 자리로."
"네."
루시는 이미 방금 전의 연습으로 알게 된 적당한 곳으로 갔다. 어설프지만 자세를 잡고 기다리고 있는 포수를 향해 공을 던졌다.
휙~ 툭.
공을 끝까지 가지 못하고 포수 앞에서 떨어졌다. 생각보다 멀리가지 못하자 루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관중들은 그날 이후, 루시가 많이 나아서 공을 던졌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휘익~!!"
"잘 했어, 루시!!"
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
모든 관중들은 일어난 상태에서 루시에게 박수를 보냈다. 이 관중에는 원정으로 온 보스턴 레드삭스의 선수와 팬도 예외는 아니었다.
관중들의 박수와 응원에 루시도 밝게 웃으며 그들에게 인사하고, 더그아웃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 * *
시구가 끝나면 당연히 본격적으로 경기가 시작된다.
루시의 회복과 시구는 모든 사람에게 감동과 기쁨을 선사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모두가 행복한 동화속 이야기가 아닌, 어느 한 팀만 기뻐하는 현실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이번 개막전은 뉴욕에서 한다. 그러니 처음 공격하는 쪽은 보스턴 레드삭스였고, 당연히 마운드에는 수비의 핵심인 투수 강동팔이 올라와 있었다.
가볍게 투구를 하며 몸의 상태를 확인하는 사이, 중계진은 이번 경기의 특이한 점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드디어 메이저리그가 시작되었습니다. 역시 이번 마운드도 아메리칸 리그 최고의 투수인 강동팔 선수가 지키고 있습니다. 뉴욕 양키즈는 이번 시즌에 트레이드를 거의 하지 않았는데요. 그래서 얻는 것은 역시나 조직력이겠죠?"
"팀 스포츠인 야구에서 조직력만큼 중요한 것이 또 있겠습니까. 각자 개인의 능력이 뛰어나야 하고, 개인들이 유기적인 플레이를 펼치지 못하면 결국 참사밖에 남지 않습니다."
"그렇죠. 빼어난 수비와 주루플레이를 보여줄지. 아니면 실책으로 대량의 실점을 허락할지가 찰나의 순간에 결정됩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이번 시즌에서 뉴욕 양키즈가 선전할 것이라 보고 있습니다. 거기에 트레이드가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운드의 전력이 보강되었습니다. 바로 캔자스시티의 에이스였던 남궁지완이 지난 시즌 후반에 완벽하게 부활했었죠."
화면에는 지완에 대한 기록이 나왔다.
캔자스시티에 있었을 때의 전체 기록과 작년에 잠깐 나왔었던 기록을 보여주었다.
"지난 시즌 후반에는 중간 계투진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막바지가 되자 마무리로 던졌는데요. 강동팔 선수와 비견되는 구위를 가진데다 항상 전력으로 던질 수 있게 되니 지완 선수의 공이 타격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특히 처음 등장했을 때 지금 상대하는 보스턴에게 삼구 삼자범퇴와 퍼펙트 이닝을 달성했던 순간은 지금 봐도 전율입니다."
그러자 준비되어 있던 그때의 영상이 빠르게 나왔다. 전부 보여주지는 않고, 지완이 던지는 12번의 투구의 순간만 편집하여 4초 안에 영상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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