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오력의 투수-287화 (287/325)

[287]

"그런데 괜찮을까요? 지금 이렇게 즐겁게 보내도……."

지금 지완은 물론 동팔도 피트 카터의 환영회에 함께 하고 있었다. 당연히 짓궂은 장난을 하고 난 다음이니 분위기는 유쾌할 것이다.

물론 피트 카터를 제외하고.

하지만 지금 동팔에게 남은 기회는 이번 시즌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 훈련보다 사람들과 즐기는 파티에 함께 하는 것이 괜찮을지 걱정되었다.

그러자 하얀 늑대의 벗이 말했다.

"괜찮다. 오히려 권장하는 바다. 너무 팽팽하게 당긴 줄은 끊어지기 쉽다. 지금 쉴 수 있을 때 쉬어두는 것이 좋다."

그의 말에 두 여인도 조금은 안심할 수 있었다.

불안해도 희망이 있었기에 어떻게든 앞으로 한 걸음 내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들과 달리, 계약에서 해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끝없는 절망 속에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     *     *

헤럴드는 자신의 넓은 집에서 침대에 앉아 오른손을 보고 있었다. 힘을 주면서 어떻게든 움직이려 했지만, 마음뿐이었다.

끊어진 신경과 움직이지 못하는 오른팔은 고깃덩어리를 매달아 놓은 이질감만을 느끼게 만들었다.

"젠장… 젠장… 젠장……."

그래도 혈관은 이어져 있었고, 덕분에 팔꿈치 아래로 감각만 없을 뿐이지 세포가 괴사하거나 썩지는 않았다.

수술을 한 의사는 헤럴드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어서 붙이긴 했지만, 회복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정확하기 말하면 혈관이나 근육, 인대와 힘줄이 붙을 가능성은 높지만, 신경은 확답을 드릴 수가 없군요. 혹시라도 감각이 돌아오면 회복되고 있다는 증거니 바로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하지만 동욱의 타구에 맞아 부상을 당한 이후로 감각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희망을 포기하지 말라면서 의사는 가능한 오른팔을 주무르거나 움직여 근육이 약해지지 않도록 하라고 말했다.

혈액순환이 잘되면 혹시라도 신경이 회복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열심히 주무르고 마자시를 했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감각이 돌아오지 않자, 지금은 거의 포기하고 느껴지지 않는 부위를 매달다 시피 하고 있었다.

이젠 처음과 달리 나름 익숙해진 왼손으로 술을 따른다. 연황색 맑은 빛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을 즐겁게 만든다.

술잔에 있는 투명한 얼음은 미관만 아니라 술을 차갑게 하여 또 다른 풍미를 선사할 준비를 했다.

하지만 헤럴드는 얼음의 배려를 통째로 날렸다.

"젠장!!!"

휙~ 챙그랑!!!

헤럴드가 던진 작은 유리 술잔은 벽에 부딪히더니 안에 담긴 술 및 얼음과 함께 산산이 부셔졌다.

날카로운 유리 파편이 바닥에 떨어져도 치울 생각을 하지 않고 지금의 상태를 비관하고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하지? 재미가 없어. 내가 왜 세상을 살아야 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아니, 그건 그 녀석이 노리고 했다고 그랬었지?'

자신과 계약한 악마인 모데스가 말해준 것이다. 악마의 말을 전부 다 믿을 수는 없지만, 동욱의 능력을 생각하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맞아. 거의 확실해. 그러니 경고를 하고, 내가 무시하니까 그런 짓을 저질렀지. 자기가 약한 것을 두고 남 탓만 하는 새끼…….'

그 생각을 하니 헤럴드는 더욱 짜증과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이대로 끝낼 수는 없어. 적어도 그 새끼만큼은 어떻게 하지 않으면… 그런데 어떻게 하지? 어차피 내가 말해도 들어줄 사람은 없는데……."

지금 자신에게 일어난 일은 어디까지나 불운한 사고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은 불행한 사고에 선수 생명이 끝난 것으로 보고 동정의 시선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동욱이 의도적으로 노렸다고 하면 동정의 시선은 사라지고, 추잡하다는 눈빛으로 볼 것이 뻔했다.

"방법이 필요해… 어떻게든 엿을 먹일 방법이… 그러면서도 내가 다치지 않을 방법이어야 하는데……."

단순히 원한이라면 총을 들고 가서 쏘면 된다. 그러나 평상시에 방비가 잘 되어 있으니 총기 소지가 되는 미국이라도 총으로 다른 사람을 쏘기란 어렵다.

만약 공개적인 장소에서 총을 꺼내서 겨누는 순간, 경찰이나 다른 사람이 총을 꺼내서 자신의 심장을 노릴 것이다.

"총은 좋지 않아. 그렇다고 다른 사람을 시킬 수도 없고… 그리고…어차피 1년도 남지 않은 목숨인데 내 목숨을 걸 이유는 없잖아?"

느긋하게 경기를 보다가, 월드시리즈에 진출하지 못하거나 진출해도 우승에 실패하여 좌절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아무리 뛰어난 전력을 가졌어도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자신처럼 경기 결과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보기만 하는 것은 마음에 안 들어. 성에 안 차. 어떻게든 내가 그 녀석을 조져야 하는데… 경기에 뛸 수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역시 경기 외적인 방법밖에 없어."

이미 동욱이 LA다저스로 갔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자신이 살고 있는 시애틀과 멀리 떨어지지 않았다.

물론 이것도 헤럴드의 생각일 뿐이다. 한국과 달리 미국은 국토가 넓다. 그 상황에서 1500km 정도의 거리는 비행기로 두 시간 남짓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다.

헤럴드는 그 생각을 하다가 마침 또 다른 사람을 떠올렸다.

"맞아, 동욱만 아니라 동팔도 있었지. 그 녀석이 우승하게 둘 수는 없는데……."

지난 시즌에선 자신이 막았지만, 이번 시즌에선 아메리칸 리그의 팀 중에 뉴욕 양키즈를 막을 수 있는 구단이 딱히 보이지 않았다.

동욱에 대한 원한도 크지만, 동팔이 잘 되는 것을 보는 것도 싫었다.

"이왕이면 두 녀석을 어떻게든 끝내야 해. 그래, 한국이라고 했지? 휴전 상태라고 하니 전쟁이 나면 징병이 될까? 그럼 이참에 모데스랑 그런 쪽으로 이야기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헤럴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거실로 걸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방금 전에 던진 유리잔의 파편이 그의 발바닥을 찔렀다.

"아!!"

날카로운 무언가가 발바닥 한 가운데를 강하게 찔렀다. 헤럴드는 발바닥의 피부와 근육을 뚫고, 뼈 사이에 박힌 유리조각으로 인해 서 있지 못하고 넘어졌다.

콰당.

그런데 운이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정말로 천벌일까. 넘어지면서 디딘 왼쪽 손바닥도 유리파편에 깊이 찔리고 말았다.

"악!!"

짧은 비명소리가 넓은 저택을 울렸지만, 아무도 없는 곳이라 도와주러 올 사람이 없었다.

"젠장, 젠장……."

헤럴드는 지금 겪는 고통에 벗어나기 위해 먼저 왼손에 박힌 유리를 빼려고 했다. 하지만 투명한 유리조각은 붉은 피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오른손을 쓸 수 없다는 것이었다.

헤럴드는 손바닥 깊이 느껴지는 고통을 통해 유리조각의 위치를 파악해야 했다. 그리고 더 아프지만 왼손바닥에 힘을 주어 유리조각을 밀어냈고, 입으로 겨우 빼낼 수 있었다.

주르륵.

겨우 유리조각을 뺐지만, 그로인해 막혀 있었던 혈관이 터지며 피가 많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방금 전의 걸리적거리며 찌르던 느낌이 없자 오히려 시원하게 느껴졌다.

"됐어. 이제 발에 있는 것만 빼면 되는데……."

문제는 발바닥이라서 보이지 않았다. 피범벅이 된 왼손으로 겨우 일어나 침대에 다시 앉은 다음, 발바닥을 최대한 올려 유리파편을 찾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왼손과 같이 투명한 유리파편을 찾는 것은 어려웠다. 거기에 뼈 사이에 박히는 바람에 힘을 주면 너무 아팠다.

"이거… 어떻게……."

남에게 도움을 요청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계속 빼내려고만 했다. 하지만 지혈이 되지 않아서 왼손바닥과 발바닥에서 흘러나오는 붉은 피가 방해하고 있었다.

닿기는 하지만 피로 인해 미끄러워 빼지 못하던 중, 헤럴드는 의식이 점점 흐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 왜… 이러지……?"

주변을 보았다. 그러자 어느새 흐른 자신의 피가 바닥을 흥건히 적시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거… 위험한데……."

아무리 학교에서 수업을 잘 듣지 않았더라도 피가 많이 흐르면 위험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서 유리파편을 빼기보다 먼저 지혈에 신경쓰기로 했다.

"이거… 멈출 수 있을까? 아… 911."

방금 전처럼 멋모르고 걷다가 또 유리조각에 찔릴 것이 무서워 기어갔다. 전에는 크게 열 몇 걸음만 걸으면 갈 수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포복하듯 기어가고 있으니 더 멀리 느껴졌다. 헤럴드가 지나간 곳엔 붉은 피가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심장이 요동치며 손바닥과 발바닥의 상처에서 나오는 피도 요동쳤다. 그럴수록 헤럴드의 의식은 점점 아득하게 멀어지고 있었다.

'내가… 왜 이걸 먼저… 생각하지 못해서…….'

다치자마자 욕을 하더라도 911에 연락할 생각만 했다면 지금처럼 위험한 상황은 없었다. 그래도 아직 희망이 있다고 생각해 어떻게든 사력을 다해 거실로 기어갔다.

그러던 중, 헤럴드는 의외의 존재와 마주쳤다.

"모데… 스?"

계약을 한 악마가 자신을 보고 웃고 있었다. 하지만 헤럴드는 그 미소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그에게 도움을 청했다.

"너…물리력 행사가 가능하지……? 핸드폰 좀… 줘."

이제 거실에 가면 전화기가, 핸드폰이 있다. 그리고 911을 누르고 도움을 요청하기만 하면 구급대가 알아서 위치를 파악하고 도와주러 올 것이다.

하지만 모데스는 자신의 계약자였던 헤럴드를 보기만 했다.

"내가 왜 그래야하지? 이미 쓸모도 없는 사냥개를 위해서."

그의 말을 듣자 헤럴드는 그가 왜 여기에 왔는지 알았다.

"너… 설마……."

"너의 몸에 심어둔 힘을 거둘 때가 왔다. 억울해 하지 마. 그렇지 않아도 많이 즐겼잖아."

모데스는 그 말을 하고 헤럴드의 앞을 막아섰다. 그러자 헤럴드는 모데스를 보며 말했다.

"닥쳐… 씨……."

욕이 나오려는 찰나, 모데스가 말했다.

"어차피 너는 천국에 갈 수도 없어. 그럼 결국 나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데… 그 이후를 감당할 수 있겠나?"

그러자 헤럴드의 입이 저절로 닫혀졌다. 그러나 살아있는 이상, 희망을 버릴 수는 없었다.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어도 목숨이 걸리는 이상 직접적으로 할 수는 없어. 지금 모데스가 할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내 시야를 흐리는 것이 전부…….'

계속 만났으니 모데스가 자신의 앞에 나타난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최대한 방향을 잡고, 핸드폰이 있는 곳을 향해 기어갔다.

그리고 겨우겨우 핸드폰을 손에 넣었다. 하지만 기뻐할 수가 없었다.

'전원이…꺼져있어? 충전을 언제 했… 더라……?'

지금 상태에서 충전기를 찾고, 연결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점점 의식이 멀어지면서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도 어려웠다. 그래도 최후의 발악을 하기 위해 전원버튼을 눌러봤다.

다행히 방전된 것은 아니었다. 화면이 밝아지며 켜졌다. 그리고 정상적으로 작동할 준비가 되자 떨리는 손가락으로 잠금을 해제했다.

헤럴드는 911을 눌렀고, 연결이 되자 바로 말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