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오력의 투수-286화 (286/325)

[286]

경황이 없으니 피트 카터는 데니 행크스의 말대로 따랐다. 어차피 그 정도 훈련은 여기 오면서 기본적으로 하는 것이었고, 계획에 포함되어 있으니 당연히 해야 할 훈련이었다.

다만 기초 체력 훈련에는 장거리 달리기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훈련은 정해진 시간을 통과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될 때까지 계속 뛰어야 한다.

당연히 뛰다가 괴로워도 한 번에 통과하기 위해선 모든 것을 쏟아내며 달려야 한다.

"허억, 허억, 허억……."

스프링캠프를 시작하기 전까지 뛴 것이 없었으니 전보다 더 힘들고 괴로웠다. 하지만 겨우 한번에 합격할 수 있었고, 지금은 잠시 쉬고 있었다.

그러던 중 예정된 순서대로 혜진이 다가와 수건과 이온음료를 건네주었다.

"곧 타격 훈련이 있을 예정이니 회복해 두세요."

"감사합니다."

이미 모든 이야기가 된 상황이라 혜진은 수건을 건네주면서 결혼반지가 보이지 않게 했다. 그걸 모르는 피트 카터는 자신에게 수건을 가져다 준 혜진에게 저절로 눈길이 갔다.

'매니저인가? 아니 메이저리그 구단에 매니저가 있어? 양키즈의 특징인가?'

그렇다면 아주 좋은 특징이었다. 미녀가 매니저가 되어 선수들을 관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물론 아주 틀린 건 아니었다. 혜진은 실제로 양키즈의 수석분석관이었으며, 다른 구단의 선수만 아니라 양키즈의 선수도 분석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다만 피트 카터가 생각하는 매니저와 많이 다른 건 사실이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한 번 찔러봐?'

사냥감이 미끼에 끌려 함정에 빠지고 있었다. 하지만 피트 카터는 지금 사냥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사냥감은 자신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작년의 데니 행크스와 다른 점은 생각한대로 바로 행동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훈련 중에 종종 나오는 혜진을 훔쳐보긴 했다. 그리고 점심을 먹을 땐 옆에 다가가기 까지 했다. 하지만 데니 행크스가 바라던 고백은 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저녁을 넘기자 데니 행크스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지? 오늘을 넘기면 지완이랑 혜진씨한테 미안해지는데……."

이번 일은 자신이 적극적으로 요청해서 한 일이다. 비록 두 사람이 받아들여줬지만, 부부사이인 두 사람에게 민폐가 된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데니 행크스가 그나마 덜 미안한 시간은 오늘 하루. 그러니 오늘이 지나면 피트 카터에게 두 사람이 부부임을 알려주기로 했다.

초조해하는 데니 행크스에게 다른 동료가 말했다.

"지나가면 어쩔 수 없는 거지 뭘."

"그래도 원하는 목적은 이루어졌잖아. 고분고분하게 말 잘 듣게 하기."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서 속이 상하겠지만, 더 이상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면 오늘로 끝내야지."

그 말을 하던 중, 문이 열리며 지완이 들어왔다. 소리없이 들어오는 바람에 그들은 깜짝 놀랐다.

"야, 말 좀 하고 들어와."

"어떻게 발자국 소리 하나 안 나? 동양인들은 정말로 닌자수련을 한다더니 사실이야?"

그들의 말에 지완은 자신의 발을 보여주었다. 지완이 신고 있는 신발은 바닥이 푹신한 실내화였다.

"닌자수련은 무슨 닌자수련. 지금 아내한테 연락이 왔어. 10분 있다가 단둘이 만나자고 피트 카터에게 연락이 왔단다."

"……!!"

단둘이. 그것도 저녁을 넘어 밤에 만나자고 한다면 자연스럽게 그림이 그려졌다.

"됐어!!"

원하던 순간이 다가왔음을 안 데니 행크스. 지완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미안해. 폐를 많이 끼쳤다. 이 빚은 반드시 갚을게."

"빚은 무슨.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지완의 물음에 데니 행크스는 지완의 발을 보며 말했다.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 물어? 어디서 만나기로 했지? 그리고 지금 신고 있는 신발은 어디서 구했어?"

그 말을 하자, 마침 도착한 동팔이 지완의 뒤에서 나타났다. 동팔은 바닥이 푹신해 걸어도 소리가 나지 않게 하는 실내화를 보여주며 말했다.

"신발은 많으니까 걱정하지 마."

*     *     *

10분 후

함정으로 걸어가는 줄도 모르고 피트 카터는 캠프 내의 식당에 있었다.

"이제 슬슬 올 때가 되었는데……."

그 말을 하기 무섭게 눈에 혜진이 오는 것이 보였다. 혜진은 피트 카터의 맞은편에 앉으면서 손을 식탁 아래로 내렸다.

"이야기 하실 것이 있다면서요? 어떤 이야기인가요?"

짐작은 충분히 가지만 모르는 척 하는 혜진. 그녀가 도착하자 이미 피트 카터의 뒤쪽에선 푹신한 실내화를 신은 선수들이 조심스럽게 걷고 있었다.

소리만 나지 않게 걷는 것이 아니었다. 연락을 받자마자, 식당에 있는 모든 반사체의 위치를 파악하고, 옮길 수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위치에 옮겼다.

고작 5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그래서 지금 피트 카터의 뒤에서 다가오는 선수들은 생각보다 수월하게,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다가서고 있었다.

혜진은 곧 다가올 상황에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최대한 참았다. 그리고 시선을 최대한 피트 카터에게 주며 그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했다.

"다른 게 아니라 눈에 띄도록 아름다워서 그렇습니다. 혹시 애인이 있나요?"

피트 카터의 말에 뒤에서 다가오고 있던 데니 행크스는 자신도 모르게 만세를 외칠 뻔 했다.

혜진은 사실의 단편만 말했다.

"아뇨. 없는데요. 하지만 애인 같은 남자는 있어요."

그 사람이 누구인지 피트 카터를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다. 피트 카터는 최대한 자신에게 좋을 방향으로만 생각의 흐름이 이어졌다.

'애인 같은 남자? 그냥 썸만 타는 사람인데 애인이 되기 직전인 건가? 그럼 더 늦기 전에 바로!!'

그래도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으로 해석하고 그 다음으로 넘어갔다.

"그럼 그 사람이 제가 되면 안 되겠습니까? 어떤 남자인지 모르지만, 혜진 씨의 매력을 모르는 남자보다 제가 더 나을 겁니다."

그 말을 하며 혜진의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혜진이 보는 곳은 피트 카터의 뒤에 있는 지완이었다.

지완은 손짓으로 끝내라는 표시를 했다. 그러자 혜진이 말했다.

"죄송하지만 제가 설명이 부족했군요. 애인이 없고, 애인 같은 남편이 있다고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네? 남편이요?"

확실히 남편은 애인과 사전적인 의미가 다르다. 하지만 애인보다 더 가까우며, 법적으로 묶여 있는 사이다.

결코 가볍게 처리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그리고 피트 카터가 놀라는 사이, 뒤에서 보고 있던 지완이 말했다.

"여보, 무슨 일이야?"

이미 다 알고 있었지만, 피트 카터에게 진실을 알려주기 위해 그 말을 했다. 그리고 부부사이에 할 수 있는 단어를 지완이 내뱉자 피트는 화들짝 놀랐다.

"어? 뭐? 여보?"

남편이 있다고 방금 전에 들었는데, 그 남편이 같은 팀의 지완이라고?

그래서 목소리가 들려오는 뒤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아주 좋은 장난감을 발견한 스무 명 남짓의 남자들이 보였다.

그리고 이미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몰라도, 2층의 테라스에서 감독과 코치들이 위에서 모든 상황을 보고 있었다.

"어, 어, 어?"

피트 카터는 너무 큰 충격에 어떤 사태가 발생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 어버버 거리고 있었다.

그러자 경험자인 데니 행크스가 나서서 말했다.

"피트. 너 지금 남편이 보는 앞에서 고백한 거야? 그것도 남편을 갈아치우라면서?"

"누, 누가……!!"

데니의 말에 피트는 부정하려 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방금 전에 한 말을 떠올렸다.

'잠깐, 내가 애인 같은 남자를 버리고 나랑 사귀자는 건…….'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혜진에게 대놓고 불륜을 저지르자는 제안이다. 그것도 남편이 보고 있는 앞에서.

그리고 지금 그 상황을 모두 보고 있는 가운데, 다른 누구의 강요가 아닌 자신의 선택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어, 억울해!!"

지금 분위기를 보면 이 모든 정황은 자신을 놀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뭔 상관이야? 네가 혜진씨에게 고백했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그것도 남편을 갈아치우라는 말과 함께."

본인이 부정해도 다른 사람이 인정하면 소용이 없는 법. 그래도 피트 카터는 어떻게든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너무 한 것 아닙니까? 절 속이려고 관계자도 아닌 사람을 끌어들이고!!"

그러자 2층에 있던 존 지라디 감독이 말했다.

"혜진씨는 관계자 맞아. 양키즈 수석분석관이고, 이번 캠프에서 선수들의 달라진 점과 필요한 부분을 분석하고 파악하는 사람이지. 실제로 오늘 너에게 한 지적은 혜진씨의 철저한 분석 끝에 나온 결론이니까 무시하지 말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감독이 한 말에 따지고 들 수는 없었다. 그리고 실제로 오늘 혜진이 자신의 폼을 지적한 부분은 본인도 인정할 수 있는 내용이었으니까.

데니 행크스는 방금 전의 일로 당황하며 기분이 나빠진 피트 카터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말했다.

"이걸로 나도 동지가 생겼어. 잘 해보자고."

"네?"

"사실 나도 작년에 혜진씨에게 고백했었거든. 그것도 바로 앞에서."

그의 말에 피트 카터는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함을 느꼈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물론 나는 좋아하니 사귀자고만 말했었지, 남편을 바꾸라곤 안했다고."

"끄응……."

그 이후로 선수들끼리 따로 만나면서 친목의 시간을 보냈다. 대부분 피트 카터의 실수를 놀리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그날 하루로 끝났다.

*     *     *

선수들이 신고식 겸, 신입환영회를 하고 있을 때.

혜진과 민희는 이미 호텔에 와서 쉬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들이 있는 곳엔 하얀 늑대의 벗이 있었다.

하얀 늑대의 벗에게 혜진이 말했다.

"고마워요. 덕분에 편하게 나올 수 있었어요."

"괜찮다. 이제 아기를 돌보는 것은 익숙하다."

스프링캠프에서 선수들의 숙박은 선수들이 알아서 한다. 메이저리그에 입성할 정도면 숙박비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자 원하는 숙박시설이 다르고 자존심도 강하니 구단에서 일일이 맞출 수도 없었다.

"부부가 있으니 예은이도 출입할 수 있지 않아요?"

"그렇긴 한데, 일하는데 방해되니까. 작년과 달리 보지 못해서 아쉽긴 하지만, 지금은 보려면 하얀 늑대의 벗이랑 너도 출입증이 있어야 하잖아."

"하긴 저는 어디까지나 에이전트 회사의 대표일 뿐이지 양키즈에 소속된 사람은 아니니까요."

그것은 하얀 늑대의 벗 또한 마찬가지다. 물론 동팔이 원하면 충분히 가능하지만, 지금은 자중하는 중이었다.

"가끔 예은이가 너무 보채면 괜찮으니까 오셔도 돼요."

"알았다. 이미 경비원들과 안면을 익혔으니 모르지 않을 거다."

하얀 늑대의 말에 민희는 생각했다.

'그럴 수밖에 없죠. 당신의 신체적인 특징이 너무 강렬한데.'

2미터가 넘는 키도 흔치 않지만, 건장한 몸에 인디언이라면 더욱 흔치 않다. 설령 그가 여장을 하더라도 경비원들은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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