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오력의 투수-283화 (283/325)

[283]

"내가 뭘… 그리고 지금 시대가 어느 시댄데 출가외인이란 말은 하지 마세요. 여기 있는 언니를 보면 알지만, 이젠 시집갔다고 인연 끝나는 것 아니거든. 그리고 엄마랑 아빠 보면 더 잘 알잖아. 지금도 외할아버지 댁에 자주가시면서."

"그래도 난 한국이잖아. 그런데 둘 다 미국으로 가면……."

만나는 것도 1년에 한 번이 고작이다. 물론 그 한번이 일주일 정도지만, 만나고 싶을 때 만나지 못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많은 아쉬움을 만들어 낸다.

그러자 은진이 말했다.

"지금 당장 시집가는 것도 아닌데 뭘 걱정하세요. 그리고 나랑 달리 형부는 은퇴하면 한국으로 오겠죠. 아마도."

결국 자신은 가더라도 언니가 올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아빠는 도저히 딸이 양보할 생각을 하지 않자, 결국 지완을 보며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지완도 어떻게 도와줄 방법이 없었다.

"아버님. 처제 말대로 당장 가는 것도 아니고, 로날드가 특별히 어디 나쁜 구석이 있는 친구도 아닙니다. 착실한 사람입니다."

자신이 바라는 말이 아니자 아빠의 표정이 안 좋았다. 하지만 지완도 같은 팀 동료이자, 동팔을 위해서 타점을 지원해줄 사람이니 나쁘게 말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른 딸인 혜진을 보았다. 하지만…….

'어차피 혜진이도 은진이랑 같은 입장이니 같은 말을 하겠지. 어느새 이렇게 자신의 사람을 만들어 놓다니…….'

아빠는 로날드가 보통내기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생각과 달리 지금 로날드는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다.

'지금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거지? 들어도 모르겠어. 일단 나쁘지 않은 것 같긴 한데, 아버지 표정은 더 나빠지고 있고…….'

첫 만남이라 이왕이면 좋게 만나고 싶었지만, 처음부터 무언가 표정이 안 좋았다. 이미 지완과 혜진에게 어느 정도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막상 실제 부딪히니 만났을 때의 계획이 전부 다 틀어졌다.

그래도 생각나는 계획이자 준비는 있었다.

"저기…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로날드는 어눌한 한국 발음으로 말한 다음, 미국에서 가져온 선물을 아버지께 건넸다.

"응? 선물? 고작 선물 따위로……."

"멕칼렌 1947입니다."

"……!!!"

로날드의 말에 아버지의 입이 바로 닫혔다. 하지만 술에 대해 잘 모르는 은진은 아빠가 왜 갑자기 말을 하다가 멈추었는지 몰랐다.

"왜 더 말씀하시지 않는데요?"

그러자 지완이 은진에게 귓속말로 말했다.

"저거 한 병에 최소 850만원 하는 거야. 가격은 둘째치고 구하는 것이 어려워."

"아……."

평소에 술을 즐겨 드시는 아버지를 알고 있으니 은진은 왜 아빠가 말을 하다가 멈추었는지 알았다. 그래서 물었다.

"아빠, 내가 중요해. 아니면 술이 중요해?"

남자라면 여자에게 절대로 듣고 싶지 않은 질문의 유형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연인 사이에나 곤란한 질문.

아빠와 딸 사이에선 큰 상관이 없는 질문이다.

"거참 딸자식 낳아 키웠더니 이런 것 하나 준비도 하지 않고… 너보다 이 친구가 훨씬 낫다."

"잠깐, 아빠. 지금 나 술 한병에 팔아치우는 거야? 아무리 귀한 술이라도 그렇지 그게 말이 돼?"

"팔아치우긴 뭘 팔아치워? 네가 말했잖니. 시집간다고 해서 인연이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며? 가는 것도 아니니 팔아치우는 것도 아니네."

은진의 아빠는 그 말을 하고, 곧 있을 친구들과의 만남에서 할 자랑의 순간이 떠올랐다.

'이게 무슨 술인지 알아? 멕칼렌 1947이야. 인터넷에서 제일 비싼 양주를 치면 9위로 나오는 그 술이라고. 너희는 이거 갖다 줄 수 있는 양키 사위 있어?'

확실히 양주 선물의 위력은 굉장했다.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건만 벌써 로날드에게 사위라는 말이 붙었다.

생각보다 수월하게 일이 진행되었지만, 은진은 괜히 기분이 나빴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술 한병에 결혼을 허락해?"

"누가 허락했다고 그래? 일단 지켜보다는 거지."

"지난 번에 언니랑 형부 때도 그 말을 하더니 결국 허락했잖아."

"그거야 이미 뱃속에 예은이가 있었으니까 그렇고."

그의 말에 은진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아~ 그럼 나랑 로날드랑 짝짜꿍해서 아기 생기면 허락해 주시겠다는 거네요."

그러자 아빠는 크게 당황했다.

"누, 누가 허락한다는 거야? 그리고 어디서 젊은 처자가 벌써부터 그런 말을 찍찍 내뱉어."

그러면서도 아빠는 로날드에게 받은 술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결국 로날드의 예비 장인어른과의 첫 만남은 생각보다 많은 진도를 나가며 마무리될 수 있었다.

# 각오

동팔은 다시 미국으로 가기 전에 집에 있던 물건 하나를 가방에 넣었다. 그것은 낡고 낡은 투수 글러브. 그리고 때가 묻고 흠집이 많이 난 야구공 다섯 개였다.

그걸 본 어머니가 물었다.

"그건 왜 가지고 가니? 짐만 늘어나는데. 안 버릴 테니까 두고 가."

"아니에요. 이번에 각오를 다지려면 필요할 것 같아서요."

어머니가 동팔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하긴 그걸로 꽤 오래 버텼지."

그 글러브는 동팔이 방출된 이후, 다시 재기하기 전까지 쓰던 글러브였다. 메이저리그에 가서 큰 성공을 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안일해진다면 기껏 쌓아놓은 것이 무너질 수 있었다.

엄마가 생각한 것은 거기까지였다.

"그래, 마음만으로 각오를 다기는 것보다 눈에 보이는 것이 있는게 더 낫지. 암~ 그렇고말고."

하지만 그건 절반짜리였다. 각오를 날마다 새롭게 새우기 위해 가져가는 것은 맞다. 그러나 애초에 동팔은 안일하게 훈련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오랜 글러브를 가져가는 또 다른 이유는 이것이었다.

'떠올려야 해. 내가 여기까지 왔던 모든 순간을……!!'

모든 것을 잃었다 생각하는 때에도 남아 있는 것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메이저리그에 와서 양키즈의 당당한 1선발이 되기까지, 자신이 해왔던 노력과 훈련이 있었다.

그러면서 동팔이 하는 생각은 이것이었다.

"네, 포기할 수 없어요. 절대로……."

지금 여기까지 와서 모든 것을 잃을 수는 없었다. 단순히 돈을 떠나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특히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은 아들을 두고 떠나는 것은 더욱더.

그러니 항상 마음을 새롭게 하고, 단 하루도 허투로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언제라도 약해지기 마련.

그것을 막기 위해 과거의 노력이 스며든 낡은 글러브를 가져가 보고 또 보며 마음을 다지려는 것이다.

"그럼…가볼게요."

"응. 이번에도 잘 할 거야. 힘내고, 화이팅."

어머니와 아버지의 배웅을 받으며 집을 나서려 한다. 하지만 나서기 전, 동팔은 자신도 모르게 뒤돌아 봤다.

'과연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이 될 수 있었다. 자신이 자란 이 집을 보는 것이. 그리고 부모님의 얼굴을 직접 보는 것이.

남은 시간은 1년도 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동팔은 평상시에 잘 하지 않는 말과 행동을 했다.

동팔은 집을 떠나기 전, 엄마와 아빠를 안더니 이렇게 말했다.

"사랑해요."

아들의 갑작스러운 말에 부모님은 당황스러웠다. 아빠 닮아 과묵한지라 이런 말을 한 적이 거의 없었다. 어색하지만, 아들이 사랑한다는 말이 싫을 수는 없었다.

"거… 아주 떠날 것처럼 말하긴……."

"그래, 엄마도 동팔이 사랑해. 알지……."

두 사람의 말에 동팔은 아무 말 없이 부모님을 다시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인사한 다음, 공항으로 갔다.

*     *     *

한편, 동욱도 미국으로 떠날 준비를 마쳤다.

공항으로 가기 전, 어머니의 병세로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가서 미리 준비해야 했다.

이미 가기 전, 동욱은 병원에서 엄마와 마지막으로 인사를 했다.

어쩌면 이제 정말 두 사람이 살아서 얼굴을 보는 것은 마지막이 될 수도 있었다.

설령 동욱이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하여 해방된다고 한들, 어머니가 병을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실 확률이 너무 높았다.

그 사실을 동욱과 어머니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가능한 밝은 표정으로 만났다.

"이제 가는구나."

"네, 엄마."

"가서 밥 잘먹고, 힘들면 전화하고 그래. 내 걱정하지 말고. 알았지?"

대화는 작년과 같이 평상시처럼 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누나와 여동생에게 눈물이 나오게 만들었다.

그러자 엄마는 두 딸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뭘 그렇게 울고 그래. 나 아직 괜찮아. 오빠 미국 가는데, 오는 길에 선물 사달라고 해야지."

오히려 엄마는 두 딸에게 농담을 하고 있었다. 그러자 동욱도 밝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요. 뭐든지 말해. 부담갖지 말고."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두 사람의 만남을 두고, 서로를 위해 밝게 웃는 모습이 오히려 누나와 여동생의 마음을 쓰라리게 만들었다.

그래서 누나는 엄마와 동욱의 말에 눈물을 닦고 말했다.

"응. 아냐. 그냥 몸 건강하게 와. 부상 조심하고. 혹시 필요한 것 있으면 나중에 말할게."

하지만 마음을 다잡는 언니와 달리 막내인 여동생은 여전히 눈물을 닦기만 할 뿐이었다. 동욱은 여동생의 머리를 쓰다듬고, 가볍게 안아 주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작별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왔다.

주차장에 있는 자신의 차로 가면서 사람들을 만났다.

"어? 한동욱 선수?"

"저기… 사인……."

그를 알아본 사람들은 그에게 다가가 사인을 받으려 했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동욱의 표정에 감히 다가가지 못했다.

그러자 동욱은 다시 표정을 관리하며 말했다.

"사인이요? 괜찮습니다. 여기다 하면 되나요?"

"네……."

사인을 해주겠다고하니 받았지만, 그들은 동욱이 방금 전에 지은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무엇보다 암환자가 입원한 병동에서 나왔으니 걱정이 안 될 수가 있을까.

하지만 걱정이 되면서도 차마 어떤 일인지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일단락 되자 그들이 말했다.

"빨리 나을 수 있기를 바랄게요."

"항상 응원하겠습니다."

그들의 말에 한동욱은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서둘러 그 자리를 나왔다. 그리고 겨우 주차장에 도착하여 차에 들어갔다.

동욱이 차에 들어가 시동을 켜지도 못하고 핸들을 잡자마자, 참아왔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흐윽. 흐윽…으아아아아!!!!"

여기까지 오면서 울 수가 없었다. 이미 작별 인사를 할 때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러면 엄마가 더 힘들어 할 것 같아서 그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여기까지 오는 사이에 울면, 사람들을 통해 엄마의 귀에 들어 갈까봐 울 수 없었다.

겨우 겨우 참고, 사람들의 사인 요청에 억지로 웃으며 대응해야 했다. 그리고 지금 겨우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은 곳에 도착하자 더 이상 참을 필요가 없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