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
그러나 모든 싸움에서 지완이 이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지완은 혜진과 싸우지 않고, 그냥 지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렇다고 잃는 것만 있는 건 아니었다.
'조만간 장인어른과 다시 술자리를…….'
아버지한테 지금 잡혀 살고 있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러면 며느리 욕을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으니까.
하지만 이전부터 혜진을 키워온 장인어른이라면 다르다. 물론 처음부터 지완이 토로하진 않았다. 그러면 딸을 욕하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그러나 의외로 장인어른은 마음과 생각이 열린 분이셨다.
동팔도 모르는. 다른 사람은 혜진의 외모와 성격에 넘어간, 그녀만의 고집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중에 하나가 담백한 식성. 그리고 돈을 사용함에 있어서 철저히 아끼는 것이다. 덕분에 고액의 연봉을 받는 지완은 월마다 50만원에 해당하는 용돈을 받고 사는 중이었다.
처음에는 함께 사는 것에 마냥 좋았지만, 결국 그 부분에 있어서 절대 양보하지 않는 혜진으로 인해 많이 싸웠고, 그러다 장인어른한테 들켰다.
하지만 장인어른은 지완을 야단치지 않았다.
"다 알아. 남자라면 종종 지르고 싶을 때가 있는데, 그걸 완전히 막아버렸으니 답답하겠지. 그건 자기 엄마 닮았어."
절대 바꿀 수 없으니 포기하고 살라는 말도 덧붙이셨고, 그 이후로 지완은 종종 장인어른과 통화를 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토로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러면서 알게 된 사실 하나.
"참고로 은진이도 그래."
그러니 지완이 로날드를 보며 안쓰러운 표정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머리가 좋고 분석력이 좋은 혜진은 지완의 표정을 보자 바로 상황을 알아차린 것이다.
"이거 다 우리 잘 되라고 하는 거거든. 나중에 은퇴하면 뭐 먹고 살려고? 지금은 예은이 한 명이지만, 또 아기가 생기면 어떻게 하게?"
"아, 알았어. 미안해. 그럼. 좋은 거지. 암, 좋고말고. 은퇴하더라도 아내가 될 처제가 아낀 돈으로 새로운 무언가를 할 수 있을 테니까. 암~."
하지만 지완의 말에 혜진은 그의 본심이 아니라는 것을 단번에 알았다. 하지만 계속 따지지 않고 지금은 일단 넘어가 주기로 했다.
"그건 그렇고 로날드를 노리는 구단이 많았다고 민희에게 들었는데. 왜 뉴욕에 남을 생각을 했을까? 역시 은진이 때문?"
"뭐…그렇겠지. 적어도 나랑 너의 지원을 받으려면 같은 팀에 있는 것이 더 나으니까."
"돈 보다 은진이라는 건가? 그건 그나마 다행이긴 하지만……."
"이번에 성적이 좋은 것도 은진이 덕분이잖아. 의외로 남자는 사랑으로 힘을 얻거든. 그러니 아직은 봐주는 것이 낫지 않을까? 동팔이를 위해서라도."
"그렇지……."
사기계약을 한 지완과 달리, 동팔은 여전히 묶여 있었다. 이제 남은 기회는 단 한번. 그렇다면 실력이 뛰어난 선수가 옆에서 도와주도록 해야 했다.
그래도 혜진은 은진이 로날드와 결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언니로서 마음이 복잡했다.
자신이 시집을 가게 된 것은 신경쓰지 않았지만, 동생이 시집가게 될지도 모르니 절로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당연히 혜진은 로날드에 대한 분석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선수로서의 분석은 물론 사람으로서의 분석도.
"아직 트집 잡을 것이 특별히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빠랑 만났을 때 어떻게 하려나……?"
"그건 장인어른께서 알아서 하시겠지. 우리처럼 그런 것도 아니니 좀 힘들지도 모르겠지만."
솔직히 말해 속도위반이 아니었으면 결혼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분위기였다. 지금이야 혜진에 대해 툭 터놓고 말하는 사이가 되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장인어른이 자포자기를 한 상태에서 가능한 일.
지금은 선을 넘지 않아 아기도 생기지 않았다. 아직 저지할 수 있는 기회가 남아 있으니 지완과 같은 상황이 아니다.
상황이 다르니 장인어른의 행동도 다를 것이 뻔한 일. 그리고 아빠를 잘 아는 혜진이 지완의 말을 수정해주었다.
"아니, 조금이 아니라 많이 힘들걸."
* * *
동팔은 매일 사람들을 만났다.
어쩌면 이제 지금 보고 더 이상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단 한 사람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자신의 갑작스러운 만남의 부탁에도 사람들은 기존에 잡은 약속을 취소하면서까지 만나주었다.
그리고 지금은 한국에서 마지막 만남 약속을 잡은, 레슨장에서 사장님과 만나기로 한 날.
"안녕하세요. 저 왔습니다."
동팔이 오자 사장님은 물론 교육을 받거나 연습하고 있는 사람들이 전부 동팔을 반겼다.
"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사장님께서 종종 말씀하셨는데 정말이었네요."
"경기는 항상 본방으로 챙겨보고 있습니다."
손님과 회원들과 만나고 나서, 동팔은 따로 사장님과 방에서 만났다.
"귀국했다는 건 뉴스로 듣긴 했지만, 직접 보니까 확 느껴지네. 이번 디비전은 좀 운이 없었어. 이왕이면 월드시리즈에 갔으면 싶었는데."
"그러게요. 이번에도 시애틀에 막힐 줄은 몰랐습니다."
"그렇지. 이번엔 전과 달리 첫 경기를 잡았는데도… 시애틀이 너무 약았어. 그러니 동욱이를 통해서 천벌이 내려졌지. 개인적으로 안타까운 사고이긴 하지만, 헤럴드의 선수 생활은 끝났다고 뉴스에 나오더라."
사장님은 그때의 사고를 시애틀에 대한 천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동팔은 안다.
'사실 동욱이가 의도적으로 팔목을 부러트린 겁니다만…….'
천벌이 아닌 의도적인 폭행이었다. 다만 자신과 다른 계약자들이 살아남기 위한 저항의 의미가 전부였을 뿐이다.
'나중에 들어보니 이미 경기를 뒤집을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고, 어차피 이대로 끝날 바엔 부작용이 있는 시간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 전력으로 능력을 개방했다고 했었지?'
그래서 다음 시즌에 나올 수 없도록 만들려고 했다. 다만 노렸던 것이 너무 정확하게 맞은 나머지 지금 헤럴드의 팔 상태는 동욱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했다.
"네, 오른쪽 팔목에 있는 인대와 힘줄이 끊어졌고 신경도 끊어졌다고 해요. 수술에 성공하여 재활에 성공해도 일상생활이 불편하다고 할 정도면…더 이상 선수로서는 뛰지 못할 겁니다. 왼손을 쓰지 않는 이상……."
그 말을 할때, 동팔은 무언가 떠오를 것 같았다. 그리고 마침 동팔이 떠올린 것을 사장이 말했다.
"아, 맞다. 너 왼손으로도 던질 수 있잖아. 오른손 만큼은 아니지만. 지금은 어때?"
"그거요? 왼손으로 간혹 던지긴 합니다만… 오른쪽으로 주로 훈련을 하다 보니……."
"하긴 메이저리그에서 압도적인 구위를 보여주려면 한쪽에 집중하는 것이 나을 거야. 하지만 의외의 모습을 보여주면 상대는 너의 좌완 투구에 대한 정보가 없으니 많이 혼란스러울 거다."
이미 동팔의 구위는 압도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치는 것이 불가능한 공을 던지는 것도 아니다.
"메이저리그의 모든 구단이 너의 약점을 분석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건 당연한 일이야. 아직까지 공략을 당하지 않았지만, 다음 시즌에는 어떻게 될지 몰라. 메이저리그의 타자들은 너도 알다시피 천재적인 재능에 끊임없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입성할 수 없는 곳이잖아. 지금까지 압도적인 기록을 남겼지만, 다음에는 모른다."
사장님의 말에 동팔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죠. 뱅가너가 던지는 170키로의 강속구라도 미리 읽혀버리면 얻어맞는 곳이 메이저리그니까……."
"그렇지. 거기에 너와 비견되는 구위를 던지는 거쇼나 오타니도 얻어맞는 곳이야. 솔직히 말하면 그동안 운이 좋았지.
그렇게 집중적인 견제를 당하면서도 2회 연속 사이영상을 받은 건 실력은 물론 운도 따라준 거야. 하지만 이젠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준비하는 것도 좋을 거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아깝잖아. 다른 사람들도 알게 모르게 왼손으로 종종 던지며 실력을 쌓아 놓았는데 실전에선 써 먹은 적이 없었으니까.
"
그리고 사장님은 은근슬쩍 물어봤다.
"그래서 지금 왼쪽으로 던지면 어느 정도까지 나와?"
"그건…한 155키로는 나와요. 제구가 어느 정도 된다는 조건이라면."
동팔의 말에 사장님은 화들짝 놀라며 답했다.
"뭐? 그 정도까지? 잘하면 지금 당장 써먹을 수 있잖아? 그동안 왜 안 쓴 거야?"
"하지만 메이저리그에서 통할지 자신할 수 없어서요. 한국에 있었을 땐, 굳이 쓸 필요가 없었었고……."
"하긴 한국에선 오른손만으로 충분한데 굳이 왼손으로 던질 필요가 없었지. 메이저리그도 지금까지 그랬고……."
그 말을 하고 사장님은 동팔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그럼 이제 슬슬 왼손 훈련을 더 늘려. 오른쪽도 성장이 가능하겠지만, 크진 않을 거야. 하지만 왼쪽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오른쪽 만큼은 아니지만, 우완과 좌완의 느낌은 전혀 다르니까. 공이 날아오는 궤도와 방향이 반대라 타자들이 적응하지 못하는 것도 있고, 네 공에 익숙해졌다 느껴도 다른 손으로 던지면 다시 적응해야 하니까."
사장님의 조언에 동팔은 다짐하며 답했다.
"네, 이왕이면 지금 당장 해야겠습니다."
그러자 사장님이 말했다.
"안 돼. 여기서 하면 소문날 것이 뻔해. 정보는 가능한 차단해야 유용한 거지."
그리고 사장님은 이어서 말했다.
"어차피 너랑 나랑 광고 계약한 것도 이제 1년 남았으니까, 이번에 그걸로 잘 되면 다시 5년 연장하자. 오케이?"
사장님의 말에 동팔은 사장님과 악수를 하며 말했다.
"네, 그러겠습니다. 당연히."
* * *
동팔이 새로운 방법을 발견하고 있던 때, 로날드는 인생에 있어 아주 중요한 만남을 갖고 있었다.
"그래, 자네 이름이 로날드 버드라고 했나?"
은진 아버지의 물음에 로날드는 쭈삣거리며 말했다.
"네, 마씁니다."
"발음이 그게 뭔가? 제대로 못해?"
아빠가 따지자 은진이 역으로 따졌다.
"아빠, 한국말 배운지 반년도 안 됐잖아. 당연히 받침 발음하기 어려운거 알면서 그러시는 거예요? 그리고 아빠 말을 듣고 바로 알아들은 것도 생각해야지."
은진의 말은 길어 로날드가 바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을 변호해 주고 있다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한국에서 살려면 한국말을 해야지."
"누가 한국에서 산데? 미국 사람이 미국에 직장이 있으면 미국에서 살아야지. 그리고 한국에서도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면 가문의 영광이 되는데, 메이저리그에서 한국 리그로 오라고? 그럼 연봉이 10분의 1로 줄어들어. 아빠가 날 생각하면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딸에게 연달아 공격을 당했다. 그러자 아빠가 받은 정신적인 충격은 꽤 컸다.
"은진아. 너 마저……."
부들부들 떨리는 아빠의 말과 눈동자에 은진도 마음이 약해졌는지 기세가 누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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