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
"그럴 필요 없는데 괜히 나가네. 안 그래도 되는데."
"그래도 전과 다르게 성숙해진 거죠. 전에는 무조건 붙어 있겠다고 우겼을 텐데, 지금은 다른 사람을 더 배려하게 되니까요."
"집에서야 응석을 부릴 수 있으니 그런 거지, 밖에선 안 그러더라. 하긴 내 상태가 좋지 않으니 알아서 자중하는 거겠지만……."
오히려 전처럼 응석을 부리지 않는 딸을 보자, 확실히 자신의 병세가 심각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엄마는 곧 다시 밝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네가 돈을 잘 벌어서 이렇게 좋은 병실에 있는 거지. 이것도 1인실 중에서 제일 좋은 곳이라면서? 정말 괜찮겠어?"
"뭘 걱정하시고 그러세요. 이번에 저 LA 다저스에 가면서 연봉 팍 뛰었어요. 전에는 3년에 5천만 달러였는데, 이젠 1년에 1억 달러에요. 그래도 세금으로 절반 이상이 빠지지만."
"절반 빠져도 1년에 한국 돈으로 400억이 보통 돈은 아니잖니. 하긴 그 말을 들으니 평생 여기에서 살아도 되겠다."
"평생 병원에 계시면 어떻게 해요. 돈이 더 들어도 괜찮으니까 호텔에 장기로 묵으셔도 돼요. 거기 어디라 그랬지? 1박에 3천만원 한다는 방도 괜찮아요. 1년 내내 계셔도 돈이 남는 걸요."
"됐어, 요 녀석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사치를 부리겠니."
불과 4년 전만해도 부담스러웠을 특급 병실이다. 하지만 지금은 넉넉하게 감당할 수 있는 여력이 넘쳐흘렀다.
동욱과 엄마가 대화를 하던 중, 병실의 문이 열리며 의사와 간호사가 들어왔다.
"진료하겠습니다."
좋은 병실에 있다는 것은 방 자체가 좋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여기에는 공간을 빌리는 대가와 일반 병실에 해주지 않는 질 높은 서비스를 받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그 서비스에 더 좋고 맛있는 식사는 물론, 훨씬 집중해서 살펴보는 진료도 포함된다.
의사와 간호사가 오자 동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의사는 동욱과 악수를 하며 말했다.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메이저리그에서 맹활약하고 계신 소식, 뉴스를 통해 항상 듣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MVP가 되셨다면서요?"
"네, 운이 좋게 계속 받았습니다."
"자랑하셔도 되는데 겸손하시기까지."
너무 인기인이라서 그럴까. 이대로 가다간 사인까지 받을 것 같은 의사의 행동에 간호사가 지금 그가 해야 할 일을 말했다.
"링겔 확인할게요. 어디 불편하신 곳 있나요?"
그래도 사람이 있는 곳이니 대놓고 말은 하지 못하고, 넌지시 말해 스스로 알아차리도록 했다.
간호사의 말에 의사는 헛기침을 하더니 차트를 살펴봤다. 그리고 환자의 병명과 진행 상황을 보자 웃고 있던 표정이 굳은 표정으로 바뀌었다.
"크흠… 혹시…들으셨나요?"
"네, 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제가 괜히 들떠가지고……."
병실을 오가며 계속 환자의 상태를 보는 것이 그가 하는 일. 그러니 간혹 환자들의 이름과 상황을 잊기도 했다.
사실상 시한부 인생이 된 환자를 앞에 두고, 사인을 받을 것처럼 행동했으니 보통 민망한 일이 아니었다.
'이런 상태의 환자는 아주 예민해지는데, 화를 내는 건 아니겠지?'
의사의 걱정과 달리 엄마는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동욱에게 관심을 보이며 인정을 하자 더 좋아하셨다.
"그럼요, 우리 동욱이가 메이저리그에서 정말 잘하고 있는 걸요. 그렇죠, 의사 선생님."
"네네. 아주 잘하고 계시죠. MVP는 아무나 받나요. 최고로 잘한 사람에게 주는 상인데요."
그리고 전과 달리 변화된 모습에 의사가 이어서 말했다.
"아드님을 정말 사랑하시나 봐요. 여지껏 본 표정 중에서 제일 밝고 좋습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간단한 진료가 진행되었다. 검사를 받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의사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사실을 말했다.
"음… 별로 달라진 건 없네요. 체온 조절에 유념하시고, 날씨가 점점 추워지니 감기 조심하시면 될 겁니다."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은 차도가 없다는 것. 상황이 악화되는 것보다 나을지 몰라도, 결국 남은 시간이 1년도 안 된다는 것 또한 바뀌지 않았다.
애초에 단순한 진료에서 많은 것을 바랄 수 없었으니 이 정도에 만족해야 했다. 이후에 어떤 치료가 있을 것인지 알려주고 의사는 동욱의 사인을 받고, 간호사와 함께 나왔다.
의사가 가자 엄마가 말했다.
"내가 전에 동욱이가 내 아들이라고 말을 했거든. 그때는 마지못해 믿는 척 하더니, 널 보니까 눈빛이 달라졌더구나."
"그랬어요?"
"그랬고말고. 몇 년 전에 이 말을 했으면 누구나 믿었을 텐데, 우리 아들이 너무 유명해지니까 오히려 못 믿더라고."
엄마는 그 말씀을 하시면서 다시 옆으로 온 동욱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이어서 말했다.
"동욱아……."
"네, 엄마."
"이젠 많은 사람이 널 자랑스러워하더구나. 장하다……."
메이저리그에 입성하기 전만 해도 고향인 광주에서 자랑하던 선수였다. 하지만 이제는 한국인이라면 자랑스러워 할 선수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엄마……."
"그런데 그거 알고 있니?"
"네? 어떤 걸요?"
"난 그 이전부터 우리 동욱이가 너무나 자랑스러웠다는 걸."
그 말씀을 하면서 엄마는 동욱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
"전에 지아에서 선발이 되지 못해 답답하고 힘들 텐데도, 말하지 않고 꿋꿋하게 2군에서 버텼지? 그래도 훈련을 쉬지 않고 성실하게 해서 결국 잘 되었으니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단다."
"엄마."
"그렇다고 그때부터 자랑스러워 한 건 아니란다. 그 전에, 졸업 후에 프로 입단이 어려운 것을 알면서도 그 길을 선택했었지. 차라리 다른 일을 알아보는 것이 더 쉬운 길이었을 텐데도 가족을 생각해서 힘든 길을 가려 한 것 다 알고 있었단다."
"……."
분명히 야구는 하고 싶어서 선택한 일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좋아하는 일이라도 보수가 적다면 힘든 것도 사실이다.
좋아하기에 힘든 것을 버티는 것일 뿐, 힘든 것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
그리고 5년의 시간동안 버티다가 더 이상 버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자 스크레이치와 계약을 한 것이다.
하지만 동욱은 그걸 말할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엄마의 말씀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때가 널 자랑스러워하기 시작한 건 아니었어. 그 전에, 네 아빠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을 때. 어린 나이에도 상주로서 자리를 지켰던 걸 기억하고 있단다. 그때 네 누나랑 동생은 울기만 했었지. 사실 그 나이 때를 생각하면 오히려 그게 당연한 반응이지만……."
아버지가 사고로 돌아가시고 난 이후 가세는 더욱 급격하게 기울어졌다. 동욱이 야구를 하는 것이 버겁고 힘든 상황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동욱이 좋아하는 야구를 계속 할 수 있게 뒷바라지 했다.
그때문에 두 딸이 불평을 했지만, 그조차도 자신이 감수하셨다.
"그때 참 대견하다고 생각했단다. 그리고 안타깝기도 했지. 차라리 다른 아이처럼 울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단다. 그렇다고 그때가 널 처음으로 자랑스러워 한 건 아니었단다. 그렇지… 네가 태어났을 때부터, 난 네가 자랑스러웠었지."
그 말씀을 하시며 엄마는 창밖을 본다.
"너도 알고 있지?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이 세상에 무사히 태어난 것만으로도, 그리고 평범하게나마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벅찬지 모른다.
뱃속에서 죽는 아기가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나오는 것이 너무 힘들어 나오다가 힘이 빠져 위험한 경우도 얼마나 많은지 몰라. 하지만 넌 세상에 나오면서 우렁찬 울음소리를 냈었지. 그 순간을 아직도 기억한단다…….
"
아기가 나올 때 산모가 힘을 주며 내보내는 것도 있지만, 아기도 나오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그래서 갓난아기를 보면 얼굴과 온몸이 붉게 달아오른 것처럼 보인다.
엄마는 다시 동욱을 보며 말한다.
"동욱아… 넌 이미 나의 자랑스러운 아들이야… 그러니 무리하진 말거라… 알겠지?"
아무리 메이저리그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치고 있다지만, 여전히 엄마는 동욱이 언제 다칠까봐 걱정이 된다.
특히나 엄마인 자신을 생각하는 마음이 크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더욱 걱정이 되었다.
엄마의 말에 동욱은 잡은 손 위에, 자신의 다른 손을 올려놓으며 답했다.
"응. 걱정하지 마세요. 다치지 않을 거니까."
* * *
한편, 동욱이 엄마와 다시 만나고 있을 때.
동팔은 동팔대로 사람들과 만나고 있었다. 당연히 제일 먼저 만나는 사람은 가족들이었다.
"저 왔어요."
"그래? 왔으면 방에 가서 쉬어라."
"네……."
하지만 생각보다 반겨주지 않는 가족들. 처음에는 반겨주었지만, 미국과 한국을 오갈 때마다 오랜 비행에 지쳐있는 동팔을 보자 생각을 바꿨다.
다만 방에 들어가기 전, 엄마는 동팔에게 물었다.
"아가는?"
"민희요? 승현이 태어난지 한달 되었잖아요. 혹시 모르니까 비행기에 오래 태우면 위험할 수 있어서 안 오기로 했어요."
"그래… 아쉽지만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과연 동팔을 기다린 것인지. 아니면 손주를 기다린 것인지 알 수 없는 반응이었다. 적어도 순주가 오길 바라는 마음이 크다는 건 확신할 수 있는 반응이었다.
그래도 동팔은 그로인해 상처를 받지 않는다.
동팔은 방에 들어가면서 생각했다.
'한잠 자고 일어난 다음 사진 보여드리면 되겠지.'
귀국하기 전에, 아들의 사진을 많이 찍었다. 처음에는 빨갛고 원숭이 같이 생긴 작은 덩어리 같았다.
거기에 쭈글쭈글한 피부에 과연 이 아기가 자신의 아들이 맞나 싶었다.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여느 아기처럼 뽀송뽀송한 피부로 바뀌었고, 눈을 뜰 때마다 보는 맑은 눈망울은 동팔로 하여금 절로 아빠미소가 지어지게 만들었다.
지금도 생각만 했지만, 벌써부터 미소가 지어졌다.
'일어나면 보여드려야지. 지금은 일단 자자.'
피로 회복 능력을 사용하면 되지만, 경기가 있는 것도 아닌데 굳이 고통을 감내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짧게나마 한잠 자는 것도 생각보다 좋은 효과를 가지고 있으니 마다할 이유가 있을까.
그래서 한 시간 가량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잔 다음, 일어나 엄마에게 갔다.
"승현이 사진 보여드릴게요."
동팔은 이렇게 생각했다. 당연히 보여 달라고 하시겠지. 하지만 엄마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이미 다 봤다. 아들하고 달리 며느리가 이미 다 보내줬다."
엄마의 반응에 동팔은 당황스러웠다.
"응? 벌써? 이러면 안 되는데……."
그렇지 않아도 아들 자랑하기 위해 생각해 놓고 준비해 놓은 말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었다. 이대로 물러날 수 없으니 동팔은 엄마 옆에 앉더니 핸드폰에 저장한 사진을 보여주었다.
"민희가 보내준 거랑 이거랑 달라. 한 번 봐봐."
"다르긴 뭐가 달라. 똑같구만."
"아니, 다르다니까. 엄마가 받은 사진 보여줘."
"그래,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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