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
그걸 아는 은진은 로날드의 머리를 쓰다듬고 싶어 참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처음 만났으니 실례할 수도 없는 노릇.
그래서 허락을 구하기 위해 물어본 것이다.
로날드도 다른 남자와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그걸 좋아할 어린 시절은 이전에 지나갔다.
그런데 초면에 나이가 조금 어린 여자가 머리를 쓰다듬겠다고? 하지만 여기는 미국이다.
한국과 달리 나이에 관대하다. 한두 살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넘어간다.
거기에 은진의 미모는 단단히 닫힌 마음이라도 단번에 열리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그래서 은진이 부탁을 하기 전에 이미 로날드의 답은 나와 있었다.
"그럼요."
이제는 은진이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을 수 있게 머리를 내미는 것. 그러자 은진이 말렸다.
"아뇨, 그러실 필요 없어요. 넥타이 묻겠어요."
로날드가 머리를 내밀자, 자연스럽게 매고 있던 넥타이의 끝이 스테이크 옆에 있는 샐러드 소스에 닿을 뻔했다. 그 전에 은진이 잡아서 더러워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로날드가 다시 자세를 원래대로 하자 은진이 말했다.
"제가 갈게요. 괜찮죠?"
그리곤 허락도 받지 않고 자리에 일어나더니 로날드의 옆에 가서 앉았다. 그러자 방금 전만 해도 맞은편에 앉아서 벌어진 거리가 단번에 좁혀졌다.
바로 앞에서 은진의 얼굴을 보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옆에 와서 앉는 것은 그보다 느낌이 남달랐다.
그리고 은진이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기 위해 팔을 들어 올리자 로날드는 그녀가 쉽게 쓰다듬을 수 있도록 상체와 머리를 숙여 주었다.
"음…생각보다 머리가 부드럽네요. 전에 동팔이 오빠 머리 쓰다듬었을 때랑 달라요."
"네? 언제요?"
"한…9년 전? 그때 동팔 오빠는 고등학생이었고, 머리를 짧게 깎았을 때였거든요."
지금은 두발자유화가 되어서 머리가 찰랑찰랑 거리는 중고등학생이 많다. 그리고 동팔이 고교 선수로 있었을 때도 마찬가지.
하지만 당시의 동팔은 선수였고, 머리를 감거나 헤어스타일에 관심이 없었기에 짧게 깎고 다녔다.
"다 지난 일이긴 하지만, 언니랑 동팔 오빠랑 사귀었을 때였어요. 자고 있던 오빠 머리 쓰다듬다가 언니한테 엄청 혼났거든요."
"아, 그랬었군요……."
은진의 말을 들으니 지완만 아니라 동팔에게도 잘 대해야겠다고 생각한 로날드.
은진은 생각보다 좋은 느낌에 로날드의 머리를 계속 쓰다듬다가, 너무 쓰다듬었다 생각했는지 손을 뗐다.
"미안해요. 느낌이 너무 좋아서 계속 했네요."
"아뇨, 괜찮습니다."
"그래도 계속 할 수는 없으니 답례로……."
그 말을 하며 은진은 로날드의 앞에 있던 나이프와 포크를 들더니, 스테이크 한 조각을 썰었다. 그리고 포크로 찍어 로날드의 입에 가져갔다.
설마 연인들 사이에서도 닭살스러워 잘 하지 않을 이걸 받을 줄은 몰랐다.
의외의 선물에 로날드는 좋은 마음을 숨기지 않고 바로 입을 앙~ 하고 벌려 먹었다.
먹는 순간, 은진과 더 가까워진 순간의 떨림은 잊을 수 없었다.
한편, 나가는 척 하고 화장실에 들렸다 나온 지완은 다시 돌아왔다. 하지만 로날드와 은진이 있는 곳으로 바로 가지 않고 그들의 시야에 닿지 않는 곳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어색하던 두 사람의 모습이었지만, 어느새 은진이 로날드의 옆에 앉더니,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것도 모자라 이젠 부부 사이에서도 잘 하지 않는 요리를 먹여주는 것까지 했다.
겉으로 보면 사랑이 넘치는 연인의 모습이지만, 두 사람이 만난 시간은 한 시간도 되지 않았다.
나쁘게 흐르지 않다는 것에 다행이지만, 속도가 너무 빠르자 지완은 고민했다.
'이거… 가볍게 소개한 것이 중매가 된 것 아냐? 나중에 장인어른 얼굴을 어떻게 보지?'
이 만남이 있기 전, 장인어른은 지완에게 신신당부했다. 은진이게 소개받을 사람의 안 좋은 점을 가능한 많이 말하라고.
하지만 좋은 만남으로 마무리하기 위해 일부러 그러지 않았다. 그리고 로날드의 단점을 말하기엔 자신과 겹치는 것이 많았으니 말하기도 좀 그랬다.
무엇보다 처음 만나 오늘로 끝날 확률이 높다. 이미 국제결혼은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은진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모습을 보면 과연 얼마 전에 국제결혼이나 연애가 싫다던 그 사람이 맞나 싶었다.
상황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자 일단 두 사람의 마음이 어떤지 확인해 봐야 했다.
아무리 봐도 로날드는 이미 표정에 모든 것이 드러나 있으니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옆에서 스테이크를 썰어서 먹이거나 먹여지고 있는 은진의 마음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나중에 직접 물어보는, 아주 단순한 방법으로.
그에 대한 결과는 이번 시즌이 끝나고 로날드가 지완과 함께 한국으로 가는 것으로 더욱 구체화 되었다.
덤으로 은진의 아버지의 낙담과 허탈함도 역시 시간이 갈수록 구체화 되었다. 로날드가 한국어를 잘하면 잘할수록 더욱더.
# 스타들의 전쟁
보통 야구에서 시즌의 전반기와 후반기를 결정하는 것은 경기 숫자가 절반으로 줄었을 때가 아니다.
나누는 기준은 하나의 이벤트로 결정되었다. 바로 올스타전이다.
아메리칸 리그와 내셔널 리그의 선수들이 각자 모여 하나의 팀을 이룬다. 선정되는 선수의 기준은 하나다.
팬들의 인기투표를 통해서 올스타전에 참가할 수 있다.
실력이 없으면 인기 선수가 될 수 없는 법. 그리고 실력이 좋아도 평소 언행이나 품행이 불량하거나 눈살을 찌푸리게 해도 마찬가지.
당연히 올스타전에 뽑히는 선수는 실력을 기본으로 하고, 평소에 품행이 좋은 선수가 뽑힐 수 있다.
작년에 동팔과 동욱은 동양인이라는 편견에 의해 올스타전에 참가할 수 있는 순위에서 아쉽게 밀려났다.
하지만 작년의 믿을 수 없는 활약과 지금도 여전히 맹활약을 하고 있으니 압도적인 표로 뽑힐 수 있었다.
분명히 영광스러운 자리이자, 인정받음에 대한 눈에 보이는 성과였다.
다만 시간이 많지 않은 동팔과 동욱에겐 좋지만은 않았다.
"이럴 시간에 훈련을 해야 하는데……."
"훈련도 훈련이지만 월드시리즈를 준비해야지. 내셔널리그 기준으로 한 게임을 더 하느냐, 덜 하느냐가 걸린 경기야."
"난 별로 상관없어. 어느 쪽이든지에."
"타자라서 좋겠다. 이럴 땐 내가 아메리칸 리그에 있다는게 다행이라고 생각해."
한가롭게 농담을 하며 이번 올스타전을 준비하는 동팔과 동욱.
올스타전은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는 경기다.
한국 리그와 달리 사소하지만 나름 중요한 기회가 걸린 경기였다. 치열하게 진행되니 부상 방지를 위서라도 준비운동은 필수.
그러던 중 둘이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같은 리그여서 같은 팀이 된 헤럴드와 데미안을 봤다.
"아마도 우리 쪽이 이길 것 같은데."
동팔의 말에 동욱이 답했다.
"우리 같은 사람만 신경 쓰면 안 돼. 내셔널 리그에도 실력자가 많아. 거쇼랑 오타니가 거기 있다는 걸 기억해야지. 특히 오타니는 타격은 너보다 훨씬 좋아서 완전히 날아다니던데. 나랑 너를 섞어 놓은 것 같다더라."
"누가 그래?"
"일본 언론이."
"그럼 그렇지……."
자국 국민이 보기 좋아하는 것을 올리는 것은 어느 스포츠 언론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각자 기록을 보면 투수로서 동팔의 기록을, 타자로서 동욱의 기록을 넘을 선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어이없는 기사가 일본에서 나오는 건 그만큼 두 사람이 뛰어나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그건 그렇고 시애틀의 두 녀석은 어쩔 거야? 지금 지역 1위잖아."
"그럼 이번에도 서부에선 시애틀이, 중부에선 네가 있는 클리블랜드. 동부는 역시 내가 있는 양키즈겠지?"
"와일드카드로 누가 올라올지 모르겠지만 결국 그렇게 되겠지."
"시애틀은 상대하기 벅찬데… 작년의 뉴욕 메츠처럼 투수와 타자가 강하니까."
작년에 월드시리즈까지 올라왔던 뉴욕 메츠의 전체적인 전력은 강하지 않았다. 그건 어디까지나 제리스가 마운드에서, 저스틴이 타자로서 맹활약하여 높은 승률을 기록했으니 가능한 이야기였다.
그 증거로 두 사람이 죽은 이후, 뉴욕 메츠는 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반대로 계약에서 해방되어 여전히 투수와 타자가 강한 시애틀은 1위를 수성하고 있었다.
"정상적인 방법으론 상대할 방법이 거의 없어. 특히 경기 숫자가 많을수록 저쪽이 더 유리해. 차라리 와일드카드처럼 단판 승부라면 몰라도……."
지금 시애틀의 헤럴드와 데미안은 승률을 적당히 조절하면서 놀고 있었다. 그래서 동팔과 동욱처럼 압도적인 기록을 세우고 있지 않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뛰어난 기록을 세워 메이저리그의 역사가 되는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사냥감을 사냥하는 즐거움으로 살아가는 중이다.
동욱이 말한 정상적인 방법. 경기에서 이기는 것으로 상대하는 것은 벅차다. 두 사람이 한 경기에서 맹활약을 하더라도 다른 경기에서 밀리면 소용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생각한 방법은 있어? 불법적인 건 안 된다."
"누가 불법을 저지른데. 다 생각이 있어. 다만…그러기엔 모험을 해야 해서 그렇지……."
"모험?"
"그건 게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많은 걸 알 필요 없어."
그것으로 시애틀의 헤럴드와 데미안을 어떻게 상대할 것인지의 대화는 끝났다.
그리고 올스타전의 결과는 동팔과 동욱. 마음에 들지 않지만 헤럴드와 데미안의 활약으로 아메리칸 리그가 승리하여 더 좋은 고지를 확보했다.
* * *
메이저리그의 축제인 올스타전이 있을 때, 마크에게 좋은 소식이 왔다.
"마크. 축하한다. 내일부터 더블 A에 올라가기로 결정이 났다."
"정말요? 감사합니다."
"나한테 감사하기는 무슨. 다 네가 열심히, 그리고 잘해서 그렇지."
감독의 말에도 마크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시했다.
마크는 자신이 더블 A에 올라갔다는 것 자체로도 기쁘다. 이것은 자신의 실력이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증거.
그리고 마크는 또 다른 이유로 기뻐하고 있었다.
'이걸로 동팔이 형을 도울 수 있는 길이 더욱 가까워졌어.'
트리플A에서 메이저리그로 가는 경우가 많지만, 더블A에서 바로 메이저리그로 가는 경우도 많다.
실제로 한국 프로 리그에서 메이저리그로 가는 것보다 더블A에서 바로 가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리그를 옮기게 되는 경우, 새로 시작되는 시즌의 기록을 예측할 때 필요한 자료의 확보에서도 마찬가지.
한국 리그에서 메이저로 가는 것보다 더블A에서 올라오는 경우가 더 많으니 정확한 예측이 가능했다.
싱글 A에 아무리 오래 있어도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보다 상위 리그인 더블 A라면 적더라도 확률이 존재한다.
마크의 진급(?) 소식은 제일 먼저 가족들이 알게 됐다.
"형!! 이제 더블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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