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오력의 투수-261화 (261/325)

[261]

한편, 훈련에 매진하다가 잠시 쉬는 동팔은 얼마 전에 있었던 순간을 떠올렸다.

'왜인지 몰라도 확실히 모든 것이 느려 보였어. 덕분에 홈런을 칠 수 있었고…….'

나중에 안 것이지만, 그때 날아온 구속은 100마일에 달하는 강속구였다. 하지만 중간까지 오는 순간이 몇 초에 걸릴 정도로 천천히 느껴졌다.

통상적으로 공이 날아오는 시간이 평균적으로 0.3초임을 감안하면 40~50배 정도 느리게 보인 것이었다.

즉 날아오는 공의 속도가 2~3마일로 보인 것이다.

아마추어라도 시속 100킬로미터(약 62마일) 정도의 구속을 받아칠 수 있다. 비록 전문 타자는 아니지만, 이전부터 타격 훈련을 해왔고, 프로 중의 프로 리그인 메이저리그에서도 타격 훈련을 받았다.

그런 상황에 시속 3~5킬로미터의 속도로 날아오는(물리적으로 불가능하지만 단순히 느끼는 것만으로) 공을 못 치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그러니 홈런을 치고, 루시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다는 뿌듯함이 지난 뒤, 강렬한 유혹이 찾아왔다.

'매 타석마다, 아니 적어도 절반의 타석마다 이럴 수 있다면…….'

비록 타자가 아니더라도, 그리고 강도 높은 훈련을 받지 않아도 5할 타율을 기본으로 가져가게 된다.

그런 상황에 많은 훈련을 거쳐 강속구도 받아칠 수 있는 힘과 신체를 가지게 된다면?

타격을 하는 도중에 얼마든지 미세한 수정이 가능하기 때문에 수비 쉬프트를 뚫는 안타가 가능하다.

단순한 안타를 원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홈런을 칠 수 있다.

원래 자신의 타격 능력으론 칠 수 없는 공이었지만, 제대로 쳐서 원하는 위치로 홈런을 기록했음을 생각하면.

그래서 언제 어느 때라도 이런 상태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동팔은 이미 한 번 계약을 했으니 더 이상 계약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동팔은 동욱이 왜 신경 속도를 극한으로 빨라질 수 있기를 원했는지 깨닫고 느낄 수 있었다.

'하긴 내가 겪은 것까진 아니더라도, 공이 날아오는 시간이 0.7초 정도 느껴진다고 했었지? 이 정도면 100마일의 공이라도 평균 시속이 50마일(약 80킬로미터)로 보인다는 건데…….'

이 정도면 5할의 타율을 기록하는 건 무리도 아니었다.

거기에 항상 어느 구종을 던지더라도 파악할 수 있게 상대 투수의 패턴과 구종을 분석하고, 어느 위치든 정확히 공을 타격할 수 있도록 훈련에 훈련을 거듭한다.

이렇다면 어떤 공이 오더라도 안타를 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그럼에도 안타 대신 범타가 나오는 것은 마지막에 맞추는 포인트가 아주 미묘하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거기에 투수가 던지는 공의 회전도 무시할 수 없으니 공을 때린다고 한들, 원하는 방향으로부터 약간의 차이가 발생한다.

'어쩌면 동욱이의 타율이 여전히 5할 주변에 머무는 건, 너무 정확하게 쳐서 그런지 몰라. 원하는 방향으로 간다면 안타지만, 미묘하게 틀어지니 그게 라인 드라이브로 수비에게 바로 가거나 높이 뜨거나… 하지만 시간이 더 지나 경험이 쌓이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어.'

하지만 그럼에도 동욱이 100%의 타율을 보일 수 있는 때가 있다. 그리고 그건 동팔도 확실히 이해하게 되었다.

'전에는 그냥 그런가 싶었지만, 내가 느끼는 정도로 느리게 볼 수 있다면… 어떤 공이라도 홈런을 치는 것을 이해 못할 건 아냐.'

그리고 지난 경기를 통해서 알게 된 것이 또 있었다. 동욱의 능력의 장점은 자신의 능력을 원하는 타이밍에 몇 배로 강화할 수 있다는 것.

대신 단점은 그 이후로 일정 기간 동안 스크레이치에게 받은 힘이 무력화되어 일반적인 선수가 된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동욱은 5할이 아니라 10할 타자가 되어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천천히 날아오는 공을 세밀한 동작으로 받아칠 수 있는데 못 치는 것이 이상했다.

그러면서 동팔은 난감했다.

'이런 동욱이를 어떻게 상대하지? 지금은 기회가 있다지만, 내년에 다른 팀이 되면 어떻게든 마주치게 될 텐데…….'

투수인 자신은 공을 던지고 난 다음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있다면 혹시 자신에게 날아올 타구를 잡는 것이 전부.

하지만 동욱은 투수의 손을 떠난 공을 보고 칠 수 있다. 제한이 걸려 있지만, 자신이 원하는 타이밍에 능력을 몇 배로 증폭시켜서 원하는 곳을 향해 타구를 날린다.

보통은 한 타석의 단판 승부만 보면 투수가 타자보다 유리하다. 하지만 동욱이 능력을 증폭하면 오히려 투수가 절대적인 열세에 빠진다.

악마의 능력이라도 공에 영향을 줄 수 없다는 조건이 걸려 있다. 이건 어느 계약자가 겨루더라도 공평한 승부를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였다.

하지만 동욱에겐 아주 유리한 조건으로 바뀌고 만다. 투수가 자신이 던진 후에도 공을 조절할 수 없다면 동욱에게 맞설 방법은 전혀 없었다.

그나마 평상시의 동욱과 맞설 방법은 혜진을 통해 알아낼 수 있었다. 그것은 동욱이 투수가 던지는 공의 정보를 얻는데 아주 작은 시간이라도 주지 않는 것.

그러나 능력을 증폭시키면 이것 또한 무용지물이다. 아주 빠른 변화구인 자이로볼이라도 마찬가지였다.

"젠장… 되게 골치 아프네……."

어떻게 보면 자신도 동욱과 같이 새로운 능력이 깨어날 수 있었다. 다만 평상시에 발휘되는 것이 아니고, 원하는 타이밍에 발동되지 않는다는 아주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그리고 또 다른 문제는 서로의 위치가 달랐다.

동팔은 마운드에 올라서 공을 던지는 투수. 반면 동욱은 타석에서는 타자였다.

언제 능력이 발동될지 알 수 없다면, 평상시에 투구를 훨씬 더 많이 하는 때에 생길 가능성이 높다.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은 없었다. 이것은 어찌해도 바꿀 수 없는 서로의 위치가 다르기 때문에 생긴 일.

그래도 난공불락처럼 보이는 성은 있어도, 진정한 의미의 난공불락은 없기에 포기하지 않았다.

*     *     *

누군가는 깊은 고민을 하는 시간에 다른 누군가는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어느 한 곳에선 소중한 사람이 죽어 비탄에 잠겨 있어도, 다른 곳에 있는 어느 누군가는 많은 사람의 축하를 받으며 결혼을 한다.

동팔이 동욱을 상대하는 것에 전략적인 고심을 하는 때, 같은 팀의 로날드 버드는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은진과 처음으로 만나고 있었다.

"아, 안녕하십니까. 로날드 버드입니다."

"안녕하세요. 은진이라고 해요."

지완이 서로를 소개시켜주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리를 빠졌다. 그리고 빠지기 전에 은진에게 말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내가 준 것 잘 챙겼지? 충격기랑 마비침."

"그럼요, 형부."

한국어라 로달드는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서로 웃으며 이야기하기에 단순한 인사말이라 생각했다.

지금 두 사람이 자신을 경계하고 있다는 것을 꿈에도 알지 못하고.

아무리 친하게 지낸다 한들, 은진은 한 명의 여성이이다. 그리고 로날드는 완력을 잘 쓰지 않는 야구선수지만 메이저리그에 올 정도면 그동안 한 훈련의 양은 상당하다.

당연히 일반 성인 남정보다 힘이 강하다.

만약 로날드가 미인인 은진과 단 둘이 있게 되었을 때, 그가 은진을 덮치려고 한다면? 그럴 때 은진이 저항할 수 있는 수단은 거의 없다.

하지만 전기 충격기와 몸을 마비시킬 수 있는 약물이 발라진 침이 있다면 조금은 더 안심할 수 있다.

어차피 계속 메이저리그에 있을 것이고, 지완과 좋은 동료로 있기 위해선 은진을 함부로 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적어도 상식적이고 양심적인 남자라면 혼자 있는 여성을 겁탈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설령 여성의 특정 부위를 강조하고 드러난 옷을 입더라도 마찬가지. 충동적으로 성관계를 맺고 싶다는 생각이 들 수 있겠지만,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남자는 없다.

적어도 흔히 마주칠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전제에 한해서.

더군다나 실제로 로날드는 은진의 마음을 어떻게 얻을지 고민하고 있다. 그런 그가 은진이 혼자 있다고 한들, 덮칠 일은 없다.

그리고 레스토랑 안이었지만, 은진과 단둘이 테이블에 있게 되자 그는 더 긴장하고 있었다.

'가주길 바란 건 맞지만, 정말로 가버렸으니 뭐라고 말해야 하지?'

지완과 은진이 한국인임을 알고 있어 이전부터 한국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글은 쓸 수 있어도 대화를 하는 건 무리.

그러니 외국어에 익숙한 은진이 영어로 먼저 로날드에게 물었다.

"머리 깎는 것이 쉽지 않은 선택이셨을 텐데, 대단하세요. 어떻게 그런 결심을 하셨어요?"

은진이 로날드를 선택한 제일 중요한 이유였다. 그러자 로날드는 자신의 까끌까끌한 머리를 쓰다듬더니 손을 내려놓고 말했다.

"아하하… 그거요? 사실 제가 어렸을 때, 친한 친구가 같은 병에 걸렸었거든요. 그때, 저를 포함해 같은 반에 있던 모든 친구들이 머리를 깎았어요. 그때 일이 떠올라서 하겠다고 나섰죠."

"정말요? 그럼 그 친구분은 나아지셨나요?"

"아뇨. 그게 좀……."

세상은 동화의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때, 로날드와 친구들은 투병 중인 친구를 응원하기 위해 머리를 깎고 헌혈증을 모으고, 용돈을 모았다.

덕분인지 친구의 병세는 호전되었다. 하지만 친구들의 바람과 달리,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작스럽게 악화되더니 하늘나라로 가고 말았다.

일일이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그저 말끝을 흐리는 것만으로도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어머, 그런……."

"지금은 괜찮습니다. 그런데 그때도 그렇고, 메이저리거가 된 지금도 그렇고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것 밖에 없네요."

낙담하는 그의 말과 표정에 은진은 안쓰러움을 느꼈다.

"이것 밖에 없다니요.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아주 큰 도움이 되요. 머리 깎는 것 밖에 라고 하셨지만, 겉으로만 보면 그럴 뿐이잖아요. 그때와 달리 이번에는 친한 사이도 아니었고, 단순한 어린 아이가 아니라 많은 사람이 주목하는 메이저리거가 되어서 한 일이니까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로날드는 쑥스럽게 웃으며 스테이크를 썰어나갔다. 그러다 은진은 그를 선택한 또 다른 이유를 말했다.

"저기요……."

"네."

"혹시 괜찮으시다면 머리를 쓰다듬어 봐도 될까요?"

은진은 궁금했다. 지금 로날드의 머리는 고작해야 1센티미터 자란 것이 전부다. 그러니 머리카락은 당연히 바짝 곤두선 상태였다.

까딱하면 찔릴 것 같은 머리. 하지만 옆으로 쓰다듬으면 색다른 느낌일 것이 분명했다.

다만 남자에게 있어 머리를 쓰다듬는다는 것은 민감한 문제다.

남자의 머리를 쓰다듬는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우월한 지위에 있다고 인식되는 사람만이 가능하다.

예를 들면 한국으로 볼 경우 나이가 많은 형이라던가, 부모님 및 선생님이나 상사에 해당하는 경우다.

그 이외에 동년배의 친구나 어린 동생, 하급자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다는 것에는 이런 의미가 담겨있다.

아무리 봐도 만만하니 싸우려면 싸워 보던가. 라는 의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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