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오력의 투수-260화 (260/325)

[260]

"그래? 정말 빠르네. 재기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하지 않았어?"

"그랬었지……."

혜진은 어떻게 이게 가능했는지 알고 있지만 말할 수 없었다. 자신과 달리 은진은 직접 연관되지 않은 외부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냥 기적이라고 볼 수밖에."

"하긴 재기 못하는 것보다 이렇게 빨리 하는 것이 훨씬 낫지."

은진도 지완의 상태가 별로 안 좋다는 건 혜진에게 직접 들어서 알고 있었다. 비록 지완이 많은 돈을 벌어놨다고 하지만, 이후의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힘든 여정이 있었다.

선수로서 살아온 그가 선수로서 모든 것을 잃게 되면 그로인해 찾아올 상실감을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하지만 지금은 다시 회복했고, 재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에 은진은 안도하고 있었다.

주차장을 통해 혜진의 차에 탄 은진은 궁금해 하며 물었다.

"그런데 예은이는?"

"예은이? 듬직한 사람이 있어서 괜찮아."

"그래……."

은진은 베이비시터가 있어도 혜진이 직접 데리고 나올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도 완전히 믿고 나왔다는 것에 조금은 의아했다.

하지만 은진은 몰랐다. 혜진이 믿고 맡길 수 있다가 아닌, 듬직하다고 말을 한 이유를. 그리고 그 이유를 집에 도착하자 알게 되었다.

"왔나?"

"…어?"

지완과 혜진의 집은 동팔과 민희네로부터 멀리 떨어지지 않았다.

서로 가까이 지내다보니 하얀 늑대의 벗이 예은이를 돌봐주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특히 오늘은 동생을 공항에서 데리고 온다고 했으니 특별히 생각해서 돌봐주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와 달리, 자주 만나 익숙해져서 예은이는 익숙하게 안겨 있었다. 특히 더 친해진 계기는 야구장에 갔을 때였다.

처음 가는 야구장과 시끄러운 분위기에 무서워하던 예은이였지만, 그의 듬직하고 큰 몸에 더 큰 안전감을 느꼈다.

그 이후로 예은이는 하얀 늑대의 벗과 더 익숙하고 친해지게 되었다.

하지만 자주 본 예은이는 넘어가고, 처음 본 은진은 거구의 아메리카 원주민의 모습에 놀라고 있었다.

"어, 어, 언니… 저기 이 사람… 아니 이 분은……."

너무 놀란 나머지 영어가 아닌 한국어가 저절로 튀어 나왔다. 어버버 거리는 은진의 반응을 혜진도 이해를 하기에 부드럽게 말했다.

"말했잖아. 듬직한 사람이 있다고. 이름은 하얀 늑대의 벗이고, 많은 도움을 주시는 분이셔. 너보다 예은이랑 더 친할걸?"

이모인 자신보다 더 친하다는 말에 은진은 왠지 질투심이 치밀어 올랐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니 그게 당연하잖아. 이 사람은 예은이랑 항상 만나지만, 나는 몇 개월 전에 본 것이 전부인데."

솔직히 말해 예은이에게 은진은 기억도 나지 않을 얼굴이었다.

어찌어찌 혜진의 소개로 인사를 하고 집에 들어온 은진. 그리고 혜진의 말대로 엄마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얀 늑대의 벗에게 찰싹 달라붙은 예은이를 보자 상당한 충격을 받고 있었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처음에는 충격적이었지만,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금 대화를 한 다음에야 그가 예은이와 친해진 이유를 알았다.

"노력했다."

"네……."

몸은 거대해도 예은이가 안심하고 달라붙는 사람이라면 큰 위험이 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지 은진도 안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혜진에게 물어봤다.

"언니, 나 정말 그 사람들 다 봐야 해?"

"다른 여자들은 만나고 싶어서 난리인 친구들인데 싫어?"

"아니, 돈 때문에 보고 싶지는 않아. 보름 정도 있을 예정인데 시간이 너무 촉박하잖아. 그리고 계속 같이 있을 것도 아니고."

지금은 정규시즌이 한참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아무리 은진과 사귀고 싶어도 다른 직장인처럼 휴가를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고액의 연봉을 받고 있으니, 그에 대한 책임 또한 무겁다.

"뉴욕에 언제까지 있을 건데?"

"사흘 정도? 나머진 중부를 거쳐서 서부로 빠질 생각이야. 마지막엔 LA에서 비행기타고 한국으로 가려고."

"그래? 그럼 다 만나는 건 무리겠네."

"언니 말대로 다 만나는 건 불가능하고, 잘해야 한 사람 정도 만날 수 있을 걸?"

생각보다 은진과 만날 수 있는 문은 좁았다.

"그래서 만나고 싶은 사람은 있고?"

다들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이니 혜진은 은진이 고민을 많이 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은진에 대한 사전 정보가 없어서 분석이 불가능했기에 그녀의 예상은 틀렸다.

"응. 있어."

*     *     *

한편, 양키즈 훈련장에선 젊은 선수들이 전신 거울을 보며 자신의 외모를 스스로 평가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괜찮지?"

"괜찮아. 우리가 언제 외모로 승부했냐? 실력으로 승부했지."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자신들의 외모를 어떻게 가꿔야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훈련에 집중하기보다 외모에 집중하는 그들을 보며 코치가 야단쳤다.

"너희들 뭐해? 다 쉬었으면 다시 훈련하지 않고."

이전이라면 코치의 말에 바로 움직였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코치님. 오늘은 아주 중요한 승부가 있습니다."

"인생이 걸린 승부에요."

그들의 말에 코치는 황당했다.

"뭐?"

정규 시즌에 있어서 모든 경기는 중요하다. 하지만 인생이 걸릴 경기는 없었다. 월드시리즈 마지막 경기라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인생의 이정표에 우승이라는 단어가 들어갈 수 있겠지만, 거기까지가 전부인 경기다.

코치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보자, 사정을 알고 있는 동팔이 와서 간략하게 사실을 말해줬다.

"응? 정말이야?"

"네, 코치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경기 하나 하나도 중요하다. 그러나 인생의 반려자를 만나는 것보다 중요하지는 않다. 물론 어디까지나 가능성이 있다는 것뿐이고, 지금 만나려 하는 은진이 이들의 반려가 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혈기 넘치는 청춘이 미인을 만나겠다는 열의가 이해는 되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지완에게 말해 은진이 바로 한국으로 돌아가라고 할 수 없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들은 옆을 지나가고 있는 로날드 버드를 놀렸다.

"이거 어떻게 하냐?"

"좋은 일을 한 건 좋은데 일이 이렇게 돼서."

"먼저 만나도 좋을 것이 없겠어. 나중에 만나도 마찬가지지만."

루시를 위한 삭발에 동참한 덕분에 그의 머리는 여전히 대머리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젊어서 그런지 머리가 자라는 속도가 빠르다는 것.

처음에는 푸른빛이 도는 대머리였지만, 지금은 금발이 자라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정도로 헤어샾에 가서 무언가를 하긴 부족했다.

좋은 기회를 놓친 그를 놀리며 은진의 선택을 기다리던 때. 그들이 바라던 소식을 들고 지완이 도착했다.

"아, 여기 다 있었네……."

과연 누가 은진의 선택을 제일 먼저 받을 것인가? 그들은 궁금했다. 하지만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지금은 누가 먼저냐가 아니라, 만날 수 있느냐 없느냐가 관건이란 것을.

"저기… 안 좋은 소식이라면 안 좋은 소식이야. 처제가 오래 있을 건 아니라서 한 명 밖에 못 만나겠데."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이왕이면 어떻게든 만나서 자신을 어필하면 될 일. 만날 확률이 줄었다는 것은 좋지 않았지만, 그녀의 선택으로 경쟁자가 사라지는 것이다.

"괜찮아. 친구."

"그 정도에 마음이 상하지는 않아."

"좋은 여행이 되기 위해선 시간의 여유를 가지고 움직여야지. 다 이해 해."

그렇게 말을 하지만 좋은 말을 하는 사람은 전부 삭발을 하지 않은 선수들이었다.

삭발을 한 로날드 버드는 설마 자신이 선택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 머리를 민 사람이 옆에 있는 건 좀 그렇겠지…….'

다른 선수들도 그와 같은 생각을 하며 이미 탈락자가 생긴 것을 좋아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완의 입에서 은진의 선택이 발표되자 그들의 표정은 서로 바뀌었다.

"로날드 버드."

"응?"

"축하 해. 은진이 다른 사람보다 널 꼭 만나고 싶다던데."

그들로선 예상외의 선택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이는 좋은 소식을 들은 로날드 버드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어? 왜?"

자신이 선택받았다는 것은 분명히 좋다.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는 그만 아니라 선택받지 못한 다른 남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맞아. 왜 로날드지?"

"솔직히 제일 못 났잖아."

"우리도 다 같이 주전인데?"

그들의 의문에 지완은 은진이 말한 이유를 말해주었다.

"그래서 물어봤지. 그러자 이렇게 말했어. 용감하게 투병중인 루시를 위해 자신의 머리를 민 것에 감동받았다고."

방금 전만해도 이해되지 않은 선택이었지만, 이유를 듣자 단번에 이해가 되었다.

"젠장~!!!"

"이럴 줄 알았다면 나도 밀 걸!!!"

"괜히 잘 보이겠다고 하다가 이게 뭐야!!"

그들의 분노는 자신의 작은 것을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을 돕지 않은 자신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결정이 나자 그들은 깨끗하게 승복했다.

"그게 이유면 따질 수가 없잖아."

"실력도 고만고만하고 연봉도 고만고만한데……."

"그게 아니라 착한 일을 한 것이 이유라면 어쩔 수 없지……."

이들은 그렇게 선택받지 못한 충격으로부터 벗어나려 했다. 그들을 보며 지완은 은진에게 들었던 또 다른 말을 차마 말하지 못했다.

'삭발한 건 괜찮아요. 어차피 다시 자랄 거잖아요. 하지만 탈모는 좀… 그래요. 희망이 없거든요.'

전 세계에 있는 탈모인들의 마음을 단번에 부술 그녀의 발언. 하지만 전 세계에 퍼질 일은 없으니 문제될 것은 없었다.

그들의 경쟁이 은진의 선택으로 일단락되자 코치가 그들에게 말했다.

"자, 자. 이제 끝난 일이니 훈련에 집중해. 나중에 더 잘 맞는 인연이 있겠지. 그리고 로날드. 너도 마찬가지야. 과거는 과거고 지금은 지금이다. 나중에 실력이 떨어져 마이너로 내려가서 후회하지 말고 빨리 훈련에 집중해!!"

이유는 다르지만, 해야 할 것은 같았다.

그래서 선택을 받지 않은 사람은 코치에게 질질 끌려가듯이. 그리고 로날드는 흥에 겨워 스스로 달려갔다.

그러다 로날드는 다시 되돌아오더니 지완에게 물었다.

"그래서 언제 만날 수 있어?"

한껏 기대감에 부푼 마음을 숨기지 않고.

*     *     *

일련의 소란과 질서가 확립된 후, 동팔은 다시 훈련에 집중했다.

팀의 1선발인 그도 훈련을 함에 있어 편해지거나, 회복을 이유로 과도한 휴식을 취하지 않는다.

실력이 제일 뛰어난 선수도 이렇게 하는 마당에 다른 선수들도 마음대로 쉴 수 없었다.

전에는 조금만 힘들어도 그늘에 갔었을 선수들이 이제는 동팔이 쉬기 전에는 쉬지 않고 있었다.

그 약간의 변화가 아주 작은 차이를 만들어 냈고, 그 차이가 쌓이고 쌓여 지금의 양키즈가 높은 승률을 가질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런 사실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은 존 지라디 감독과 코치들. 하지만 그들은 굳이 동팔이나 다른 선수에게 말하여 괜한 변수를 추가시키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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