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
'그래, 나랑 해보자 이거지?'
오히려 상대의 전의를 불태우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니 야구에서 상대에 대한 분석을 할 때, 부드럽거나 유약한 성격인지, 도발에 불타오르는지를 파악하는 것도 중요했다.
다만 동팔의 경우 항상 강하고 표정을 잘 드러내지 않으니 성격에 대한 파악은 깊게 되지 않았다.
적어도 철두철미하게 스스로를 관리한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지만 그것이 전부.
그래도 지금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동팔이 타자로서 경험이 짧다는 것이다. 당연히 마운드에 있을 때보다 타석에 있을 때 더 초조할 거라 추측할 수 있었다.
그걸 이용하지 않으면 말도 안된다.
'왠지 몰라도 마지막이라 생각하는지 초조해 하는 것이 눈에 보여. 그럼 상대하는 것이 더 쉽지.'
침착하게 대응하는 타자만큼 상대하기 힘든 타자가 또 있을까? 물론 한동욱처럼 괴물 같은 타자라면 존재 자체로 상대하는 것이 버겁지만, 예외로 둘 케이스였다.
같은 타자를 상대한다면 타자가 침착하냐, 아니면 이렇게 조급한 상태냐에 따라 상대하는 부담이 달라진다.
이는 타자가 투수를 상대할 때도 마찬가지고, 일상생활에서 또한 마찬가지.
그래서 투수는 변화구가 아닌, 자신의 장기인 강속구로 다시 승부를 걸었다.
휙~ 퍽!!
이번에도 강속구가 날아오자 동팔은 배트를 휘둘렀다. 하지만 공은 스트라이크 존을 벗어나 바깥쪽으로 크게 빠졌다.
포수가 겨우 잡았지만, 어차피 주자가 나가있는 것도 아니라 와일드피칭이 되더라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 투수.
결국 볼카운트는 스트라이크만 두개가 되었다.
'이대론 안 되는데…….'
알지만 막을 수 없다. 긴장하고 조급해 하고 있다는 사실을 본인 스스로 알아도 제어가 되지 않으니 더 답답했다.
그리고 타석에 처음 섰을 때부터 거칠게 뛰기 시작한 심장은 더욱 크고 빠르게 뛰었다.
심장의 쿵덕쿵덕하는 소리가 자신의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혈액의 유입이 더울 빨라지고, 혈압도 다시 크게 상승했다.
"후우… 후우……."
심호흡으로 조절하려 하지만 소용없었다. 그리고 투수는 동팔이 진정될 시간을 줄 생각이 없었다.
'삼진으로 끝내자. 어차피 저 상태에선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동팔과 같은 상태에선 타자든, 투수든 실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다. 더군다나 미숙한 일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이번에도 강속구로 승부를 볼 생각이었다.
스윽 휙!!
하지만 쉽게 상대할 수 있다는 생각에 약간의 실수를 하고 말았다.
'젠장, 떴어!!'
자신이 원하는 위치보다 공이 날아가는 방향이 좋지 않았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실투였지만 한 가운데 몰린 건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공이 자신의 손을 떠난 이상, 자신이 실수했더라도 타자가 치지 못하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투수는 몰랐다. 지금 동팔에게 큰 변화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 * *
동팔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순간, 인지하지 못했다.
방금 전만 해도 걷잡을 수 없게 뛰던 심장 박동. 1초에도 두 번 이상 뛰던 심장이 지금은 천천히 뛰고 있었다.
갑자기 심장이 천천히 뛰는 것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주변의 모든 것이 느리게 느껴졌다.
투웅~.
쿵덕쿵덕 거리던 소리는 둔중한 북소리처럼 귓속을 울린다. 그 와중에 동팔은 투수가 던진 공이 눈에 들어왔다.
'포심… 패스트볼.'
마침 손에서 공이 떠나기 직전에 이 상태가 되었다. 덕분에 공을 쥔 그립의 모양을 확실히 볼 수 있었다.
다음에 눈에 들어온 건 투수의 표정이다. 방금 전만 해도 여유롭던 표정이었지만, 지금은 무언가 놀란 것 같은 눈빛이었다.
'설마 실투? 그럼 방향은 어디?'
정말로 좋은 순간에 이 상태가 되었다. 그런데 공이 엄한 곳으로 빠져나가면 모든 것이 허사다.
'일단 친다. 공의 방향은 크게 나쁘지 않아.'
동팔은 바로 온몸을 탄력적으로 움직이며 배트를 휘둘렀다. 하지만 천천히 오는 공처럼 몸과 배트도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동팔의 입장에서 몇 초 지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을 때가 되자, 공은 투수의 손을 떠나 절반 정도 날아왔다.
이미 구종을 파악한 동팔은 공이 어느 곳으로 향할지 바로 파악할 수 있었다.
'한 가운데는 아니지만,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해. 그리고 중심보다 윗부분…….'
칠 수 있는 공이고, 궤도 파악이 끝남과 동시에 동팔은 배트가 휘둘러지는 방향을 크게 수정할 필요가 없음에 안도했다.
하지만 맞는 부위와 아주 미세한 차이로 결과가 달라지니 수정을 해야 했다.
'배트는 조금 위로. 그리고 방향은…….'
다음으로 살핀 것은 풍향. 멀리 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파울 지역으로 날아가면 안 된다. 그리고 바람의 방향을 보니 동팔을 기준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을 향하고 있었다.
'너무 오른쪽으로 향하면 안 돼. 그렇다고 제일 거리가 먼 중앙은 피해야 하고…….'
당겨치기보다 밀어치기로 결정한 동팔. 그 사이 공은 홈플레이트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동팔의 배트도 공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배트가 공과 마주치는 순간, 배트는 공의 아랫부분을 강하게 때려 역회전이 걸리게 만들었다.
따악!!!
경쾌한 소리와 함께 타구가 멀리 뻗어나갔다.
"오~!!"
"간다, 간다, 간다, 간다!!!"
동팔의 통쾌한 타구에 양키즈 팬들은 안 일어날 수 없었다. 그리고 루시의 병실에 있는 모든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중계 카메라가 열심히 동팔의 타구를 따라갔다. 생각보다 높이 떠올라 불안했다. 그리고 공이 중앙을 벗어나 오른쪽으로 향하자 더 불안했다.
'아, 안 돼!!'
'제발, 제발, 제발!!'
어차피 펜스를 넘어갈 것 같으니 외야수가 잡을 기대는 버렸다.
양키즈의 팬들은 홈런을. 메츠의 팬들은 파울이 되길 바랐다. 그리고 그들의 희비가 엇갈리는 시간은 짧았다.
동팔의 타구가 아슬아슬하게 파울과 홈런의 경계를 표시하는 봉을 때리더니 왼쪽으로 떨어졌다.
어느 쪽으로 떨어지던지 간에, 봉에 맞았으니 규정에 따라 결정되었다.
"홈~ 런!!!!"
"으어~ 왠일이야!!"
전혀 예상치 못한 동팔의 홈런에 양키즈 팬들은 크게 기뻐했다. 그리고 이들보다 더 기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루시였다. 그리고 루시와 같은 병실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동팔이 공을 경쾌하게 때리는 순간, 그 공을 카메라가 따라갈 때엔 그들 중 아무도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저 숨을 죽이고 결과가 나올 때까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슬아슬하게 홈런이 되자 크게 기뻐하며 축하해 주었다.
"됐어!!"
"루시, 네 영웅이 드디어 해냈다!!"
루상을 다 돌고, 홈 플레이트에 도착하자 같이 삭발을 한 멤버들이 와서 동팔을 축하해 주었다.
그들은 투수가 홈런을 친 몇 안 되는 진귀한 순간을 찍기 위해 다가온 카메라를 보더니, 바로 헬멧을 벗어 삭발한 머리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한 목소리로 말했다.
"루시!! 힘내!! 반드시 나을 거야!!"
비록 저 멀리 떨어진 곳이었지만, 그들의 마음은 루시에게 바로 전달되었다.
루시는 멈출 수 없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고마워요. 모두……."
# 선행은 사랑을 부르고
결국 뉴욕에서 붙은 서브웨이 시리즈는 동팔의 솔로 홈런에 힘입어 1대 0으로 양키즈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이 경기에서 언론이 주목하는 것은 양키즈의 승리보다 다른 것에 있었다.
바로 루시와 관련된 이야기였다.
경기가 끝나자마자 이미 알고 있던 방송국에선 동팔과 루시의 약속. 그리고 루시를 위해 삭발을 한 양키즈 4명의 선수에 대해 조명했다.
순식간에 미국 전역에 방송된 이 소식은 다시 한 번 빠르게 전 세계의 언론 매체를 통해 전해졌다.
그리고 이어서 진행된 것은 비영리 단체에서 모금을 했고, 모금된 금액은 루시의 백혈병 치료에 지급될 예정이다.
동팔에게 선심성 후원을 거절한 제임스였지만, 솔직히 욕심이 날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치료비용은 큰 부담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되니 사람들의 정성이 모인 후원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이렇게 루시를 통한 후원과 지원, 그리고 감동이 이어지고 있을 때.
또 한 사람의 청춘에 봄이 오기 시작했다.
* * *
뉴욕 국제공항에 한국에서 온 여객기가 도착했다. 많은 나라에서 오기 때문에 한국에서 오는 것이 대수로울 수는 없었다.
공항의 입장에선 관리해야 할 항공기 중 하나에 불과했다. 하지만 거기에서 나온 한 명의 여성은 아니었다.
"……."
"저기요. 괜찮으세요?"
"아. 네… 여권은……."
"방금 드렸거든요."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인종은 달라도 미인에 대한 반응은 다르지 않다. 동양에서 온 한 명의 미인으로 인해 출입국을 관리하는 공무원은 자신도 모르게 넋이 나가고 말았다.
여권에 있는 사진과 동일한 인물임을 확인하자 여기에 온 용무를 확인했다.
"여행 비자시군요. 어디로 여행하실 예정인가요?"
"그냥 뉴욕이랑 여기 저기 돌아다녀 보려고요."
"그렇군요. 혹시 아는 사람이 있나요?"
없다면 휴가를 써서라도 안내할 마음이 넘쳤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녀에겐 아는 사람이 있었다.
"네, 언니랑 형부가 뉴욕에서 살고 있어요."
"그래요? 뉴욕에 사신다면…어떤 일을 하고 계신가요?"
"언니는 뉴욕 양키즈에서 수석분석관으로. 형부는 투수로 있어요."
"네? 메이저리그의 양키즈 입니까?"
"네."
생각보다 유명한 사람과 친인척 관계였다. 여기까지 왔다면 누구인지 물어보지 않고 버틸 수 없었다.
"혹시 누구입니까? 양키즈의 투수가."
"작년에 캔자스시티에 있었던 남궁지완 선수에요. 아, 참고로 강동팔 선수와 친하다고 했어요."
두 선수 모두 모를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야구에 관심이 없더라도 뉴욕에 살고 있다면 길을 가다가도 몇 번씩 듣는 이름이었다.
그래서 더 많은 것을 묻고 싶었다. 하지만 뒤에 밀린 사람들이 불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대체 몇 번을 물어보는 거야?"
"저거 수작 거는 것 아냐?"
그렇지 않아도 상당수는 사업이나 출장으로 오는 중이라 시간이 중요했다. 아무리 미인을 봐서 좋다지만, 봐 줄 수 있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사람들의 분위기가 좋지 않자, 공항 출입국 관리인은 여권을 주인에게 주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좋은 시간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그렇게 해서 은진은 출입국 심사대를 간단히 통과했다. 이어서 항공기에 실린 짐을 찾은 뒤, 문을 나오자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과 만났다.
"은진아, 여기야."
"언니!"
한국에 있을 때부터 미인 자매로 유명했던 두 사람이 다시 미국에서 만났다. 전화로 연락을 했지만, 그래도 직접 마주보는 것은 새로운 느낌을 주었다.
"정말 오랜만이다. 겨울에 보고 처음이지?"
"언니가 한국에 안 오면 어떻게 봐. 그런데 다른 사람은?"
"지완이? 지금 복귀훈련 막바지라서 열심이야. 아마 조만간 복귀할 수 있을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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