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
'이대로는 안 돼. 어떻게든…….'
바깥쪽으로 빠지는 공을 치기 위해선 팔을 쭉 내밀어야 했다. 그래야 다음 기회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주변의 것이 느리게 보이는 만큼, 자신의 몸도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닿아라, 닿아라, 닿아라, 닿아라!!'
지금 바라는 것은 안타나 홈런이 아니다. 그러기엔 이미 늦었다. 지금 동팔이 바라는 것은 어떻게든 공을 커트해서 파울을 노리는 것.
아주 미세한 차이라도 치는 것이, 건드리는 것이 중요했다. 노력 끝에 배트의 끝 부분이 공에 닿았다. 그러자 모든 것이 느리게 보이던 것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딱!!
약하지만 분명히 맞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빠르게 날아가던 공은 방향이 바뀌며 위로 올라갔다.
이번에 파울이 되는 바람에 타석에서 기회가 더 생겼다. 하지만 동팔은 그것보다 다른 것이 더 중요했다.
'왜… 방금 순간에 그게…….'
솔직히 말하면 너무 아쉬웠다. 적어도 투수가 공을 던지기 전에 시작했다면, 제일 좋을 타이밍에 맞추어 배트를 휘둘렀을 것이다.
거기에 바깥으로 빠지긴 했지만, 제대로 때릴 수만 있다면 홈런도 가능한 공이라 더 아쉬웠다.
하지만 아쉬워한다고 해서 지나간 시간이 되돌아오지 않는 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게 또 왔으면 좋겠는데…가능할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원인은 알 수 없다. 만약에 알게 된다면 이 상태가 되는 것을 조절할 수 있던가, 최소한 언제 나타나는지 짐작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거기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쿵쾅거리며 뛰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조급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다독였다.
한편, 중계진에서는 방금 전 동팔이 친 파울로 인해 놀라고 있었다.
"방금 전에는 놀랐습니다. 이번에 완벽히 삼진을 당할 것이라고 봤는데 동팔 선수가 임기응변으로 파울을 만들어 냈군요."
"슬로우 장면으로 보겠습니다. 분명히 강속구에 놀란 강동팔 선수가 배트를 휘둘렀습니다. 배트가 휘둘러지는 방향을 보면 완벽히 삼진 아웃이 될 상황이었죠. 하지만 그 짧은 순간에 동팔 선수는 팔을 뻗어 파울을 만들어 냈습니다. 보통 반사신경이 아니에요."
이걸 알아차리는 사람은 중계진에서도 많지 않았다. 그나마 메이저리그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해설자였으니 가능한 일.
반면 한국의 중계진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가, 그들의 중계를 듣고 나서야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한국 중계진의 무능력이라 볼 수는 없었다. 그만큼 동팔의 변화는 전문가 중에서도 경험이 많이 쌓이고 실력이 뛰어난 사람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잘하면 이번 타석에서 안타가 가능할까요? 볼넷도 투수에게 위험하지만, 안타를 맞으면 정신이 더 흔들릴 겁니다."
"이런 반응이라면 기대해 볼만도 하겠습니다."
하지만 중계진의 기대와 달리, 이번 접전에서 동팔은 헛스윙으로 인해 삼진 아웃을 당하고 말았다.
"아… 젠장……."
바라던 것과 달리 그 상태가 다시 오지 않았다. 그래서 상대의 변화구에 속아 배트가 나가고 만 것이었다.
저번과 달리 많은 것이 아쉬웠지만, 그래도 또 한 번의 기회가 있으니 거기에 집중하려고 했다.
'잊자. 지금은 요행을 바랄 때가 아니야.'
* * *
한편, 동팔이 루시를 위해 홈런을 치려고 할 그때.
한국에선 혜진네 집에서 젊은 여성이 아빠와 함께 메이저리그 중계를 보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은진. 혜진의 여동생이며, 뉴욕 양키즈 선수들 중 젊은 선수들이 미국 대통령보다 더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옆으로 누운 상태에서 TV를 보고 있었다.
루시의 이야기를 혜진에게 들었기 때문에 은진은 동팔을 응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풀카운트의 접전 끝에 삼진으로 물러나자 많이 아쉬워했다.
"아~ 아깝다."
그리고 이어서 양키즈의 타자가 타석에 들어서고 있었다.
비록 동팔은 아쉽게 물러났지만, 풀카운트까지 가는 접전으로 흔든 덕분인지 다음 타자는 단타로 1루에 진출했다.
그리고 이어서 올라오는 타자는 뉴욕 양키즈의 2번 타자인 로날드 버드였다.
그는 타석에 들어서면서 장갑과 헬멧을 고쳐 썼다. 당연히 루시를 위해 삭발한 머리가 선명하게 보였다.
오늘 막 깎았기에 푸른 빛이 감도는 머리가 중계 카메라에 선명히 잡혔다.
그가 타석에 서자 은진의 아빠가 물었다.
"은진아."
"네. 아빠."
"너 정말 혜진이가 소개시켜 주는 사람 다 만날 거냐?"
어차피 딸을 평생 끼고 살 수 없는 노릇이니 이왕이면 좋은 남자와 맺어지는 것이 낫다. 그래도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비교적 혜진이 빨리 결혼을 했으니 은진의 경우는 조금 늦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혜진이 메이저리그의 선수를 소개시켜 준다니? 그래서 아빠는 그것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싫은 티를 내며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은진은 아빠의 말에도 신경쓰지 않고 답했다.
"그냥 만나는 것 가지고 뭘 그래요. 만난다고 다 결혼하나? 그리고 형부랑 언니가 착하고 성격 좋은 사람 골라서 소개시켜 준다고 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거예요."
"누, 누가 걱정한다고 그래? 그냥 빨리 집 나가. 그래서 나랑 엄마도 편하게 살아보자."
그렇게 말을 해도 실제론 마음에 없는 소리였다.
대화를 하면서도 은진은 얼마 전 언니인 혜진이 말해준 소개 명단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중에 한 사람이 지금 타석에 선 로날드 버드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맞다. 저 사람이 아이를 응원하기 위해 삭발에 동참했다고 했지?'
그 사실을 떠올리자 은진의 눈에 로날드 버드가 조금은 다르게 보였다. 그리고 곧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오래 미국에 있을 예정도 아니고, 남자 만나러 가는 것도 아니니 전부 다 만날 필요는 없잖아? 어차피 나보고 만날 사람을 고르라고 했으니까…….'
사람이 싫은 건 아니지만, 미국에는 관광 및 놀러 가는 것이다. 신랑감을 찾으러 가는 것이 아니었다.
인연이 되면 모르겠지만, 아닐 가능성이 더 높다. 거기에 자신은 미국에 살고 있지 않으니 결국 초 장거리 연애는 물론 국제 연애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서 연애도 쉽지 않은데 메이저리거라도 사양하고 싶은 것이 그녀의 마음.
'그래. 괜히 이 남자, 저 남자 만나는 것 보다 한 사람만 만나는 것이 낫겠지. 그럼… 누가 좋을까?'
고민을 하고 있지만, 이미 은진의 마음엔 한 사람이 정해져 있었다.
* * *
양키즈의 선수들이 꾸준히 진루하고 있지만, 점수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동팔도 양키즈의 마운드를 굳건히 지키며 단 한 점의 실점도 허용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점수는 여전히 0대 0.
덕분에 결과를 끝까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되어 양 팀을 응원하는 팬들은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다시 동팔이 타석에 설 기회가 다가왔다.
'다음에 기회가 온다는 보장은 없어.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몰라.'
첫 번째에선 범타로 물러났다. 두 번째는 좋은 순간이 왔지만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위기를 넘겼지만 결국 헛스윙을 하는 바람에 삼진으로 물러났다.
본인이 계속 타석에 서기 위해 효율적인 투구를 하고 있으니 적어도 8이닝까진 마운드에 설 수 있었다.
하지만 뉴욕 메츠의 타자들도 순순히 질 생각이 없으니 최대한 접전을 해가며 동팔의 투구수를 어떻게든 늘리려 했다.
덕분에 지금 동팔이 던진 공은 100개를 넘기고 있었다.
현재 7이닝인 상황에 9번 타순임을 생각할 때, 양키즈에서 주자가 더 이상 나가지 않게 되거나 8이닝으로 마운드에서 내려오면 정말로 이번 타석이 마지막 기회였다.
"후우……."
긴장이 되니 절로 심호흡을 하게 되었다. 하얀 늑대의 벗의 말대로 홈런을 치지 못한들 루시가 실망하는 일은 없다.
오히려 이렇게 삭발을 하고, 투혼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이미 최소한의 목적은 달성했다. 다만 그 이상의 것을 바랄뿐이다.
그리고 팀이 이기기 위해서도 홈런은 필요했다.
루시를 돕는 중이지만, 동팔이 반드시 해야 할 목표는 월드시리즈 우승. 당연히 그 과정에 포스트시즌 진출은 필수였다.
거기에 지금은 여전히 0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양키즈에서 1점을 추가하면 투수숫자가 많아져도 9이닝까지 던지게 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도 마지막일지 모른다는 긴장감 때문인지 동팔의 심장은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며 심장의 박동수를 낮추려 했지만, 짧은 시간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동시에 자연스러운 반응이었기에 의식하면 의식할수록 심장은 더욱 거칠게 뛰었다.
'제길… 어쩔 수 없지. 지금은 바로 앞만 보고 집중하자.'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거칠게 뛰는 심장은 혈액을 힘차게 전신으로 보내고 있었다. 그 중에는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하게 하는 뇌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갑자기 빨라진 혈액순환에 의해 혈압이 높아진다. 하지만 건강한 동팔이었으니 순간적으로 높아진 혈압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동팔은 투수의 공만 아니라 동작까지 신경을 쓰며 보았다.
'1선발인 스캇 로웬이 내려갔고, 이번에 올라온 투수는 불펜 중 한 사람…….'
단순히 실력이나 구위로 보면 상대하는 것은 더 나을 수 있었다. 하지만 타자의 입장에서 스캇 로웬의 공에 익숙해진 상황에 새로운 투수의 공에 익숙해지는 건 껄끄러웠다.
그래도 스캇 로웬이 내려가면 대신 올라올 투수 중 제일 확률이 높은 선수라고 분석을 마친 사람이라 다행이었다.
하지만 바꿔 말하면 그만큼 치기 어려운 공을 던지는 투수란 의미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분석조차 되지 않았을 테니까.
'스캇 로웬과 달리 변화구보다 강속구 위주로 던지는 투수. 읽기는 쉬울지 몰라도 반응 속도에 밀리면 알고도 당해.'
다만 강속구를 던져도 불펜 투수라 제구력에 난조를 보일 때가 있다. 만약 그가 제구력만 갖추어 졌다면 불펜이 아닌 선발에 이름을 올렸을 거다.
그러니 강속구인지 변화구인지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공이 빠져 부상을 입지 않도록 미리 주의했다.
'초구를 칠까? 아냐 확률이 높을 수 있지만, 어이없이 범타에 물러날 수…….'
그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메츠의 투수가 공을 빠르게 던졌다.
휭~ 퍽!!
몸의 상태가 좋은지 강속구가 스트라이크 존의 바깥 아래쪽 모서리에 정확히 꽂혔다. 처음부터 강하게 나오자 동팔은 투수의 입장에서 그가 왜 이러는지 알았다.
'기세 싸움이냐?'
변화구를 통해 상대방의 짜증을 불러일으키거나, 이렇게 빠른 공으로 상대의 기를 죽이는 이유는 뻔하다.
상대로 하여금 강한 압박을 주고, 깊은 생각을 하지 못하게 방해한다. 그럼으로 투수는 더 여유있는 마음으로 타자를 상대할 수 있다.
그렇다고 모든 타자에게 이 방법이 먹히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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