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오력의 투수-256화 (256/325)

[256]

그러니 삭발을 하는 것도 민희의 동의를 미리 얻어놔야 했다. 아니면 적어도 삭발을 하기 전에, 자신의 의견을 미리 전달해야 했다.

그래야만 그 이후에 오는 후폭풍을 막을 수 있다.

자신의 머리를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하냐는 말이 나올 수 있다. 그런 것으로 여자가 왜 화를 내는지 모른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여자가 화를 내는 포인트는 머리가 아니다.

머리를 어떻게 하던지 본인의 자유지만, 적어도 그 전에 의견을 말하거나 물어보지 않았다는 불만의 표시다.

이건 상대의 헤어스타일의 문제가 아닌,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 행동에 화를 내는 것이다.

일반적인 예로 데이트를 할 때, 남자의 복장이 평상시와 다를 바가 없다면 여성은 남자에게 마음이 떠난다.

남자의 못나거나 허름한 모습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이 만남을 위해서 남자가 얼마나 준비를 하고 왔으며, 마음을 쏟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물론 복장만 본다는 건 아니다.

상대 남자가 직장의 상황에 의해 준비를 하지 못해도, 약속시간 안에 도착하기 위해 뛰어오는 모습. 그리고 도착하면서 숨을 헐떡이며 땀이 흐르는 모습에 더 마음이 간다.

상황에 많은 준비를 하지 못해도, 자신과 만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 여성이 상식적인 윤리관과 인식을 가지고 있다면 가능한 일이지만.

동팔이 지금 민희에게 자신의 머리를 삭발할 것인지 묻는 것도 여기에 해당하는 말이다. 어차피 동팔은 민희가 어떤 대답을 할지 알고 있었다.

"설마 루시를 위해서요? 그럼 당연히 찬성이죠."

그리고 민희는 동팔이 예상한 대답을 했다.

그럼에도 물어본 것은 상대를 위한 존중의 표현이었다.

"그럼 언제 삭발할 거예요? 공개적으로? 아니면 다 끝난 다음에? 그것도 아니면 경기 전에 하고, 나중에 말할 거예요?"

덤으로 민희는 동팔이 생각하지 못한 것을 미리 확인해주었다.

"삭발은 늦어도 경기 전에 해야겠지. 그리고 상대 투수가 이런 일로 압박을 받으면 안 되니까 양키즈 안에서만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고."

상대하는 투수의 입장에서 이런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듣게 되면 마음이 흔들린다. 순식간에 어린 소녀의 바람을 막으려는 악당의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물론 프로인 이상, 아무리 안타까운 일이 있더라도 냉혹한 승부의 세계에서 양보를 하지 않는다.

하지만 야구가 찰나와 섬세한 스포츠인 이상, 심리적인 영향이 적을 수가 없다.

동팔은 루시의 이야기를 상대 투수가 알게 됨으로 인해 흔들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확실히 그러면 불공평한 경기가 되겠죠. 알겠어요. 그럼 제가 자주 가는 미용실로 가요."

그러다 민희는 또 다른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럼 이참에 다른 선수도 동참할 사람이 있지 않을까요? 한 번 알아봐요."

그리고 그 생각을 하면서 제일 먼저 떠오른 사람을 말했다.

"아마도 데니 행크스가 제일 먼저 나서지 않을까요? 그 사람 은근히 열혈 정의파에요. 본인 입으로 야구 선수가 되지 않았다면 히어로가 될 거란 말을 하던데요."

민희의 말에 동팔도 동의했다.

"하긴 루시 일에 제일 열성적으로 도와준 사람이 그 형이었으니까."

그리고 두 사람의 예상대로 데니 행크스는 즉시 반응했다.

"당연히 해야지. 어차피 머리카락은 또 자라."

하지만 예상하지 못한 것도 있었다.

"헤어클리퍼 어디 있지? 지금 당장 자르자고."

"어, 어? No, no. Stop!!!"

열정이 너무 넘친 나머지 바리깡(Bariquant)을 바로 찾았다. 그리고 동팔은 그 자리에 잡혀 데니에게 삭발을 당하기 전, 그에게 삭발에도 때가 있다는 설득을 하고 나서야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 마음과 마음이 이어질 때

아침이 되기 전인 새벽.

남들이 거의 일어나니 못하는 시간에 동팔은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으윽……."

옆에서 자고 있는 민희가 깨지 않도록 입을 꽉 다물고 있었다. 하지만 회복으로 인해 오는 고통은 줄어들지 않고 더욱 강해지고 있었다.

'제길… 전보다 더 많이 훈련을 하는 바람에 수시로 회복하지 않았더니 결국…….'

중간에 회복하지 못한 만큼 한 번에 몰아서 회복이 된다. 그리고 회복되는 정도에 따라 고통의 강도가 바뀐다.

회복하는 양이 늘어난 이상, 고통이 늘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

비록 안정기가 지났지만, 민희가 놀라는 건 싫었다.

그래서 최대한 소리를 죽이고 회복되는 시간을 버티려는 찰나, 그의 옆에 하얀 늑대의 벗이 나타났다.

"괜찮은가?"

그는 민희가 듣지 못할 작은 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동팔은 그의 물음에 답할 여력이 없었다.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안 하얀 늑대의 벗은 힘겨워하는 동팔을 업고 방을 나왔다.

그리고 거실에 도착하자 소파에 눕혔고, 이후 동팔은 신음이나마 낼 수 있었다.

고통의 시간이 지나고 일단락되자 하얀 늑대의 벗이 물었다.

"평상시와 달리 회복을 자주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역시 훈련을 너무 많이 한 것 아닌가?"

동팔의 옆을 거의 떨어지지 않고 지켜본 그의 물음.

"네,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구위가 떨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타격 훈련까지 소화했거든요."

"그렇게까지 무리할 필요가 있나?"

"그건… 그냥 저의 고집이라 생각해주셨으면 합니다. 약속을 한 이상, 반드시 지키고 싶어서요."

"나쁠 것은 없다고 보지만……."

하얀 늑대의 벗은 순간 효율이 좋지 않다고 말하려다 말았다. 그렇게 되면 스크레이치가 동팔에게 나타나 했던 말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왕 할 것이라면 확실히 하는 것이 낫겠지. 그나저나 그때처럼 모든 것이 느리게 보이는 순간은 그 이후로 없었나?"

"아~ 그거요? 아쉽게도 없었습니다. 만약에 그 순간이 오늘 경기에서 타석에 설 때 나타났으면 싶지만… 어렵겠죠."

동팔의 말에 하얀 늑대의 벗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다만 잠시 생각을 하더니 물어봤다.

"요즘 들어 이렇게 아픈 때가 많았던 것 같은데, 맞나?"

"네."

"그렇군……."

하얀 늑대의 벗은 이후로 다른 것을 물어보지 않았다. 다만 한 마디를 했다.

"그대의 선행으로 인한 고난이 새로운 능력을 만들지도 모른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네?"

"그냥 그렇다는 거다. 너무 깊게 생각할 필요 없다. 그리고 다 회복되었으면 올라가 봐라. 민희가 일어나서 걱정하기 전에."

동팔은 민희가 자고 있을 방을 향해 서둘러 올라갔다.

*     *     *

루시와 한 약속을 이행해야 하는 때가 다가왔다.

그리고 그 날이 되자 동팔과 데니 행크스는 삭발을 하기 위해 민희의 단골 미용실에 와 있었다.

그런데 삭발에 동참한 사람은 두 사람 만이 아니었다.

"브라이언, 정말 괜찮겠어? 아내한테 허락은 받은 거지?"

"당연히."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주전 포수인 브라이언 산체스였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은 젊은 선수였다.

"조만간 은진이가 온다는데 괜찮아?"

"괜찮습니다. 조금 아쉽지만, 루시가 힘을 내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는 로날드 버드. 혜진의 여동생인 은진과 사귀기 위해 지완에게 잘 대해주는 선수 중 한 사람이었다.

은진을 노리는 선수들에게 그녀에게 잘 보이기 위한 준비는 필수다. 그 중 겉모습의 상당한 비율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머리카락.

예상보다 미국에 방문하는 일정이 빨라져서 며칠 후 보게 될지도 모른다.

그에 대한 대비를 하기 위해 삭발은 피해야 할 상황이지만 로날드는 삭발을 결심했다.

이미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있던 지예와 일부 냄새를 맡은 미국 방송국이 카메라를 가지고 이들이 삭발하는 것을 찍기 위해 와 있었다.

그들에게 동팔과 다른 선수들은 주의에 주의를 부탁했다.

"녹화를 하는 건 상관없지만, 이 내용은 경기가 끝난 다음에 공개하셨으면 합니다. 경기에 영향을 주고 싶지는 않아요."

"알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전 뉴욕 매츠 팬이거든요."

양키즈 선수의 선행을 찍으러 온 기자의 말 치곤 이상했지만, 그래도 보안에 믿음이 가는 말이었다.

적어도 자신이 원하는 팀이 승리할 확률을 조금이라도 더 올리기 위해서라면 가능한 철저히 함구하는 것이 낫기 때문이었다.

특정한 헤어스타일이 아니라 단순한 삭발이었기에 네 사람의 머리를 만져도 시간은 빨리 지나갔다.

그리고 깔끔하게 삭발된 머리를 보여주며, 네 사람은 밝게 웃고 카메라로 자신들의 모습을 찍었다.

*     *     *

경기 시작하기 얼마 전.

불펜에 올라와 시범 투구를 하는 동팔을 보며 많은 사람이 신기하게 여기고 있었다.

"왜 갑자기 머리를 깎았지?"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나?"

주변을 보아도 삭발을 하여 대머리가 된 사람을 보는 건 쉽지 않다. 보통은 자신의 머리를 원하는 길이를 유지하며, 자신이 원하는 헤어스타일을 유지한다.

그러니 평상시 머리카락이 있던 사람이 삭발을 하는건 다른 때와 마음이 다르다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다.

그리고 처음에는 동팔이 눈에 보였지만, 이어서 데니 행크스와 공을 받아주고 있는 브라이언 산체스의 삭발한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또한 특별히 인상에 남지 않아도 타자 중 한 사람인 로날드 버드도 마찬가지였다.

네 사람이 갑자기 머리를 민 상태로 경기장에 나서니 사람들의 시선이 더 모이고 있었다.

당연히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는 것을 방송국의 중계진이 간파하지 못 할리가 없었다.

"오늘은 전과 달리 양키즈 선수 중 네 명이 삭발을 하고 나왔습니다. 그 중에 오늘 선발로 등판하는 강동팔 선수도 있군요. 대체 무슨 바람이 분 걸까요?"

"다 이유가 있겠죠. 한 사람도 아니고 네 명이 동시에 삭발을 했다는 건 흔치 않는 일이니까요."

"그 말씀을 하시는 걸로 봐선 무언가 알고 계신 것 아닙니까?"

"당연히 알고 있죠."

"그럼 저에게 살짝 귀뜸이라도……."

캐스터의 장난스러운 반응에 해설자도 그에 맞추어 반응했다.

"죄송하지만 그건 경기가 끝난 다음 말씀드리겠습니다."

눈치가 빠른 사람은 이것만으로도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더 많은 사람이 알아차리기 전에 화제를 돌렸다.

"이번 경기는 어떻게 예상하십니까?"

"강동팔 선수가 삼손도 아니고 머리를 깎았다고 한들 구위가 약해지지는 않을 겁니다. 당연히 뉴욕 메츠의 타자들은 그의 공을 공략하거나. 아니면 그가 빨리 마운드를 내려오도록 많은 공을 던지도록 유도해야겠죠."

"어느 쪽이든 쉽지 않군요. 물론 오늘 동팔 선수의 컨디션이 나쁘길 바라는 것도 있지만, 지금까지 컨디션 조절에 실패한 적이 없는 선수입니다."

"그래서 이제 실패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싶겠지만…그건 요행에 가까운 일이니 생각하지 않는 것이 현명할 겁니다. 당연히 메이저리그 선수라면 요행보다 실력으로 겨루어야 하죠. 비록 뻔히 보이는 결말이라도 돌진해야 합니다. 돈키호테와 로시난테가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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