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
그의 말에 말실수를 한 사람은 어떤 상황인지 깨달았다. 시간이 흐른다고 나아진다는 보장이 없다.
그러지 않기를 바라지만, 자신이 사과를 하기 전에 루시의 병세가 악화되어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그렇게 된다면 자신은 지금 미안하다고 미리 말하지 못한 것을 평생 자책하며 살아가게 된다. 그럼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다.
그들만의 대화가 병실에서 이루어지고 있을 때, 민희의 도움으로 밖에 나온 루시는 간만에 햇빛을 쬘 수 있었다.
나가기 전에 이미 간호사에게 말을 했고, 금방 돌아올 예정이었다.
겨울이 이미 지나갔고, 완연한 봄이 되었지만 밖은 여전히 쌀쌀했다. 거기에 해안가에 있는 도시였으니 바닷바람 또한 항상 불어 체감온도를 낮춘다.
이제는 배가 서서히 부풀어 오를 임신부인 민희와 환자인 루시는 몸을 가볍게 덮을 모포도 잊지 않고 챙겼다.
휠체어를 밀고 있는 민희는 모포를 어깨에, 루시는 무릎에 덮었다.
천천히 병원 내에 있는 작은 산책로를 걸어갔다. 처음에 두 사람은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입을 먼저 연 사람은 루시였다.
"제가… 이대로 동팔 오빠를 또 만나도 되는 걸까요?"
"응? 안 될게 있니?"
"하지만……."
다른 말도 아니고 동팔과 만나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고 있었다. 그리고 편지를 쓰는 것도. 얼마 전에 봤을 땐 그렇게 좋아했던 아이가 이런 반응을 보이자 민희는 나름 추론을 했다.
'별다른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왜 갑자기 오빠를 만나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지? 제임스 아저씨가 뭐라 할 이유는 없을 거고…….'
그래서 민희는 학교에서 배운 소거법을 적용시켰다.
"혹시 엄마가 만나지 말라고 그랬니? 오빠에게 부담을 주지 말라고?"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그래? 그럼… 혹시 병실에서 싫어하는 사람이 있었어?"
"……."
이번 물음에 루시는 바로 답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말할지, 아니라고 말할지 고민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각이 훤히 보인다는 것을 모르는 루시는 곧 이렇게 대답했다.
"아, 아뇨. 없어요……."
하지만 루시의 목소리에는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민희는 바로 알아차렸다.
'누군지 모르지만, 한참 미안해하고 있겠네. 그럼 이걸 어떻게 한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었다. 알아차린 것은 대략적인 흐름이 전부.
아무리 힘든 상황에도 또래에 비해 대견하다지만, 그래도 어린 아이다. 지금 이 상황에 대해 설명하기보다, 루시가 좋아할 만한 이야기로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그렇구나. 그래도 결국 다 같은 사람인데… 아, 루시. 언니랑 오빠가 만난 이야기 해줄까? 이거 생각보다 재미있어."
어떻게 보면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처음에 둘이 만나서 사귄 것도 아니었고, 당시 동팔은 혜진과 사귀던 중.
그러다 둘이 헤어지게 되었고, 동팔이 옆에서 계속 도와주면서 지지해주다보니 어느새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사이가 안 좋아도 이상하지 않을 혜진. 그리고 그녀와 결혼한 지완과 같은 팀에서 친구처럼 지내고 있었다.
비록 이미 결혼을 했지만, 남이 해주는 연애 이야기에 귀가 솔깃한 루시.
"정말요? 어떻게 사귀게 되었는데요?"
"그건 말이지……."
민희는 동팔과 만나기 전의 자신의 모습. 그리고 동팔을 처음 보게 되었을 때의 마음과 생활의 변화를 말해주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만나고 사귀게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으니 짧은 산책 시간에 모든 것을 말할 수는 없었다.
오늘 민희가 루시에게 이야기해줄 수 있는 부분은 동팔이 부상으로 인해 방출되고 좌절했을 때까지였다.
이미 들어서 알고 있는 이야기였고, 지금도 양키즈 홈페이지에 가면 동팔의 과거에 대한 설명이 나와 있었다.
그럼에도 루시는 민희의 이야기에 안타까워했다.
"그래서요? 그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데요?"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있다. 이후에 불사조같이 부활해 멋지게 재기했다는 것을. 하지만 지금 민희가 해주는 이야기는 동팔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민희와 어떻게 이어졌는지가 곁들인 내용이었다.
이것은 어디에서도 듣지 못할, 민희와 동팔을 통해서만 들을 수 있는 이야기였다.
"미안, 아쉽겠지만 지금은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 좀 춥지?"
이미 간호사가 말해준 시간을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그리고 곧 있을 치료를 생각하면 무리한 산책은 오히려 독이 된다.
민희의 말에 루시는 아쉬워도 어쩔 수 없음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래도 오늘만 날은 아니니까 나중에 와서 계속 말해줄게. 그러니까 지금은… 투 비 컨티뉴(To be continued)."
민희의 말에 루시는 다음을 기약하며 병실로 돌아왔다. 돌아온 루시의 표정은 나갔을 때 보다 더 밝아져 있었다.
루시의 표정이 밝아진 만큼, 병실에 같이 지내는 사람들의 표정도 밝아졌다.
* * *
꼭 홈런을 쳐야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홈런을 치게 된다면 루시가 더 좋아할 것은 분명했다.
그러니 동팔도 인터리그, 타석에 설 때를 대비하기 위해 타격 훈련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있었다.
거기에 양키즈에 있는 타자만 아니라 작년부터 메이저리그 최고 타자가 된 동욱에게도 조언을 구했다.
하지만 동욱에게 들은 조언은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건 알아서 해. 전에 내가 말해준 방법 말고는 더 이상 해줄 말이 없다.'
이전에 동욱이 해준 조언으로 지완을 상대로 홈런을 쳤음을 생각하면 확실히 좋은 방법이었다.
다만 그때처럼 투수가 방심할 거란 보장은 없고, 특정한 공이 올 때까지 커트할 능력이 없다.
그게 쉽게 되었다면 타자들이 투수들의 공을 계속 끊으며 투수 숫자를 쉽게 늘렸을 것이다. 반면에 그렇지 않다는 건, 그만큼 투수가 던지는 공을 스치는 것도 쉽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처음에 동팔이 타격 훈련에 더 집중하는 것을 보자 코치가 말렸지만, 제임스와 루시의 이야기를 듣자 도와주기로 한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동팔이 투수로서 압도적인 구위를 보여주고 있었으니 가능한 일이다.
만약 동팔이 타격에 집중하다 마운드에서 타자들에게 얻어맞으면 하지 않느니만 못하게 된다.
그리고 루시가 그걸 알게 되면 오히려 미안해 할 것이 뻔했으니 투수로서 감을 잃지 않는 것에도 시간을 투자해야 했다.
그래서 지금은 다시 한 번 마운드에 올라 뉴욕 양키즈의 승리를 위해 공을 던질 때.
평상시와 같이 뛰어난 구위로 상대 타선을 봉쇄하고 있는 동팔이었다. 하지만 이전과 느낌이 달랐다.
'타자의 입장에서 투수의 공을 상대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워. 한국에서도 느끼긴 했지만, 메이저리그는 더 해.'
타석에 서서 다른 투수의 공을 계속 상대하다보니 절로 어떤 공을 던질지 먼저 생각하게 된다.
자신이 생각한 대로 공이 왔다면 타격에 성공하지만, 예상치 못한 공이 오면 상황에 맞추어 대응해야 한다.
한껏 힘이 들어간 상태에서 변화구에 속아 배트를 휘두르면 이미 늦었다. 그렇다고 느슨하게 배트를 휘둘렀다간 강속구에 어김없이 삼진을 당한다.
그걸 계속 경험하다보니 동팔은 마운드에서도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저기 타석에 선 타자는 내가 어떤 공을 던질 거라 예상하고 있을까?'
한동욱처럼 미친 신경 반응 속도가 아니라면 모든 타자는 공을 예상하고 칠 준비를 한다. 정규 프로 리그가 있는 곳에서 공을 보고 치겠다는 것은 안 치겠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평균 구속이 빠르기 때문에 보고 치면, 배트가 돌아가기도 전에 공은 이미 포수 미트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 하는 생각은 투구에 집중했을 때도 했던 생각이다. 하지만 동팔에게 있어 타자의 입장에 더 실체적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점이 이전과 다른 점이었다.
'이번에 상대하는 타자는 강속구에 강한 타입. 침착하지만 초구를 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나는 이 정보를 알고 있고, 상태 타자도 내가 이 정보를 알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겠지. 그럼 초구는 볼이나 변화구로 생각할 가능성이 있어.'
야구는 정보전이다. 그리고 정보를 가지고 분석한다.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모든 것은 확률이지만, 그 확률을 끌어올리기 위해서 분석을 멈출 수 없다.
그리고 분석한 정보를 다시 역이용하는 것도 일상이다. 당연히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상대가 어떤 생각과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 파악하는 것은 보통 복잡한 일이 아니다.
그래도 동팔은 자신보다 머리가 훨씬 좋은 사람에게 들은 말이 있다.
'그럴 때 혜진이가 해준 말이 있지. 아무리 바꾸려 해도 바뀌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습관이라고.'
피차 초구를 노린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서로가 그걸 이용하는 것도 당연한 일. 그리고 초구 타격에 대한 분석도 끝났다.
'초구에 배트가 나올 확률은 약 8할. 그리고 그 중에 타격에 성공한 경우는 절반 정도. 꽤 높은 수준이야. 하지만… 타격에 성공한 구종은 중앙 위로 올라오는 빠른 직구. 그 아래로는 빗맞거나 배트가 따라가지 못해.'
문제는 그걸 알아도 그 공을 던질 수 있는지가 관건이다. 거기에 극단적으로 아래로 내려오는 공에는 배트가 나가지 않는다는 것도 분석관을 통해 들었다.
투수가 공을 던질 때, 방향을 이미 파악하거나 나가던 배트를 휘두르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동팔이 던질 공은 정해져 있었다.
스윽~ 휙!!
빠른 직구에 배트가 나간다면 역시 빠른 공을 던져야 한다. 그리고 중앙에 가는 것처럼 보이는 공.
그리고 타자는 자신이 생각한 초구임을 직감으로 알자 바로 배트를 빠르게 휘둘렀다.
휭~ 퍽!!
하지만 공은 홈 플레이트에 다가오자 아래쪽으로 빠졌다. 그래서 타자가 휘두른 배트는 허공만 갈랐다.
포수에게 공을 받으며 동팔은 포수 뒤에 있는 볼카운트를 본다.
'1스트라이크. 하지만 중요한 건 아냐.'
상대가 초구를 노린다는 것은 1스트라이크 이후의 상황에 익숙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신중한 패턴을 가져도 초구를 노린다는 것은 과감해 보이지만, 반대로 안정적인 타격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방금 전처럼 초구에 헛스윙을 하더라도 아웃될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초구에 과감한 승부를 위해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가 꽤 많으니 초구 공략은 생각보다 꽤 쏠쏠한 재미를 느끼게 해준다.
'이제부턴 신중하게 나오겠지. 변화구는 위험해. 체인지업은 더 위험하고.'
신중한 상대일수록 변화구는 좋은 먹잇감이 될 가능성이 높다. 동팔은 이번에도 자신이 타석에 선 타자라 생각했다.
'날 상대한다면… 내가 어떤 공을 던질지 예상하겠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답이 없었다. 강속구는 기본이고 한국 투수 중에 투심 패스트볼을 주로 던지는 투수는 자신밖에 없을 정도였다.
거기에 이전부터 단련시켜 온 커브와 슬라이더를 비롯한 포크볼 및 너클볼, 싱커와 스플리터까지 가능하다.
어떤 각도로 팔을 휘둘러도 어떤 공이 올지는 공이 지나가 봐야 파악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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