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오력의 투수-250화 (250/325)

[250]

"루시, 오래 기다렸니?"

아빠의 말에 루시가 답했다.

"아뇨, 오래 안 기다렸어요."

그렇게 말하는 루시의 머리카락은 항암 치료로 인해 다 빠져 있었다. 그리고 무기력함과 고통으로 인해 몸은 말라가고 있었다.

그래도 아빠가 들어오자 눈빛이 생기 있게 반짝였다.

루시의 반응에 제임스의 입가에는 절로 작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동시에 미안한 마음도 올라왔다.

하지만 지금은 제임스도 예상하지 못한 깜짝 선물을 루시에게 줘야 했다.

"그렇구나. 그런데 루시, 지금 아빠가 오다가 엄청 유명한 사람을 만났다. 루시가 알면 깜짝 놀랄걸."

"응? 누군데요?"

"그런 루시가 항상 보고 싶어 하는 사람 중 한 사람이야."

"네?"

솔직히 말하면 항상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바로 앞에 있는 아빠. 그리고 엄마였다. 그런데도 이렇게까지 아빠가 말하면 부모님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유명한 사람에 아빠와 엄마는 포함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분명히 스포츠 스타. 또는 헐리우드 영화배우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던 중, 루시는 슬쩍 문을 보았다.

약간 열린 문 뒤로 누군가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맞은편에 있는 사람의 눈에선 놀란 눈빛이 보였다.

그러다 루시의 눈과 살짝 상황을 보기 위해 나온 동팔의 눈이 마주쳤다.

"어……?"

설마 자신이 본 것이 맞을까? 정말 문 뒤로 강동팔 선수가 있는 걸까? 메이저리그 최고의 투수이자 양키스의 강력한 1선발인 그 사람이?

루시가 그런 생각을 하고,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하지만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동팔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나왔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서 눈빛으로 동팔을 타박하는 민희를 보았다.

"안녕, 루시."

처음에는 자신이 잘못 봤나 싶었다. 그러나 동팔이 분명히 자신의 이름을 말하자 루시의 반응이 튀어 나왔다.

"으, 으… 꺄~!!"

기쁨인지, 아니면 부끄러움인지 알 수 없는 짧은 비명이 튀어 나왔다. 그리고 즉시 아빠를 이용해 바로 뒤로 몸을 숨겼다.

*     *     *

"아, 안녕하세요……."

"안녕."

루시와 만났지만, 이야기까지 하는데 약간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처음에는 동팔은 물론 주변 사람들도 루시의 반응에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민희와 이야기를 먼저 하게 되면서 이해할 수 있었다.

'하긴 그렇게 좋아하는 슈퍼스타와 만났는데…….'

'자신의 모습을 보면 머리카락이 없어, 빼빼 마른 모습이니까…….'

이왕이면 예쁜 모습으로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백혈병에 걸려 그럴 수가 없었다.

동팔과 만났다는 것에 기뻤지만, 너무 부끄러웠다.

그래도 민희가 나서서 위로해준 덕분에 지금은 드디어 얼굴을 마주보며 이야기할 수 있었다.

늦은 밤이라 오래 있을 수는 없었다.

루시도 그걸 알고 있다. 또래의 다른 아이들과 달리 힘겨운 시간을 보냈기에 더 성숙해진 루시는 부끄러움을 잠시 밀어냈다.

유명인과 만났다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 있으니 바로 사인을 받는 것.

"이거… 야구공이 없네. 혹시 가지고 있는 물건이 있니?"

"그거요? 그건……."

없다.

만약 하얀 티셔츠가 있거나 유니폼이 있다면 거기에 사인을 하면 된다. 하지만 치료비와 월세 나가는 것만으로도 벅찬 상황에 유니폼은 사치였다.

거기에 유성 사인을 해줄 매직 팬도 없다. 수성이나 중성으로 하게 되면 살짝 스치는 충격만으로 사인은 지워지게 된다.

"그럼 어쩔 수 없지."

동팔의 말에 루시의 작은 어깨가 움찔거렸다. 이렇게 만나게 되었는데 언제 또 사인을 받을 수 있을까?

하지만 동팔의 말은 루시의 걱정을 단번에 날렸다.

"다음에 시간이 되면 또 오는 수밖에. 가능한 시간은 아빠를 통해서 알려 줘. 그땐, 나도 준비를 해서 갈 거니까."

"정말요? 감사합니다!!"

예상치 못한 선물에 루시는 기뻤다. 하지만 이제 곧 가야 할 시간이었다. 지금까지 있었던 것도 간호사가 봐주었으니 가능한 일.

그래도 무한정 봐줄 수 없었고, 외상전문인 곳도 아니라 다른 환자들의 배려도 해야 했다.

"그럼 알고 싶은 것 있니? 지금은 시간이 없어서 한 가지만."

"그건……."

묻고 싶은 것은 많았다. 동팔의 재기 스토리는 뉴욕 양키즈에 온 그때부터 많이 알려졌다.

포기하고 싶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도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온 불굴의 이야기를 들으면 루시도 희망의 심장이 뛰었다.

완치까지 과정이 쉽지 않지만, 그래도 의학이 많이 발달하여 백혈병 치료법이 있다.

재기가 불가능하다고 판정된 동팔이 성공했으니, 적더라도 가능성이 있는 자신이라면 더 희망을 품고 참고 버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비록 시간은 많지 않아, 곧 가야 하지만. 그런 동팔에게 묻고 싶은 것은 재기하면서 겪었던 경험담도 있었다.

하지만 루시는 동팔에게 그 질문을 하면 이야기가 길어지니 다른 것을 묻기로 했다.

"한국에 있었을 땐, 홈런을 치셨었잖아요."

"그렇지."

"그 모습을 또 보고 싶은데…부탁드려도 될까요?"

엄밀히 말해 동팔은 투수다. 당연히 홈런과 인연이 있다면, 얼마 전에 있었던 동욱에게 홈런을 허용한 것밖에 없다.

루시가 말한 것처럼 타석에서 홈런을 친 적은 있었다. 하지만 그건 한국리그에서였고, 메이저리그는 다르다.

루시도 메이저리그에 대한 규정을 알고 있다.

아메리칸 리그는 지명타자 제도라 투수가 타석에 설 일은 없다. 반면 내셔널 리그는 투수도 타석에 서야 한다.

그러니 내셔널 리그의 투수 중에선 타석에서 홈런이나 안타를 친 선수가 종종 나온다. 하지만 뉴욕 양키즈는 아메리칸 리그라 투수인 동팔이 타석에 설 일은 거의 없다.

있다면 단 하나, 인터리그에서 상대가 홈인 경우에 가능했다.

질문으로 시작되었지만, 부탁으로 바뀐 루시의 말. 하지만 나름 이유는 있었다.

지금 동팔은 메이저리그에서도 빠른 강속구와 절묘한 제구력. 거기에 다양한 구종으로 상대 타선을 요리하고 있었다.

메이저리그에서 최고 타자인 한동욱을 상대로 삼진을 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투수다.

그러니 투수의 입장에서 무언가를 바라면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전부다. 그러다 루시는 동팔에 대해 알아보던 중, 타격 능력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동팔이 타석에 설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혹시라도 타석에 섰을 때 통쾌한 안타를 치는 것이 보고 싶었다.

투수인 동팔에게 무리한 부탁일 수 있었다. 아니, 부탁을 하는 것 자체가 실례였다. 하지만 루시의 상황이 그녀가 실례를 해도 뭐라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리고 동팔은 뭐라고 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홈런이라… 하긴 프로에서 홈런을 안친지 좀 됐네. 작년에는 안타를 겨우 때렸으니까."

그것도 인터리그에서 상대하던 투수를 공략하기 위해서였다.

덕분에 제리스 리드의 너클볼을 공략할 수 있었다.

누가 봐도 무리한 부탁이었다. 하지만 루시의 부탁을 동팔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좋아. 그렇지 않아도 곧 인터리그라 메츠와 붙을 거야. 그때 열심히 해볼게."

본인이 부탁하긴 했지만, 말하자마자 실수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동팔이 거절할 것도 생각했지만 그러지 않자 루시는 놀란 눈으로 그를 보았다.

"정말요……?"

"그럼. 대신 많이 응원해줘야 한다. 여기 약속."

새끼손가락까지 걸며 약속을 한 동팔. 그리고 제임스와 루시, 같은 병실을 쓰는 환자들의 배웅을 받으며 병실을 나왔다.

나오면서 민희가 물었다.

"정말로 할 생각이에요?"

"해야지. 이걸로 힘을 얻으면 더 빨리 나을 수도 있잖아."

"그야 그렇지만, 결국 홈런을 치지 못하면 어떻게 하게요?"

민희가 그 말을 했을 때, 그들의 뒤에서 하얀 늑대의 벗이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시도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그 아이에게 큰 힘이 된다."

방금 전에도 없었던 그가 나타나자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윽!!"

"꺄!!"

그러면서 눈빛으로 그에게 이렇게 물었다. 어떻게 여기 있을 수 있냐면서. 그러자 그들의 눈빛을 본 하얀 늑대의 벗이 말했다.

"냄새를 통해 찾았다. 집에 와야 하는데 안 들어오니 찾으러 왔다."

그의 말에 두 사람은 그가 능력자라는 것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아, 그렇죠. 그런데 혹시 주술로 병을 치료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차도라도 가능할까요?"

동팔의 물음에 하얀 늑대의 벗이 말했다.

"고통을 덜어줄 수는 있다. 하지만 주술보다 병원의 마취제가 더 효과가 좋고 유용하다. 아쉽겠지만 주술로 치료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아쉬운 사람은 동팔만이 아니었다.

"주술로 병을 쉽게 치료할 수 있었다면 내가 있던 부족을 비롯한 다른 부족 사람들도 그렇게 죽지 않았을 것이다. 아메리카 원주민이 유럽 이주민에게 밀린 것은 그들의 뛰어난 무기와 지휘체제도 이유가 된다. 하지만 그 전에, 유럽 이주민을 통해 들어온 전염병에 많은 부족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밀리는 쪽은 이주민들이었다."

그리고 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내가 세상을 여행한 것도 치료법을 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찾지 못했고, 돌아왔을 땐 이미 늦었다. 어떤 부족은 전염병에 단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고, 어떤 부족은 9할이 죽었다. 인구가 그렇게 줄었는데 어떻게 저항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것도 전부 과거의 이야기다."

그가 왜 방랑의 길을 걸었는지 알 수 있는 역사의 파편이었다.

만약 자신의 힘으로 그때 사람들을 살릴 수 있었다면 역사의 흐름이 조금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말한 대로 그러지 못했고, 지금은 지나간 과거의 일이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어차피 루시라는 아이도 동팔이 홈런을 반드시 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쳐 주면 좋겠지만, 쉽지 않다는 건 알고 있다. 그 아이가 바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자신의 부탁에 동팔이 반응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 루시에게 큰 힘이 된다."

하얀 늑대의 벗의 말에 동팔은 마음의 부담이 조금을 줄었다.

"그러면 다행이긴 하죠. 하지만……."

"하지만?"

"그렇다고 도전에만 의미를 둘 생각은 없어요. 그리고 인터리그가 곧 다가오지만, 준비할 시간은 있어요."

"어떻게 준비할 생각인가? 한국 리그를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메이저리그와 격차가 상당하다."

한국에서 홈런을 치는 것과 메이저리그에서 홈런을 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그건 상대하는 투수의 난이도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비록 동팔의 힘이 홈런을 치기에 충분하지만, 맞추는 건 또 다른 이야기니까.

"괜찮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사정을 알면 도와줄 사람이 있거든요."

"응? 누군가?"

루시를 위한 동팔의 홈런 계획에 도우미가 될 사람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다.

다음날, 하얀 늑대의 벗은 도우미가 될 사람을 보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도움이 될 사람이긴 하다. 투수로서 공을 던지면 확실한 스파링 파트너다."

그의 말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그.

"잠깐, 사정 설명을 해주고 그 말을 하셨으면 하는데요."

그의 이름은 바로 남궁지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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