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오력의 투수-245화 (245/325)

[245]

"됐어."

"견제 당하지 말고 무조건 살아 있으라고 해."

덤으로 그들은 이제 타석에 올라올 3번 타자에게 사인을 보냈다. 사인을 받은 타자는 순간 황당했다.

'못 칠 것 같으면 차라리 삼진을 당하라고? 그게 타석에 들어선 타자에게 보낼 사인이야?'

병살을 당할 바엔 다음에 올라올 한동욱에게 기대하겠다는 노골적인 표현이었다. 상대가 상대인 이상 그도 감독의 지시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하긴 잘 하면 1점이 아니라 2점을 내서 역전이 가능한 상황이니까…….'

솔직히 말하면 너무 아쉽고, 또한 정나미가 떨어질 정도로 야속했다. 명색의 3번 타자이며 클린업 트리오의 시작이 되는 타순이다.

거기에 자신의 기록이라면 다른 팀에서 4번 타자가 될 능력이 충분했다. 다만 클리블랜드의 4번 타자인 한동욱이 너무 강하니 밀려났을 뿐이다.

그런 자신감을 가지고 있어도, 강동팔은 그것만으로 상대할 수 있는 투수가 아니었다. 이미 지난 시즌 전적을 보면 동팔을 상대로 총 4타석에 들어섰다. 그중 3번 삼진을 당했다. 나머지 1개의 타석에선 범타로 물러났다.

즉, 안타를 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의미.

솔직히 말하면 칠 자신이 없었다. 이미 오늘 한 번 상대했지만 강속구는 여전히 빠르고, 변화구의 볼끝이 너무 지저분해 정타가 나오기 어려웠다.

오히려 급격한 변화로 인해 과도한 헛스윙까지 하고 말았다.

이런 상황이니 감독이 자신을 무시하는 지시를 내려도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젠장… 어떻게 해서든지 동욱이를 넘어서야 하는데…….'

그 전에 4할 타율을 넘어야 하는데 자신은 지금 3할 3푼에서 턱걸이는 하는 중이었다.

분명히 이 정도라면 감독의 지시에 화를 내며 거부할 수 있겠지만, 이후에 올라올 동욱을 생각하면 그럴 수 없었다.

'쳇, 한다 해. 운이 좋아서 치면 치는 거고. 아니면 다음을 기약해야지.'

동팔은 주자를 더 이상 내보낼 생각이 없었다.

휙~ 퍽!!

타자는 좋은 공이라 생각하고 배트를 휘둘렀지만, 결과는 이것이었다.

"스트롸이크~ 아웃!!"

동팔을 상대로 자신의 실력을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과 다른 의미로 실력을 보여준 타자는 쓸쓸히 더그아웃으로 돌아왔다.

'진짜 저걸 어떻게 칠 수 있다는 거야?'

그의 뒤를 이어서 한동욱이 올라오자 경기장은 다시 한 번 침묵에 빠졌다.

'드디어 한동욱 앞에 주자가 나가 있어…….'

'1루이긴 하지만 그래도 동팔을 상대로 제일 좋은 기회인 것도 사실이니까.'

'잘 하면 기대를 걸어볼 만할지도.'

'까딱 홈런 맞는 바람에 2점 나는 거 아냐? 그렇지 않아도 겨우 1점 냈는데…….'

각자 자신이 응원하는 팀의 입장에서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했다. 다른 때라면 각자 바라는 것이 달라 이루어지기 힘들다. 특히 더그아웃에 있는 감독과 코치들의 바람은 상대팀과 다를 수가 없다.

그러나 이번만은 달랐다.

"드디어 무대가 갖춰주었어……."

"부디 잘 되어야 하는데 말이죠……."

양키즈는 한동욱이 타점을 만들길 바랐다. 비록 그로 인해 역전이 되겠지만, 한동욱의 틈을 발견하는 투자로 2실점이라면 싼 편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양키즈가 바라는 대로 동욱은 홈런을 생각하고 있었다.

'확실히 이런 기회는 흔하지 않아… 하지만 너무 생각대로 진행된다고나 할까? 그게 좀 걸리는데…….'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면 좋다. 자신이 타석에 섰을 때, 주자가 나가 있으면 타점을 만들 가능성이 아주 높아진다.

특히 상대하는 투수가 동팔이라면 더욱더 좋은 기회다. 하지만 너무 좋은 기회였기에 동욱은 무언가 의심이 들었다.

동욱은 더 이상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운이 좋았겠지. 야구를 하면 항상 예기치 못하는 일이 발생하기 마련이야. 지금 상황이 그렇고.'

한국 프로 리그였다면 분명히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상황이다. 하지만 여기는 메이저리그다.

자책점이 거의 없다 뿐이지, 동팔이라 해도 한 경기에 피안타가 평균 3~5회 정도 나온다.

때론 위기에 몰릴 때가 있지만, 그 위기를 어떻게든 넘어가거나 병살을 유도한다. 때론 자책점이 아니지만 수비의 실수로 점수가 날 때가 아주 가끔 발생한다.

동팔은 분명 강한 투수지만, 완벽한 건 아니다. 그건 자신 또한 마찬가지다. 동욱은 자신이 강한 타자라는 건 인지하고 있지만, 모든 타석을 안타로 장식하는 완벽한 타자가 아니다.

'그럼… 그걸 써야 하나…? 하긴 지금이 아니면 쓸 기회가 없을 지도 몰라. 있어도 1점이 고작이겠지.'

주자가 나가 있지 않은 상태에서 홈런을 치면 1점이다.

주자가 나가 있는 상태에서 홈런을 치면 주자의 숫자만큼 점수를 얻는다.

동팔을 상대로 솔로 홈런이 아닌 투런 홈런을 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좀처럼 찾아오기 어려운 기회였기에 동욱은 욕심을 내기로 했다.

"후우……."

동욱은 심호흡을 하며 타격을 준비했다. 그리고 서로 준비가 되자 동팔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100마일의 강속구를 뿌렸다.

휙~ 따악!!

자신이 바라는 곳으로 공이 오지 않았고, 기세 싸움에 질 수도 없었으니 파울로 끊은 동욱. 그리고 이번에도 전과 같은 공이 오자 슬슬 짜증이 났다.

'설마 날 도발하는 새로운 방법? 신박하다면 신박한 방법이겠지만…….'

도발을 한다면 그에 맞추어 받아 넘기면 된다. 그리고 이번에도 강속구를 던지면 받아칠 생각을 한 동욱은 다시 타격 자세를 잡아 공을 기다렸다.

스윽~ 휙.

동팔이 공을 던지려는 자세를 취하는 그 순간, 동욱의 눈빛이 빛났다.

*     *     *

아마 지금 이 순간, 다른 사람의 눈에선 모든 것이 평범하고 일상적인 흐름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동욱의 눈에는 모든 것이 느리게 보였다.

평상시에도 반사 신경을 포함한 모든 신경계의 속도가 빠르다. 당연히 머리 회전도 여기에 포함은 되었다.

그래서 뛰어난 타격 능력과 기민한 행동으로 최상의 수비를 보여주는 것이 가능했다. 지금 동욱에게 있어서 그때와 지금은 달랐다.

평상시에 느리게 보였던 것이 훨씬 더 느리게 보였다.

그의 눈에는 동팔이 투구를 위해 다리를 올리는 순간부터 슬로우 모션처럼 보였다. 들어 올린 다리가 강하고 굳건하게 땅에 닿았다. 이어서 동욱이 본 것은 동팔의 손.

최대한 꺾어서 던지고 있으면서 빠르게 던지기 위해 탄력적인 움직임을 가졌다.

동욱은 동팔의 팔이 어느 각도로 던지는지를 신경 쓰고 있었다. 동시에 그가 더 신경을 쓰며 보는 것은 공을 쥐고 있는 손의 모양이었다.

어떻게 쥐느냐에 따라 변화구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전이라도 쉽게 보지 못할 순간이지만, 적어도 모든 것이 훨씬 더 느리게 보이는 지금은 선명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포심 패스트볼. 이번에도 직구.'

그립을 보자 이번 공의 구종을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팔의 각도와 던지는 타이밍을 파악하는 것.

공이 손을 떠나는 순간, 투수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공에 간섭을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주변에 있는 대기의 흐름뿐.

동욱의 시선은 동팔의 공을 향할 뿐만 아니라 여기까지 오는 공간의 바람의 방향과 세기도 파악했다.

이미 죽은, 뉴욕 메츠의 제리스 리드처럼 바람의 방향을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잔디가 흔들리는 방향을 보면 어림잡아 짐작할 수 있었다.

'풍향은 내 기준으로 미약한 오른쪽. 이 정도면 강속구일수록 영향이 적으니 무시하자.'

바람의 영향이 거의 없다면 남은 것은 투수의 손을 떠난 공이 날아오는 각도다. 동팔의 손을 떠나고 궤적을 예상하는 순간, 동욱의 배트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공의 회전방향이랑 실밥의 위치 파악했다. 향하는 곳은 여전히 치기 곤란한 아래쪽이야. 하지만 이번에는 몸 쪽이 아닌 중앙.'

날아오는 곳을 확인했고, 남은 것은 정확한 타격을 위해 타이밍을 맞추어야 한다. 이미 동팔이 공을 던지는 순간 휘두르기 시작해 여유가 있었다.

이대로 휘두르면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최대한 수정에 들어갔다.

'홈런을 치기 위해선 강한 힘으로 퍼 올려야 해. 그럼…….'

동욱은 배트가 휘둘러지는 방향을 아래쪽으로 향하게 했다. 모든 것이 느리게 보임과 동시에 자신의 몸 또한 생각만큼 빠르게 움직일 수 없었다.

그만큼 정교한 동작이 가능하며, 공을 끝까지 보고 칠 수 있었다.

동욱에게는 십 몇 초로 느껴지는 시간.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0.3초도 되지 않는 시간이 지났다.

동욱의 눈에는 자신의 배트와 마주치기 직전인 공이 선명하게 보였다.

'배트가 쳐야 할 곳은 공의 아랫부분. 하지만 평상시 정타보다 약간 위로 해서 친 다음 퍼 올려야지 외야 플라이로 끝나지 않아.'

동욱의 배트와 공이 마주치는 순간, 시간은 일반 사람과 같은 느낌으로 흘렀다.

따악!!

이젠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손의 느낌만으로 타구가 어디까지 나갈지 직감했다.

배트의 스위트스폿에 정확히 타격하였고, 팔에 반발력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아주 경쾌한 소리와 함께 공은 쭉쭉 뻗어나가더니 펜스를 넘어갔다.

"와아!!!"

"홈~런!!"

설마 주자가 나가 있는 상황에서 동팔을 상대로 홈런을 칠 줄은 몰랐다. 그래도 동욱이었으니 제일 큰 희망을 걸었던 클리블랜드의 팬들이었지만, 워낙 위기관리 능력이 좋은 동팔이 때문에 걱정도 되었다.

하지만 지금 홈런으로 인해 모든 걱정은 단번에 날아갔다.

동팔이 처음으로 허용한 투런 홈런으로 양키즈 팬은 망연자실해졌다. 하지만 팬의 반응과 달리 다른 의미로 초조해 하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성과가 없으면 안 되는데…….'

'동팔이가 자신이 감당하겠다고 했지만, 그렇게 놔 둘 수 없어. 어떻게든 그녀가 분석해서 동욱의 틈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 돼. 아니 그녀가 아니면 할 수 없어.'

그들이 긴장하는 것은 동팔이 무너질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었다. 어차피 지금 투런 홈런은 일부러 허용한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지금 허용한 점수는 고작해야 2점. 비록 상대 투수가 버겁긴 하지만, 주자가 계속 나갔고 공을 끝까지 지켜보고 있으니 조만간 교체할 타이밍이 온다.

그러니 2점을 더 얻을 수만 있다면 다시 역전이 가능하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하나. 이런 희생을 통해 혜진이 동욱에 대한 파악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     *     *

양키즈의 감독과 코치, 선수들이 마음속으로 떠올리고 있을 사람인 혜진은 방금 전의 상황을 찍은 영상을 계속 돌려보고 있었다.

구장에 있는 클리블랜드 팬의 환호성과 양키즈 팬의 안타까운 한숨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그녀에게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영상을 보고, 또 돌려보며 파악에 나섰다. 그리고 다행히 이번 영상에 대한 1차 분석은 빨리 나왔다.

"역시 평상시와 비교하면 반응속도가 더 빨라. 아주 약간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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